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7장 비룡표국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라서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했소이다. 국주께서 이 점 해량해주시면 좋겠소이다."

노회한 담곤의 역습에 풍천의가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답했다.

"아니올시다. 이 늙은이가 나잇값도 못하고 역정부터 냈소이다. 공무에 바쁘신 귀관들을 어찌 이해 못하겠소이까. 다시 한번 사과드리오."

담곤이 풍천의와 조복을 향해 각각 읍을 했다. 다짜고짜 기부터 죽이고 시작하려는 쪽과 뒷일이야 어찌되든 당장은 기가 죽진 않겠다는 쪽 사이의 기세 싸움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합의 아닌 합의가 이루어졌다.

"담 국주께선 왕년에 비룡문의 장문인이셨죠."
"그렇습니다. 강호에 조그마한 문패를 내걸었던 적이 있습니다만 두 분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비룡문을 떠나 표국 운영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비룡문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풍천의가 말했다.

"현재 비룡문은 저의 수제자가 맡고 있고, 노부는 한 발 물러서 자문만 하고 있다오."
"표국과 문파를 병행할 수도 있었을 텐데, 비룡문은 떠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조복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그건 저희 내부 사정이긴 한데……, 사정을 밝혀드리자면, 무예의 길도 항산(恒産)이 뒷받침 되어야만 제대로 갈 수 있다는 게 노부의 신념이오. 그래서 영리 목적의 표국을 개설한 것이오. 표국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비룡문을 지원하면, 제자들의 경제적 부담이 덜어지고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이왕 시작한 거 중원 제일의 표국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소이다. 무도의 길에서 본다면 외도라고 할 수 있지만 세인들의 입방아에 휘둘릴 것 같았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담곤의 물 흐르는 듯한 답변에 풍천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일운상인 모충연이 사형되시죠?"
조복이 의표를 찌르듯 말했다.

"그렇소이다. 나에겐 대사형되시는 분이오."
"모 대협이 갑자기 운명하신 소식은 알고 계시오?"

"뭣이? 대사형께서? ……확실하오?"
담곤이 눈을 치뜨고 놀라서 물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입수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사인(死因)이 무엇이오?"

"당장은 밝힐 수 없습니다. 일단 사고사라고 해두죠." 
풍천의가 말했다.

"음……."
담곤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관조운이라고 아시오? 일운상인의 제자라고 하던데."

조복이 말했다.

"모르오, 대사형과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교류가 그다지 잦진 않았소. 게다가 내가 표국을 개국하고 난 이후에는 더욱 뜸했다오. 어쩌면 대사형께선 나의 표국 운영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오. 그나저나 관 뭐라는 제자는 내가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조복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풍천의를 바라보았다. 풍천의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복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비영문의 관외 제자로 관조운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모충연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았다. 이때 모충연이 관조운에게 모종의 비밀 유언을 남긴 것으로 생각된다. 모충연은 금의위에서 편찬하는 무예서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무공 내력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책임이 있다. 그런데 관조운은 스승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금의위에서 행방을 추적하던 중 그의 사숙뻘 되는 준목규운 담곤에게 간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당분간 비룡표국에서 잠복할 터이니 양해해달라는 취지였다. 담곤은 관에서 하는 일이니만큼 적극 협조를 하겠지만, 다만 표국 일에만 지장이 없기를 바란다며 승낙을 했다. 

조복은 풍천의와 비룡표국을 나오면서 은화사에 앞서 선수 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밝힐 수 없는 곳에서 얻은 정보이긴 하지만 한 발 앞서 비룡표국을 장악하면 은화사에 금의위의 정보력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줄 수가 있고, 여차하면 일을 독자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일이 더욱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 조복은 풍천의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은화사에서 서생을 추적하는 목적은 따로 있는바 그것은 무극진경이라는 비급을 입수하기 위해서다. 서생은 단지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한 실마리에 불과할 뿐이고, 진경을 입수하고 나면 그들은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금의위에 인력지원도 요청하고 필요한 정보도 의뢰할 것으로 보인다. 이 일에 대해 풍 장반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조복이 풍천의의 심중을 떠보며 물었다.

풍천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복이 예상했던 대로 겉으로는 은화사에 협조, 안으로는 금의위의 실리를 챙기자고 했다. 무극진경의 실체가 드러날 경우 은화사의 손에 떨어지는 걸 마냥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그러기 위해선, 즉 결정적 순간에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최악의 경우 은화사와 맞서는 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사전에 윗선에서의 재가나 묵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음, 신렵을 도성에 보내야겠군."

풍천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신렵이라면, 신 장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복이 물으며 생각했다.
풍장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풍천의가 자신의 심복인 영반 신렵을 도성에 보내겠다는 건 아마 금의위 총지휘사인 모빈 장군의 재가를 얻기 위함일 것이다. 조복은 자신의 의견에 선뜻 동조하는 풍장반의 태도에서, 이 자도 황궁 근처에 얼쩡거리고 싶어 안달 난 출세주의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로선 자신이 의도한대로 일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내심 기뻤으나 내색을 할 순 없었다. 이제 은화사가 어떻게 나올 것이냐 하는 것만 남았다.

구연정은 비룡표국 전각 중에서 유일하게 사치를 부린 곳이다. 수헌당 뒤에 후원을 만들어 가운데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었다. 못의 크기는 오십 평 정도로 그다지 크다고 할 순 없으나 깊이는 제법 깊어 물색이 은은했다. 팔뚝만한 잉어가 노닐기도 하지만 한켠에는 연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단오가 지나자 연꽃이 탐스런 봉우리를 맺고 있다. 구연정은 연못의 북쪽에 팔각의 형태로 지어져 있다. 누각의 문은 아직 떼 내지 않았지만 남쪽 창은 활짝 열어젖혀 따스한 햇볕이 누각 전체를 밝게 비추고 있다.

담곤은 먹이를 잉어에게 던져주며 상념에 잠겼다. 시간은 어느덧 오시 정에 가까워지고 있다. 몇 명인지도 모를 금의위 대원들이(아마 열 명 정도 되려나?) 표사 차림으로 위장해 표국 안을 휘젓는 것이 도통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거절할 명분도 의사도 없었다. 그들과 부딪쳐 봤자 당하는 건 민(民)이다. 막다른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저항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것이 관과 민의 관계인 것이다. 이럴 땐 그저 단순하게 힘과 힘으로 대결하고, 무공의 우열에 따라 관계와 질서가 즉석에서 정해지는 강호인들의 단순성이 그리워진다.

담곤의 상념을 흔든 것은 이번에도 관사(管事) 택영이다.
"장문인 어른, 손님이 또 오셨습니다."

표국에 손님이 드나드는 건 당연지사고 그중에서도 국주를 찾는 큰손이 있는 것 또한 일상사이다. 그러니 달리 무어라 할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구연정에 홀로 있을 때만큼은 누구도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 표국 내의 불문율이다. 이런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택영이니만큼 필히 곡절이 있겠지만, 어쨌든 고요한 정적이 불쑥 깨진 것이 담곤으로선 달갑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또 어떤 손님이냐? 어제처럼 무례하더냐?"
"글쎄요, 그게…… 저……"

"어허."
머뭇거리는 택영을 바라보며 담곤이 재촉을 했다.

"오늘 방문객 역시 신원을 밝히지 않습니다."
"허허, 강호의 도가 날로 땅에 떨어진다더니 빈말이 아니구나. 그래 오늘은 또 어떤 작자들인고."

"그러니까, 이 자들 역시 어제 온 자들 못지않습니다. 장문인 어르신의 함자를 들먹이며 다짜고짜 자신들에게 뫼셔오라고 재촉하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추일도영(追一刀影) 곽충(郭充)과 하마터면 충돌할 뻔했습니다."

추일도영 곽충이라면 비룡문 애제자 중의 하나로, 무공의 높음은 물론이려니와 괄괄한 성미로도 유명해 산서 일대에서는 그와 시비를 가리지 말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이다.  

"그래, 그 자들이 무어라 하면서 날 보자더냐?"
"용건은 직접 만나 뵙고 말하겠다면서 웬 패찰을 소인에게 내밀었습니다."

"패찰?"
"네, 은색 도금을 했는데 자작나무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뭣이라?"
담곤의 안색이 변하며 들고 있던 먹이를 홱 뿌렸다. 

"자네 그 사람들을 빨리 이곳으로 안내하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수헌당으로 가지."

담곤이 손을 홰홰 저으며 수헌당 쪽으로 가자, 장문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다는 듯 택영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뒤를 따랐다.

연못에는 갑자기 쏟아진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잉어들이 떼로 몰려왔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4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