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친구들과 당산나무 그늘 아래서 놀았다여섯 명이 팔을 벌려 안아도 서로 손이 닿지 않았던 아주 큰 나무였다여순반란사건으로 피난 갈 때 중요한 짐들을당산나무 구멍 안에다 쌓아놓고 갔는데토벌작전 다니던 사람들이 불을 놓아짐은 물론이고 그 큰 나무까지 다 타버렸다타고 남은 가지 하나를 잘라서큰 책상을 몇 개 만들어 사용했다천년이나 되는 느티나무를아까운 보물 나무를 잃어버려서지금도 안타깝다김택종(83) 할아버지의 시 '천년의 나무' 전문이다. 지금까지도 살아 꿈틀대는 이념의 갈등을 느티나무에 빗대 묘사하고 있다.
마을이야기, 책이 됐습니다그 나무가 불에 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김 할아버지는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상한마을에 살고 있다.
산중 골짜기에는 돼지가 많아다마금(벼 품종-편집자주)을 심었네다마금 벼는 털이 많아 돼지가 먹질 못해까칠해서 가을에 벼 벨 때가 힘들어나락이 영글면 돼지 쫓는다고마을사람들 다 같이 횃불 들고 지키던 일지금 생각하면 꿈속 같아강연순의 시 '다마금 쌀'의 전문이다. 쌀을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는 농부의 마음과 당시의 시대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올해 나이 예순여덟 된 강씨는 곡성군 죽곡면 태평마을에 살고 있다.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이 최근 엮은 마을이야기책 <천년의 나무>에 실려 있는 글들이다. 도서출판 홈밸리에서 펴낸 이 책에는 곡성군 죽곡면에 사는 주민들이 직접 쓴 글과 구술채록으로 꾸며져 있다. 책의 제목은 김택종 할아버지의 시 '천년의 나무'에서 따왔다.
책에 실린 글에는 주민들이 농촌에 살면서 느끼는 마음이 곧이곧대로 담겨 있다. 문장은 짧지만 그 속에는 각자의 생애가 묻어난다. 행간마다 읽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뭉클한 감동도 안겨준다. 주민들의 눈에 비친 풍경이 보이는 그대로 그려져 있다.
농사일 건축일안 해본 것 없이고생으로 키운 칠남매가난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미안한 마음 가득하네건강하게 잘 자라손주까지 낳고 잘 사니이것이 행복이네.올해 일흔셋 된 김정숙씨의 '칠남매' 전문이다. 행간마다 수많은 정과 한과 눈물이 배어 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이 모여 한 구절 한 구절 시구가 되고 한 편의 시로 완성됐다. 그래서 더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김씨는 죽곡면 동계마을에 살고 있다.
이 책에는 마을주민들의 글만 있는 게 아니다. 글을 모르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김재형 도서관장이 직접 듣고 적었다. 김 관장은 주민들이 모여 있는 마을의 정자와 회관을 찾아다니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다시 읽어주며 검증을 받았다.
아이들 키운 거어떻게 키운 줄도 모르고얼마나 서러웠는지 말할 수도 없어고치리 골짜기 살면서잘 먹이지도 못하고산 넘어 동계로 학교 가면 오기만 기다리고 섰어애기 맡기고 일하러 갈려고큰딸한테 제일 미안해청소해라애기 봐라제대로 안한다고 때리고 욕하고지금 생각해도 미안해.큰딸을 향한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서는 으레 그랬다. 가슴 한켠에 애잔한 마음이 스며드는 것도 이런 연유다. 이 글은 고치마을에 사는 이정순(81)씨의 말을 김 관장이 그대로 옮겨 실었다. 제목은 '큰딸'이라 붙였다.
아이들한테는 늘 이렇게 말했네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게 너거를 키웠는데관청(경찰서)에만 가지 마라도둑질 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거라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살면서배고픈 일이 많았네나는 누구 배고픈 거 못 봐"너 굶으면 나도 굶자"하며 쌀 한 바가지라도 퍼줘장사꾼이 물건 팔러 오면 꼭 사줬어다른 집에 다니지 말고이놈 가지고 한 끼니 끓여먹으라고 쌀 담아줬어애기 난 데마다미역이고 쌀 한 되빡이고 다 가져다 줬어모르는 집도 줬어(이하 생략)"나는 누구 배고픈 거 못 봐"남양리에 사는 한명순(80)씨가 말로 풀어낸 것을 정리한 '나는 누구 배고픈 거 못 봐'의 일부분이다. 가난 속에서도 이웃과 깊은 정을 나눴던 내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훈훈한 공동체가 살아 숨쉬었던 옛 우리마을 이야기이기도 했다.
마을 이야기책을 묶어낸 이는 김재형(49) 죽곡농민열린도서관장이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살다가 전라도 곡성으로 둥지를 옮긴 김 관장은 2년 전 마을시집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를 낸 데 이어, 이번에 마을이야기 책을 엮었다. 발품을 팔면서 글을 모은 것은 물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는 일을 도맡았다. 출판 비용은 전남문화예술재단이 보탰다.
김 관장은 "책에 실린 글의 40% 정도는 주민들이 직접 써서 준 것이고 60%는 채록해서 실었다"면서 "마을이야기 책이 맑고 밝고 따뜻한 감수성에 가득 찬 새로운 농촌문화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준영 전남문화예술재단 이사장(전남도지사)은 추천사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향기는 사람에게서 나는 삶의 향기인데, 이 책에는 그런 사람 사는 냄새가 스며 있다"면서 "어르신들이 쓴 글이 비록 질그릇처럼 투박하지만 순수하고 진솔함을 느낄 수 있어 감동과 아름다움의 깊이가 더 크다"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평리 대황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곡성군농민회 죽곡면지회에서 만든 ‘농민문고’를 모태로 지난 2004년 만들어졌다. 3년 전부터선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 농민인문학강좌를 여는 등 농촌마을 도서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