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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말을 맺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생일에 부모님께 낳아주셔 고맙다는 전화를 드리게 된 것은 이 년 전, 우연히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그 날, 지인은 자신의 생일 이야기를 꺼냈다.

"아침에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어요.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가 건강하게 못 낳아줘서 미안하다 하시는 거예요."

처음엔 지인의 어머니가 감사 전화를 받고 좋아하셨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님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지인은 평소 천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 자식이 어머님은 항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자식의 인사에 되려 더 건강하게 낳아줬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신 걸 보면. 자식을 건강하게 낳아 주는 게 부모가 원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데도 말이다. 어머님의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어릴 적에는 생일이라면 당연히 "엄마, 내 생일 선물 뭐 해줄 거야?" 하고 물으면서 축하를 받을 궁리만 했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정작 생일에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부모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고등학생인 된 첫째 아이의 생일이 돌아오면 나는 어김없이 아이를 낳았던 때가 생각난다. 출산예정일이 2주가 지나도록 출산 기미가 없어서 유도분만을 하러 병원에 갔다. 오전에 유도분만제를 맞고도 다음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분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간호사가 배 위에 올라가 배를 눌러 주고 회음을 절개하고 아기 머리를 기구로 짚어 내어 간신히 아기가 나왔다.

그 뒤로 나는 기절을 했다. 흘린 피가 너무 많아 수혈을 몇 통이나 받고서야 의식이 돌아올 수 있었다. 긴급한 상황이 계속되어서 나는 분만 대기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우리에게 왔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그 날밤, 남편은 나와 아기를 돌보느라 인생에서 제일 긴 밤을 보냈다.

그렇게 태어난 녀석은 열이 오르면 의식을 잃는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머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만 오르면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뿐인가? 뼈가 보이도록 이마가 찢어진 날은 네 살 터울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추석 연휴였다.

중학생이 된 둘째도 돌이 되기 전에 가와사키라는 병에 걸렸다. 이 병을 빨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심혈관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다. 퇴원 전 심장 초음파를 찍고 두 달 뒤 다시 심장 초음파를 찍었다. 다행히 정상이었다. 그리고 가와사키 치료 후 생긴 아토피.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옷가지며 이불이 피투성이였다.

벅벅 긁어 대느라 아이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고 성격도 예민해졌다. 발등에 딱지와 진물이 얼마나 심했던지 양말을 신고 벗을 수가 없었다. 양말을 벗으면 딱지가 다 떨어져 피가 나왔다. 버선처럼 헐렁하게 만든 양말을 신고 다녀야 했다. 자라면서 아이는 조금씩 좋아졌다. 작년엔 학교의 대표선수로 지역 축구 예선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 녀석은 이 년 전, 귀에 쥐눈이 콩이 들어간 일이 있다. 응급실에 가서 두 시간 동안 그 작은 콩을 분해해서 꺼냈다. 처음엔 아이가 소리를 치며 울었는데 나중에는 기운이 빠져 소리도 못 지르고 울었다. 나는 아이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수술실 밖에서 울었다. 다행히 상처가 난 고막은 잘 아물었고 청력에도 이상이 없단다.

이렇게 세 아이를 낳고 아이들이 이만큼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 크고 작은 일로 나는 부모됨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다.

이렇게 고비를 건너 우리 아이들이 자랐고 또 앞으로 자랄 것이다. 우리 집 아이들만 이렇게 고비 고비를 넘겨 자란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나도 예외일 수는 없다. 내 머리에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지.

지인이 해 준 생일 이야기를 듣고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이 셋을 낳아 온 몸으로 부모됨이 무언지 깨닫고 있는 나는 우리 부모님께 고맙다고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드린 적이 있는 걸까? 처녀 때 술이 진탕이 되어 집에 온 내가 아파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평탄하게 자라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 한 적은 있는데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은 드린 적은 없는 듯싶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생일이 오면 부모님께 고맙다고 전화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도 너한테 미한한 게 있어"... 어머니의 고백

8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병원에 가니 8개월이면 아이의 머리가 밑으로 향해야 하는데 아이의 발 하나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인큐베이터를 준비하고 언제든 제왕절개를 할 준비를 해놓고 출산을 멈추는 주사를 투여했다.
 8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병원에 가니 8개월이면 아이의 머리가 밑으로 향해야 하는데 아이의 발 하나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인큐베이터를 준비하고 언제든 제왕절개를 할 준비를 해놓고 출산을 멈추는 주사를 투여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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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내 생일이 돌아왔다. 잊지 않고 친정에 전화했다.

"아버지, 저 오늘 생일이에요."
"그래?"

아버지는 나에게 답을 하시고는 옆에 있는 엄마에게 말을 한다.

"정민이. 오늘이 정민이 생일이래."
"아버지, 저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생각했던 말을 하는데 시작할 때와 달리 끝날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을 맺었다. 아버지도 내 말에 좀 당황하시는지 말을 더듬으며 엄마를 바꿔주신다. 엄마에게도 "엄마, 낳아 주시고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하고 간신히 말했다.

엄마는 잠깐 아무 알 없으시더니 말을 이으셨다.

"엄마도, 너한테 미안한 게 있어."

생각지도 못한 답이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지난 일일 텐데....... 묻지 않았다. "전화 줘서 고맙다" 는 엄마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지인의 어머니처럼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자식의 전화에 '미안하다'는 말로 답을 했다.

한참 뒤, 엄마에게 전화로 미안한 일이 무언지 물었다.

"응. 너 초등학교 운동회 때 부채춤 추는 거 사진 찍는데 보니까 정민이 네 한복만 금박이 없더라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잔뜩 화가 난 거 같았어. 그게 내내 미안했어. 너는 아이들한테 그러지 마."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땐 금박 한복이 참 입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에겐 뒷바라지해야 할 자식이 넷이 있었고, 난 막내였다. 언니 오빠 공부 가르치는 일 때문에 운동회날 겨우 하루 입을 옷을 사는 일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엄마의 말이 내 가슴에 콱 박혔다. 아마 우리 아이들이 '금박한복' 이야기를 듣는다면 '와, 외할머니랑 엄마랑 완전 똑 같아'라고 할 거 같다.

특히 삼 형제 중 둘째는 내게 불만이 엄청 많다. 겨울 잠바도 중학생이 되면서 처음 사줬고 여태 물려 입혔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나도 미안한 일들이 너무 많이 떠오를 거 같아 좀 걱정이다. 지금이라도 조금씩 줄여가야겠다.

그리고 해마다 생일이면 부모님께 잊지 말고 감사전화 드려야겠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나중에 자기 생일이라고 나한테 전화는 하려나?


태그:#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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