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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9년부터 국내외에 숨겨진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묻힌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중국대륙과 미주, 일본, 러시아 등 국외와 국내 항일의병지를 취재노트와 카메라를 메고 여러 차례 누빈 바 있었다. 그 역사 현장들은 거의 100년이 지난지라 대부분 그 원형이나 흔적을 찾기가 몹시 어려웠다. 여기에 '나만의 특종'이라는 제목으로 주로 역사 현장 답사 사진에 얽힌 뒷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다. - 기자의 말

천수동전적지인 길림성 팔가자임업소 정문
 천수동전적지인 길림성 팔가자임업소 정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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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스위스 농부들

1992년 8월, 스위스 루체른(Luzern)에서 가까운 필라투스라는 험준한 산을 리프트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뒤 하산할 때는 아프트식 등산열차를 탔다. 이 열차는 평행사변형으로 톱니바퀴 식 철로를 시속 7.2킬로미터로 쉬엄쉬엄 내려갔다.

그때 본 광경으로, 평야가 부족한 스위스인들은 해발 1천 미터나 되는 고지도 온통 초원으로 개발하여 소를 방목했다. 한편 산기슭 초지 곳곳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겨울을 대비하여 긴 낫으로 풀을 베고 있었다. 그네들은 "햇볕이 있을 때, 건초를 마련한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아마도 "햇볕이 있을 때, 건초를 말려라" 서양 속담은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이 속담은 유적지 답사자에게도 명언이다. 답사 중 색다른 풍물이나 역사 현장은 누가 뭐라 하든지 보이는 대로, 도착하자마자 사진부터 찍어둬야 된다. '다음에, 돌아올 때, 날이 개면 찍지'하며 다음으로 미루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름도, 유래도 아름다운 어랑촌마을
 이름도, 유래도 아름다운 어랑촌마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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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촌

1999년 8월 6일, 청산리 전적지와 백두산을 오르는 날 연변대 빈관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용정을 거쳐 어랑촌 전적지를 답사했다. 오전 7시 20분, 길가 시골사람들에게 몇 차례 물은 끝에 어랑촌(漁浪村)을 찾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 어랑촌 전적지는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어랑촌!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한 격전지답지 않게 마을 이름이 참 예뻤다. 이 어랑촌 마을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漁浪社) 마을사람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옮겨와서 개척한 마을로, 이주민들이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이 마을사람들의 갸륵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었다.

어랑촌마을의 통나무 굴뚝이 있는 집
 어랑촌마을의 통나무 굴뚝이 있는 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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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촌 전투는, 1920년 10월 22일 아침부터 어랑촌 마을을 중심으로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들 간 교전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이날 어랑촌 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의 전력을 투입하였다.

그 당시 이 일대의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 장군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일본군 전상자는 1000여 명으로 추산하였고, 박은식 선생의<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1200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오늘의 어랑촌은 50여 호 집들이 듬성듬성 어우러진 마을로, 절반가량의 집들은 아직도 1920~30년 당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토담집에 초가나 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덮었고 굴뚝은 홈을 판 통나무였다.

천수평 전적지

다음 행선지는 청산리전투지의 하나였던 천수평(泉水坪) 전적지였다. 어랑촌을 벗어나 서남쪽으로 달렸다. 마침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호로(胡老:중국 노인)에게 천수동을 물었더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를 달려도 천수동 마을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승용차로 비포장도로를 10여 분 달리자 그제야 깊은 계곡 속에 천수동 마을이 나왔다. 중국인들의 거리 관념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국토가 넓은 대국인이라 '조금'이란 단위가 몇 10킬로미터였다. 천수평 전적지는 지금은 천수동 마을 '길림성팔가자림업국천수동림장'(吉林省八家子林業局泉水洞林場)이 들어선 곳이었다.

1920년 10월 22일 꼭두새벽에 이동 중이던 우리 독립군은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이웃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독립군은 곧장 강행군을 계속하여 마침내 천수평에 이르렀다. 그때가 오전 5시 30분 무렵으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각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120여 명은 독립군이 접근해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독립군은 일본군 야영지를 완전 포위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갑작스런 독립군 공격에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일본군은 전의를 잃고는 허둥대기만 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120여 명 가운데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전멸시켰다.

중국 동북지방의 벌판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졌다.
 중국 동북지방의 벌판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졌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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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사진을 찍어두다

나는 천수동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전적지라는 임장(林場) 정문 현판과 건물 사진부터 찍었다. 그런 뒤, 공장 내에 전적비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사무실로 갔다. 직원에게 부탁했더니 그는 곧장 우리 일행을 공장장에게 안내했다. 공장장은 40대 초반의 한족이었다. 동포 기사가 중국말로 한참을 교섭하는 동안 그는 우리 몰골을 한참 훑고는 가부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공장장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 마침내 공장 내 모든 시설물이나 공장 건물도 일체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내가 나서서 사정하기에는 중국말이 벙어리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다행히 공장 현판과 건물이나마 미리 잘 찍어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창춘에서 하얼빈으로 승용차를 타고 드넓은 만주 벌판을 눈이 시리도록 보고 달리면서 몇 번을 카메라에 담으려다가 끝내 놓쳤다. 그 까닭은 날씨가 좋지 않았고 안내자인 김중생 선생은 일정이 촉박하다고 지평선은 만주 곳곳에서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고 하여,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개면 찍는다고 미뤘다.

하지만, 그날 장춘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빗줄기가 더욱 세찼고, 거기다가 열차 시간에 쫓기고, 날씨 탓으로 금세 땅거미가 깃들어 도저히 만주 벌판을 앵글에 잡을 수 없었다. 그 광활한, 아득한 지평선 만주 벌판을 끝내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고 귀국하자 내 마음의 눈에만 선할 뿐이라 두고두고 못내 한스러웠다. 인생사의 기회도 마찬가지이리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그 이듬해인 2000년 여름, 나는 혼자 중국대륙 답사에 나섰다. 2000년 8월 18일, 그날은 날씨도 쾌청하여 나는 만주벌판 지평선을 원 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한 번 기회를 놓쳐도  마음속에 담고 묵묵히 때를 기다리면 기회는 또 오는 모양이다.

아마도 우리네 인생도 그럴 것이다.


태그:#천수평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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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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