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관이 정치에 개입한 충격적인 사건, '워터게이트'가 터지자 당시 배후로 지목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사임 압력을 받는다. 궁지에 몰린 그는 TV연설 일정을 잡기로 결정하는데, 그 자리에서 뱉은 말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닉슨의 이 말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그 단어가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뇌리에 박혀, 연설을 들은 국민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단어 선택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닉슨 대통령은 결국 미국 정치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사임한 인물로 남게 된다.
말이 가져오는 효과, '프레임'의 힘2006년에 발간한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세계적인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인지과학과 언어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정치적 논쟁을 프레임으로 구성하는 일에 인지언어학을 응용하며, 말을 이용한 정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닉슨의 일화는 말이 가져오는 효과, 즉 '프레임'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또한 그 사례는 본문에서 미국 정치의 숱한 역사들로 끝없이 이어진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한 바로 그날부터 백악관에서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세금'이라는 말이 '구제' 앞에 붙게 되면,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은유가 탄생합니다. 세금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 놈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입니다. (중략) 그리고 곧 민주당원들까지 '세금 구제'란 말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격입니다. (본문 24~25쪽 중에서)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과학적인 것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큰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언어는 때로 단어 그 이상의 것이며, '개념(idea)'에서 출발하여 쟁점의 성격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세금 구제'의 사례는 보수진영의 전략적인 언어 사용으로 그 결과 이어진 선거에서 민주당은 참담하게 패배했다. '세금'은 나쁘고 이로부터 '구제' 해준다는 감세법안이 유권자들의 표심을 움직였고, 선거결과로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물론 그 감세가 실제로는 대부분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보다 '프레임'이었다
레이코프는 '프레임과 은유'의 힘이 정치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져다주는지 설명한다. 인지과학이 발견한 사실에 의하면, 프레임은 우리 두뇌의 시냅스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경회로의 형태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사실이 프레임에 부합하지 않으면, 프레임은 유지되고 사실은 무시된다"는 그의 말은 프레임의 위력과 작동방식이 어떠한지를 설명한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흔한 속설이다. 만약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 모두를 대중의 눈앞에 보여준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된 희망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다. 한 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 (본문 141쪽 중에서)저자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효과와 전략을 오래 전부터 알고 사용했다고 말한다. 지난 수십 년간 정치적인 쟁점에서 언어를 통한 '프레임' 구성으로 보수진영이 우위를 점해 왔다는 것이다. 살펴보면 한국의 보수진영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임기 당시 대운하 토건사업이 국민적 반대여론에 부딪히자 철회를 발표하고선 '4대강 사업'으로 명칭만 변경하여 재추진했다. 정확히는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바뀐 것이었다.
실제로는 강변을 파헤치고 콘크리트를 뒤덮은 보가 세워지는 환경파괴가 자행되었지만, '강을 살리고 식수를 보호'한다는 설명이 붙은 정책은 급물살처럼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다. 비판적인 의견은 "강을 살린다는 데 반대를 하다니?"라는 사람들의 물음 앞에 힘없이 바스라졌다. 진실을 알려야 할 학계의 침묵과 언론장악도 한 몫 했지만, 이는 분명 '프레임의 승리'이기도 했다.
책의 제목인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다시 가져와보자.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당연히 코끼리일 것이다. 미국 정치에서 '코끼리'는 거대한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공화당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애초에 불균형한 미국의 정치 지형에서 보수진영의 전략적인 구호를 그대로 인용하고 말하는 것은 곧 그들의 의도대로 말의 전쟁에 말려들어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하물며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는 오죽할까.
무심코 떠오른 박 대통령의 말, 혹시 이것도?진보주의적 가치관은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전면에 내걸지만, 선거에서는 그것이 큰 변수로 작용하지 못하곤 했다. 정책이나 가치관 그 자체로는 유권자들에게 직접 와닿지 않기에 그런 것이지 않을까. 결국, 문제는 '프레임'인 셈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표현은 언어인지학 분야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의도된 단어의 조합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전혀 다른 생각을 잉태할 수 있음을 밝혀낸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보면 말이다. 알고 있으면 활용할 수 있지만, 모르면 눈뜨고 당하게 되는 '수의 싸움' 같달까.
그러고보면 '세월호 침몰 사고'를 두고 "책임자를 문책하고 엄벌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고를 수습하고 인명을 구하며 시스템을 감독해야 할 정부의 대표인 대통령이 한 그 말은,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서 '책임을 물을' 위치로 순식간에 바꾸어 버린 한마디였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대통령의 입에서 우연히 나온 말이었을까, 아니면 의도적인 프레임이었을까?
낙태와 동성애, 안보와 경제 등 사회 전반적인 분야와 이슈를 아우르는 수많은 말들. 그 이면에 숨겨진 '프레임'을 분석하며 저자 레이코프는 말한다. 우리는 논의의 프레임을 재구성 해야 한다고, 변화를 원하면 스스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고, 이 말은 개인은 물론 정부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더 이상 보수진영의 말장난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은 많은 유권자와 야권의 정치인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 보수언론이 쏟아내는 화두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아라. 앞장서서 의제를 던져야만 승리할 수 있다. 쉽지 않게 느껴지는 '프레임'의 전투에서,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럼,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 글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씀 |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04. |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