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덜 뜬 사막의 새벽, 노트북을 찾고도 이틀이 지나서야 우리는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로 가는 투어 차량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삶을 엿보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면, 우리는 이번에야 말로 깊고 진하게 맛 본 셈이다. 비록 '만끽'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어 시간 만에 도착한 칠레와 볼리비아의 국경까지는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이어져 마치 브로커를 통해 몰래 국경을 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황망한 사막 한 가운데에 국경검문소라기보다는 초가집에 가까운, 경비나 경계라고는 전혀 없는 건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국경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국경심사를 통과한 뒤 칠레에서 온 여행자들과 볼리비아에서 온 여행자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며 차를 바꿔타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별 실감은 나지 않지만 지금부터 볼리비아다.
아타카마에서 떠나는 '우유니 투어'에 참석한 사람들은 국경을 지나 있는 국립공원 매표소에서 지프차를 배정받고 각자의 여정으로 흩어진다. 제법 시끌벅적 했던 여행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스페인 단체여행객이 우르르 팀을 이뤄 사라지고 나니 남는 것은 준과 나, 그리고 프랑스인 앙뜨안뿐. 드디어 해발 5000m를 향한 지프투어의 시작이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일몰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간헐천이 흐르는 라구나 베르데(Laguna Verde). '호수'라는 단어가 붙었지만 라구나 베르데는 아직도 더운 물이 흐르는 온천이다.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인 이 사막에 온천수가 나온다니 이를 믿어야 할까 싶지만 먼저 도착한 여행자들은 이미 옷을 벗고 욕탕에 들어섰다.
원인 모르게 솟아난 온천수는 얕게 패인 개울가를 따라 흘러 하늘을 그대로 담아내는 작은 호수를 이루었다. 여기가 사막임을 되새겼다면 도대체 어떻게 마르지 않는 것인지 물어라도 봤을 텐데 나는 눈부시게 맑은 하늘과 지구 끝까지라도 보일 것만 같은 탁 트인 시야에 온 정신을 빼앗겼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 정식 국경을 넘는 장거리 버스를 탔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이기에 더 감동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풍경을 따라 언덕을 지나니 썩은 냄새와 함께 곳곳에서 수증기가 올라온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온천임을 증명하는 장면이긴 하지만 '해발 4000m 사막에서 온천수가 흐른다'고 하면 보고 있어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절로 지어진다.
"이제부터 해발 4800m니까, 머리가 아프면 빨리 약 먹으래."다시 차를 달리는 도중 운전사인 리카르도가 심각하게 꺼내는 얘기를 앙뜨안이 영어로 다시 번역해 준다. 생각 외로 잘 버틴다며 서로를 신기해하던 나는 점심식사를 위해 들린 민가에 내렸을 때 처음 어지러움을 느꼈다. 말이 4800m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이 1950m지 않은가. 여기는 한라산을 세로로 두 개 쌓고도 800m를 더 올라와야 하는 곳이다.
차를 오래 타서 그런가 하고 밖을 걸었더니 기분이 몽롱하다. 분명히 길은 평지지만 누가 내 발 밑을 질질 잡아 끄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술에 취한 것처럼 저절로 몸이 흐느적거린다. 설마 싶어 무릎을 굽혀 도약을 해보지만, 분명 뛰었다고 생각한 몸은 채 20cm도 뜨지 못한 채 너무 빨리 지상으로 떨어져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차에 타면 괜찮겠지 싶었지만 어지러움을 너머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가방을 뒤져 쓰디 쓴 코카잎을 한 가득 씹어대고 나니 어지러움이 조금씩 가라 앉는다. 정확히 얘기하면 가라앉는다기보다는 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볼리비아에서는 누구든 고산증을 피해갈 수 없다.
우리와는 달리 태연하기 짝이 없는 드라이버 리카르도는 조금 낮은 지대로 이동하겠다며 라구나 콜로라도(Laguna Colorado)를 향해 차를 몰았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내려선 바닥에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역시나 소금이다. 우유니 소금사막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 사막 곳곳에는 이렇게 엉켜 붙은 소금덩어리가 남아 있다.
시선을 멀리 돌리니 희끗한 눈발이 남아 있는 화산이 보인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여전히 화성이나 달에 가깝다.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로 볼리비아를 선택한 여행자들은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다 호수의 깊숙한 곳까지 걸어 들어가면 뜻밖의 장면과 마주친다. 호수 위로 무언가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더니 조금씩 가까이서 바라본 그 정체는 플라밍고다.
무리를 지어 무언가에 녀석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위협이 될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다가서지만 여전히 수십 미터 거리가 남았음에도 여지없이 날개를 펼친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른다. 좀 더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는 안도의 한숨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민가에 가까워지자 모습을 드러낸 야마(Llama)에게서는 우리네 강아지 같은 정을 느낄 정도다. 낙타와 염소의 중간 단계 같은 모습으로 살찐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걷는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 그 야마가 저녁식탁에 올라 왔을 때는 한동안 망설여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볼리비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야마는 털과 가죽, 그리고 고기를 제공해주는 소중한 생물이다.
그 날, 식사를 마친 뒤 이상하게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건 오랜 여행자의 '감' 이었을까. 사막에서 해가지는 풍경도 이제는 익숙해질 때였는데도 말이다. 해도 달도 별도 모습을 감춘 하늘은 그저 불게 타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서 나무 장작이 타오르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하늘은 금세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그 풍경 아래, 몇몇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야마들을 이끌고 느릿하게 걸어 들어온다. 이들에게 노을이란 원래 타오르는 횃불의 모습인 걸까.
원래 끝내주는 하늘이 불타고 있으니 비교할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수초 간격으로 색깔이 변하는 자연의 마법은 온통 시뻘겋게 하늘을 불태울 듯하다 일순간 멈춰 섰다. 아아, 그렇지. 나는 지금 지구상에서 태양과 가장 가까운 노을을 보고 있다.
간략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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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서 볼리비아로 국경을 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칼라마에서 출발하는 정규 버스를 타는 것과 산페드로아타카마에서 출발해 우유니 소금호수로 가는 2박3일 투어에 참여 하는 것. 제법 비싼 투어이지만 성수기에는 일 주일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투어는 칠레에서 출발해 국립보호지역을 지나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끝이 나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 편도 여행이다.
볼리비아로 진입하기 한가지 꼭 명심할 것은 바로 고산병에 대한 대비. 4000m를 훌쩍 넘는 볼리비아에서는 산소 부족을 느낀 뇌가 팽창해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는 통증을 누구나 겪는다. 보통은 마을에서 파는 알약이나 마취제 성분을 함유한 코카잎이나 코카차를 섭취하면 견딜 만하지만 사람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중력의 몇 배가 되는 듯한 느낌과 이 훌륭한 풍경을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아깝다.
투어는 회사마다 가격이 많게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정작 여행의 질은 그날 만나는 지프의 운전사에 달려 있다. 일단 마을을 떠난 뒤부터는 드라이버 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기 때문. 아래는 직접 참가했던 투어회사의 정보.(2012년11월 기준)
2박3일 칠레발, 우유니 투어 : 9만 칠레페소(한화 약 20만 원) Flora&Fauna 국립공원 입장료 : 150bol(한화 약 2만 5천원)
좀 더 자세한 우유니 투어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301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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