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창간 14주년 특별기획의 하나로 <행복사회의 리더십>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해 오연호 대표기자가 연재한 '행복지수 1위 덴마크의 비결을 찾아서'의 속편격이다. 덴마크 행복사회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우리는 더 나은 행복사회를 위해 오늘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를 모색해본다. 이 연재는 2014년 9월 초 단행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말] |
덴마크 농민들의 도전은 농촌 혁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그룬트비의 농민고등학교, 협동조합 만들기, 달가스의 국토개간은 모두 깨어있는 농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깨어있는 농민들은 농촌 혁신에 이어 정치의 혁신에도 도전했다. 농민의 당을 만든 것이다. 그 당의 이름은 벤스터(Venstre). 이 덴마크어의 문자적 의미는 왼쪽(Left)이다.
나는 지난 1월 27일 코펜하겐 시내 중심에 있는 덴마크 의회를 방문했다. 벤스터의 후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이빈 웨슬보(Eyvind Vesselbo) 의원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67세인 그는 정치에 관여한 지 25년 되었고 14년째 국회의원이다. 현재 벤스터의 사회복지 분야 대변인을 맡고 있다.
113년 동안 과반의석 당 없었다덴마크 의회에는 8개의 당이 있는데 그는 왜 벤스터를 선택했을까?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이란다. "우리 당은 중앙정부가 개인의 삶과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에 좀 덜 개입하길 원한다"고 말한다.
최근의 정책을 두고 볼 때, 주요 경쟁 상대인 사회민주당과 핵심적인 차이가 뭐냐는 질문에 "사회복지와 실업수당 등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정부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이 받는 것은 아닌지 점검 중"이라고 설명한다.
벤스터는 중도우파라 불린다. 2014년 현재 덴마크의 제1당이다. 그런데 집권당이 아니다. 왜 그럴까?
여기서 잠시 덴마크의 정치지형을 이해해 보자. 덴마크 의회 건물 지하 1층은 방문객 대기실이 있는데, 이곳의 구경거리 중의 하나는 179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된 의원 얼굴 사진들이다.
스크린은 변화무쌍하다. 약 3초 간격으로 당별, 성별, 지역별 의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벤스터 의원들만 보여주는 차례에서 주의 깊게 봤더니 전체 스크린 중에 4분의1 가량만 불이 켜지며 얼굴을 보여준다. 덴마크 제1당인데도 그렇다.
덴마크는 다당제의 나라다. 그런데 1901년 이후 2014년까지 113년 동안 그 어떤 당도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해본 적이 없다. 2014년 현재 전체 의석 179석 가운데 8석 이상 갖고 있는 정당은 8개. 제1당인 벤스터의 의석수는 47석에 불과하다.
20세기와 21세기에서 어느 당도 과반수를 차지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덴마크의 정부는 늘 연립정권이 담당해왔다.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공감대가 많은 정당끼리 의석을 합쳐서 집권한다.
2011년 10월부터 현재까지는 좌파연합정부다. 44석으로 제2당인 사회민주당이 주도가 되어, 중도인 덴마크사회자유당(17석), 좌파인 사회주의국민당(16석) 등과 연합해 집권하고 있다.
덴마크의 정치는, 당은 이렇게 많지만 크게 보면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 중도우파 벤스터의 대결로 이어져왔다.
벤스터는 영어로는 덴마크자유당(Danish Liberal Party)으로 불린다. 그래서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리버럴) 당들과 연대를 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도 그중 하나여서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했다고 한다. 덴마크의 우파가 미국의 좌파를 지지한 것이다. 헷갈리면서도 이해가 된다. 그만큼 덴마크의 정치지형은 전체적으로 왼쪽에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덴마크어인 벤스터(Venstre)의 문자적 의미는 좌파(Left)다. 그러니까 현 덴마크 정치지형에서는 중도우파인데 당명 자체는 '좌파'인 것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벤스터가 그런 이름을 가진 것은 첫 출발이 좌파였기 때문이다.
벤스터가 1870년에 당을 만들 때 대지주 등 보수특권세력으로 구성된 기존의 당 허이여(Hojre)가 존재하고 있었다. 벤스터에는 그들에 저항하는 농민들이 참여했다. 대농, 중농, 소농이 다 참여했다.
그렇다면 그 오래된 이름은 왜 지금 현실변화를 고려하여 개명되지 않고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이름을 바꾸자는 논의는 없었을까? 웨슬보(Vesselbo) 의원은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당들과 합당을 한다면 그때는 이름을 바꾸자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합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우파당이 세금 50% 찬성한 이유
벤스터가 정치지형에서의 지금의 자기 정체성과 모순되는 이름을 유지하는 이유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과 연관이 있다. 나는 '행복사회 덴마크'를 취재할 때마다 늘 이것이 궁금했다. 왜 덴마크에서는 우파마저도 사회복지 시스템을 만드는 데 협력했을까? 부자들이 세금을 50% 이상 내는 복지제도에 왜 찬성했을까?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역사적 이유가 있다. 덴마크에서는 우파 정당마저 사회적 연대에 바탕을 두고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파인 벤스터의 중심엔 농민이 있었고, 그들은 그룬트비 학교의 학생들이었고 협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 그곳에서 자유와 평등을 체화한 농민들이다(관련 기사 :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최초의 성인용 자유학교,
소 300마리가 만든 신뢰, 이곳 우유는 믿을 수 있다).
출발선부터 그들은 대지주 등 기존 특권세력을 혁파하고 자유를 챙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것을 이해해야 미스터리가 풀린다. 그런 유전자가 있었기에 '사회적 연대'를 철학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초당적 협력이 가능했다.
벤스터는 당시에 시대정신과 맞았기 때문에 1901년 처음 집권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산업화가 이뤄지고 도시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민주당을 만들자, 벤스터는 그들에게 좌파의 자리를 내주고 상대적으로 중도우파가 된다.
벤스터는 1924년부터 사회민주당에게 집권당 자리를 내준 이후 20세기의 대부분을 야당으로 보냈고 가끔씩 집권을 했다. 그러나 야당일 때나 집권할 때나 사민당이 주도한 사회복지정책의 필요성과 핵심 정책에는 뜻을 같이 했다. 특히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연속 2회 집권을 했을 때 사민당의 사회복지정책을 보수적으로 다소 '개혁'했지만 기본 틀은 크게 바꾸지 않았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덴마크 우파는 한국의 좌파보다도 더 못 가진 자를 향한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덴마크는 지구상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를 이기는 현명한 방법지금까지 덴마크 우파의 중심인 벤스터 이야기를 했다. 이제 덴마크 좌파의 중심인 사회민주당 이야기를 좀 해보자.
덴마크 정치사에서 1924년은 매우 중요한 해이다. 산업화 물결 속에서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당이 처음으로 36%를 득표해 제1당이 되었다. 이때부터 사민당은 20세기 내내 제1당의 지위를 빼앗기지 않았다.
첫 집권 때 수상이었던 토발드 스타우닝(Thorvald Stauning)은 1940년까지 무려 16년간이나 덴마크를 다스렸다. 그만큼 덴마크 현대정치는 사민당이 압도했다. 사민당이 처음 창당할 때 내세운 3대 가치는 평등, 자유, 이웃사랑이었다. 행복의 3대요소라 할 만한 것을 다 포함하고 있었다. 사민당은 그 꿈을 집권 동안 현실로 만들어내는 데 앞장섰다.
그렇다면 사민당의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첫째가 공산당과의 대결이었다. 행복사회 만들기에서 사민당이 공산당보다 낫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사민당은 맑시즘의 영향을 다소 받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와 분명히 선을 그었다. 혁명은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기존 헌법을 준수하면서 이뤄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민당은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바람을 타고 1919년 창당한 덴마크 공산당은 선거에서 1920년대에는 1% 미만, 1930년대에는 최대 2.4%를 얻었지만, 민심의 밑바닥에서는 선거 결과보다 더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큰 도시에서 큰 목소리를 냈다. 자본주의의 기득권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그들의 시원하고 과감한 목소리는 노동자들에게 매우 호소력 있게 들렸다. 그러나 사민당이 보기에 공산당은 평등을 강조하지만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봤다.
사민당이 얼마나 공산주의자들을 경계했는지는 이들이 1935년 9월 이른바 '코펜하겐 정보홍보 기획단'(HIPA)을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조직은 미국의 CIA, 우리나라의 국정원 같은 조직이다. 공산주의적 성향을 가진 개인이나 그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사민당은 그들의 당 안팎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사민당의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런 정보활동을 한 것이다.
사실 이런 활동은 '덴마크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룬트비의 자유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사상의 자유를 중시했으며 그것을 제한하는 어떤 행위도 반대했다. 그룬트비 정신을 위배하는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공산주의자를 경계했다는 것은 사민당이 얼마나 그들을 위험하게 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공산당은 1945년 선거에서 역대 최대치인 12.5%를 득표했다. 사민당이 32.8%를 얻을 때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사민당은 공산주의자가 발붙이지 못할 정도로 오히려 평등한 사회를 앞장서서 구현해냈다.
이때 사민당은 좋은 경쟁상대를 갖고 있었다. '사회적 연대'가 무엇인지를 아는 야당이 있었다. 경쟁상대였던 우파 벤스터는 공산당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큰 틀에서 협력했다. 덴마크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렸다. 공산당은 1960년대에 1%대 득표로 추락했다.
자유와 평등의 결합여기서 중요한 관전포인트가 있다.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덴마크의 주류 정치인들들이 선택한 길이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쉽게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 공산당 활동의 근거가 되는 불평등 요소들을 근본적으로 제거했다. 노동자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줬다.
그래서 노조가입률이 70%가 넘고, 평직원 대표들이 회사의 이사회에도 참여하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가지는 사회가 되었다. 대한민국 보수세력이 반공을 외치고 종북세력 척결을 외친 지 오래지만 양극화 사회를 해결하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덴마크인들은 실용적이다. 웨슬보 의원은 약 1시간 동안 덴마크 정치의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야가 협력을 잘 합니다. 그래서 법안의 85% 이상이 대다수 의원들의 찬성으로 통과 됩니다. 당내에서 이견을 낼 수 있는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되, 다른 당 사이의 입장차이를 놓고 충분히 토론하되, 막판에서는 합의점을 찾아냅니다. 그래야 일이 된다는 것을 서로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지요." 자유롭게 토론하되 일이 되게 만든다. 그런 문화가 있기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도 다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게 덴마크의 어제를 만들었고 또 오늘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