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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생활 10년 만에, 중년에 들어서면서 '글로벌 그루브' 등 획기적인 비디오작품을 발표해 뉴욕미술계의 지축을 흔들다 - 기자 말

독일에서 첫 전시 10년 만에 대히트

1971년 11월 23일 뉴욕 보니노갤러리에 모인 존 레넌, 오노 요코, 백남준, 그리고 그의 기술담당자 아베 슈야(사진 왼쪽부터) Photo: Tom Haar Courtesy Kunsthalle Bremen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1971년 11월 23일 뉴욕 보니노갤러리에 모인 존 레넌, 오노 요코, 백남준, 그리고 그의 기술담당자 아베 슈야(사진 왼쪽부터) Photo: Tom Haar Courtesy Kunsthalle Bremen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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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마흔 줄로 들어서는 70년대 뉴욕미술계에서 작가로서의 자리매김이 시작된다. 특히 1967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성과 에로티시즘의 금기를 깬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공연으로 (나중에 선고 유예가 났지만) 샬럿이 체포·구금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로써 두 사람은 예술의 자유를 대변하는 아이콘이 된다.

백남준은 1967년부터 록펠러재단의 지원 하에 4년여만에 '슈아 아베'와 함께 1001가지의 영상편집이 가능한 비디오합성기를 내놓았다. 그 기술로 1970년 '비디오 코뮨'을 발표했다. 1971년에 전자아트전이 열린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오노, 레넌, 아베 등과 함께 찍은 백남준 사진에서도 그만의 작가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백남준은 미국대중문화의 트렌드를 꿰뚫고 있었고 그런 감각과 친화력으로 갤러리나 동료작가로부터 호응과 지지를 많이 받았다. 백남준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1963년 독일에서 충격적인 '첫 전시'를 연 지 10년만인 1973년 '글로벌 그루브'를 선보였다. 그 다음해 'TV부처', 'TV정원' 등을 발표해 대 히트를 친다.

'글로벌 그루브', 비디오아트의 신기원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TV첼로(1971)'를 연주하는 샬럿 무어먼이 보인다. 현란한 색채오 변화무쌍한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TV첼로(1971)'를 연주하는 샬럿 무어먼이 보인다. 현란한 색채오 변화무쌍한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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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발표한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는 1970년에 선보인 '비디오 코뮨'의 완결판으로 그 내용과 기법에서 훨씬 더 업그레이드됐다. 제목에 '글로벌'이 들어가 있는데 그냥 제목만이 아니라 실제로 세계 55개국에서 방영되었다.

기존의 회화가 구도와 색채, 형태가 중요하다면 이 전자회화는 빛과 소리, 움직임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간예술에 시간적 요소가 더해진다. 그리고 백남준은 지금은 누구나 다 익숙한 '글로벌' 개념을 도입한다. 이와 함께 "앞으로는 'TV가이드'가 맨해튼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워질 것'이라 주장하면서 'TV케이블시대'도 예견했다.

'글로벌 그루브'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다다익선'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킬 만큼 영상의 양과 질이 풍부해 '이미지천국'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래 선가 당시 미국에서 백남준은 미디어에 대한 신비주의와 과대망상, 지구촌에 대한 환상에 빠진 작가라는 좀 생뚱맞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구촌 다문화 실어 나르는 축제의 장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이 작품에 나오는 부분부분을 모음곡처럼 편집한 것이다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이 작품에 나오는 부분부분을 모음곡처럼 편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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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백남준은 자신의 연구가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글로벌 그루브'가 뭔 뜻이냐고 묻자 "70년대 글로벌 음악축제로 세계 모든 나라가 케이블 TV로 연결될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미리 예견한 일종의 상상적 경관"이라고 말했다. 풀어 말한다면 '지구촌시대 전 인류가 함께 모여 즐기는 환희의 만판놀이'라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활용되는 기법은 화면을 왜곡하는 것뿐 아니라 두 개의 영상을 혼합하여 뒤섞는 것이나, 백색광을 넣어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로 조합하는 것, 출력한 걸 재구성해 피드백효과를 주는 것 등 다양하다. 또한 그 속도감은 요즘 봐도 엄청나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도약하는 시발점이 된다. 여기에 그의 관심, 기법, 특성, 신념, 철학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콘텐츠는 마치 종자돈 혹은 원금과 같은 역할을 해 나중에 그의 대표작인 '굿모닝 미스터오웰'이나 '바이 바이 키플링'과 '다다익선' 등에 단골메뉴로 재활용된다.

백남준은 이 작품의 콘텐츠에 전 지구적으로 편향된 민족주의 경향을 없애고, 국가 간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를 극복하려고 번역이 필요 없는 춤과 음악을 가능한 많이 넣는다. 예컨대 서양의 록음악과 탭댄스는 물론이고 미국 인디안 나바호족 북소리, 일본 오키나와 전통음악, 재미무용가 이선옥씨가 선보인 한국 전통춤 등이 그것이다.

시공간 뛰어넘어 쌍방 소통하는 '정보아트'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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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백남준은 경계 없는 굳건한 공존의 지구촌이 되기를 갈망하며 인종문제, 세대갈등 등을 지구촌의 공동이슈로 다룬다. 어떻게 하든 국가 간 문화차이를 이해시키고 그 경계를 넘어 지구촌 사람 누구나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려 한다.

백남준의 전자아트는 이렇게 성격상 세상을 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여러 나라의 풍부한 문화나 예술, 동서양의 철학과 과학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다. 그래서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을 '정보아트(Information Art)'라고 지칭하는가 보다.

그리고 백남준은 우리시대에서 불쾌한 것은 정보의 입출력에서 균형감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통계에 의하면 우린 매년 4만 가지 광고를 봐야 하지만 그 중에 40개 광고방송에서 선전하는 상품만 구매할 뿐, 우린 그렇게 정신병원 소파에 누워있는 금붕어"라며 시청자가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돼 볼모로 잡히는 걸 늘 못마땅해 했다.

그런데 '글로벌 그루브'에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관객도 이런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마치 작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된 이런 콘텐츠를 자기 나름의 서사로 재구성해 다르게 구상해 보라고 권고하는 것 같다.

이상사회 '텔레토피아' 여는 비디오혁명

백남준아트센터에는 '메모라빌리아'라는 백남준의 '뉴욕 브룸거리 작업실'을 전시용으로 재현한 것이다. 예술혼을 불태우며 백남준이 이룬 비디오혁명의 현장을 한 눈에 보는 것 같다. 손때 묻은 전자부속품에서는 작가의 체취마저 느껴진다
 백남준아트센터에는 '메모라빌리아'라는 백남준의 '뉴욕 브룸거리 작업실'을 전시용으로 재현한 것이다. 예술혼을 불태우며 백남준이 이룬 비디오혁명의 현장을 한 눈에 보는 것 같다. 손때 묻은 전자부속품에서는 작가의 체취마저 느껴진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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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일방형 소통은 독재"라고 했고 1972년 '빙햄턴(Binghamton) 편지'에서는 "비디오 소통 혁명은 공간 대 공간, 혹은 평원 대 평원을 넘어 거침없고 혼선 없이 상호 소통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했다. 그는 세상과 어떤 장애도 없이 쌍방적으로 소통하는 게 바로 시대정신의 골자임을 비디오작품으로 강변했다.

50여년 밖에 안 되는 비디오아트는 이렇게 시각미술에서 기존의 물성개념을 벗어나 전자매체를 통해 시간을 서술하는 신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정착시켰다. 서양미술사에서 대상의 본질만 남기고 모든 걸 없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회화의 죽음을 상징하는데 이런 위기에서 미술을 구한 것이 바로 비디오아트다.

또한 이 혁명은 '기동성(움직이는 전자회화)'과 '즉시성(리얼타임)'이 특징이다. 붓이나 물감대신 TV로 표현하는 예술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패러다임이 엄청나게 바뀌는 시대에 맞게 인식을 넓혀주고, '텔레토피아'라는 이상사회의 단면도 제시한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그의 연구가 리비어와 인터뷰(1974)에서 "이제 혁명의 시대는 가고 예술의 시대가 왔다. 68혁명 이후 바리케이드시대는 지났다. 다른 사람이 헬리콥터나 위성을 소유하는 상황에서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제는 저항운동도 예술적이라야 한다"며 우리시대는 예술가가 진정한 혁명가임을 천명한다.

백남준의 제자 '빌 비올라'도 비디오아트에 대해 "비디오는 단순히 기록이나 녹화를 위한 도구가 아니고 세상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변형의 장치이다. 나와 세계 사이를 매개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기념비적 'TV부처', 뉴욕미술계 강타

백남준 I 'TV부처' 폐쇄회로(closed-circuit) 가변설치 1974-2000. 이 작품은 여러 버전이 있다. 위는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백남준 I 'TV부처' 폐쇄회로(closed-circuit) 가변설치 1974-2000. 이 작품은 여러 버전이 있다. 위는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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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74년 기념비적인 'TV부처'를 발표해 뉴욕미술계의 지축을 흔든다. 이 작품은 보니노갤러리 4번째 전시에서 천장에 '하늘을 나는 물고기'를 달아보려고 시도했으나 TV를 여러 대 구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제반 여건이 맞지 않자 결국 포기한다. 그 대신 TV 한 대만으로도 전시가 가능한 'TV부처'로 바꿨다.

이 작품은 비디오가 피사체를 촬영해 녹화하고 모니터로 생중계되는 폐쇄회로방식이라 실시간 피드백이 된다. 그래서 관객은 작품과 쌍방 소통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 자신도 모르게 작품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인 시게코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하지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시를 하는 남준은 형들처럼 부친의 재산을 관리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유학비와 생활비를 형에서 송금 받아 썼어요. 그런데 형들이 사업이 순조롭지 않아 집안이 기울고 그 재산도 몇 년 못가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져 그가 뉴욕 초기 생활이 가난했던 이유에요.

아파트관리비 다달이 갚는 것도 버거워진 남준은 1972년 7월 20일 그의 생일날, 일본에 사는 형에게서 부친이 남긴 유산을 받으러 갔어요. 형들은 남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당시로는 상당한 거금인 1만 달러를 안고 뉴욕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그 돈으로 맨해튼 골동가게에서 표정이 일그러진 불상 하나를 사왔어요. 쪼들려 살던 난 정말 화가 났죠. 그런데 2년 후 이 불상은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열린 4번째 개인전에서 소개되고 놀랍게도 그의 대표작이 됐어요. '아, 이 사람은 정말 천재구나, 이 사람이 돈 쓰는 것에 대해 불평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TV부처', 동양정신과 서양기술의 만남

197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Stedelijk)미술관에서 'TV부처' 전시할 때 왼쪽에 백남준이 직접 부처가 되어 퍼포먼스를 벌리다. 올 2월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에서 찍은 사진
 197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Stedelijk)미술관에서 'TV부처' 전시할 때 왼쪽에 백남준이 직접 부처가 되어 퍼포먼스를 벌리다. 올 2월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국제심포지엄에서 찍은 사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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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부처'는 유럽, 미국, 아시아 국립미술관 등에서 가장 많고 소장된 백남준의 대표작으로 그 버전도 다양하다. 그 형식은 단순해 보이나 그 사상은 심오하다.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하이테크가 만나야 동서가 창조적으로 융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동서 문명의 선후, 비교우위 등은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동양의 생명문화와 서양의 기계문명이 사이좋게 공존한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도 부처의 마음으로 돌아가 삶의 번뇌를 내려놓고 거울에 자신을 들여다보며 주변의 것과도 상응하게 된다. TV와 부처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고요가 또한 관객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뭔가 모를 감흥을 일으킨다.

또한 이 작품은 자연을 상징하는 '돌'과 문명을 상징하는 '철'을 매개로 여백미와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우주만물의 원리를 재해석한 이우환의 작품세계도 연상케 한다. 이런 동양의 통합적 사고는 분석적인 서양인에겐 나오기 힘든 것이다.

'TV정원', 자연친화적 문명비전 제시

백남준 I 'TV정원' 수십여 대 TV모니터와 식물들 가변설치 1974-2002. 여기 비디오 콘텐츠는 동서양 갈등을 해소하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요즘 회자되는 환경미술에 대한 선각적 혜안도 보인다
 백남준 I 'TV정원' 수십여 대 TV모니터와 식물들 가변설치 1974-2002. 여기 비디오 콘텐츠는 동서양 갈등을 해소하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요즘 회자되는 환경미술에 대한 선각적 혜안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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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연작'에 대해 정리해 볼 기회가 있겠지만 우선 서구관객들을 놀라게 한 'TV정원'을 하나 더 소개한다. 자연친화적인 이 작품은 60여대 모니터로 구성되었고 그 기저에 문명의 이기가 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유쾌한 가설이 깔려있다. 또한 이 작품은 천지인을 하나로 보는 동양의 '물아일체'의 원리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백남준은 "모든 기술이 인간화되지 못하면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예술도 인간화되지 못하면 예술을 위한 예술로 전락할 뿐"이라고 했고 또한 "만약 서구인 당신들이 기술만 매달린다면 전쟁이 날 것이다. 자연을 따르는 겸허한 삶을 위해서라도 자연 반, 기술 반이 좋다"고 말했는데 'TV정원'에는 그런 철학이 담겨 있다.

'TV정원'은 또한 자연을 전시장에 옮겨놓은 방식인데 이것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뒤샹'이 말한 "미술은 그리는 게 아니라 전시장에 사물을 갖다 놓는다"라는 한 개념과도 통한다. 하여간 이 작품은 당시 뉴욕에서 "자연과 기계를 융합하고 옥외와 옥내를 결합시킨 지상에서 가장 멋진 정원을 선물했다"라고 큰 호응을 얻는다.

덧붙이는 글 | [백남준 관련전시소개] 지금 백남준아트센터(용인)에서 위 내용과도 관련된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층에서는 '말에서 크리스토까지(From Horse to Christo)'라는 제목으로 2014년 6월 22일까지 열린다. 참여 작가는 백남준, 배트콕, 저드 얄커트이고 그 장르는 영상, 설치, 조각, 판화 등 총34점이다. 2층에서는 '달의 변주곡(Variations of the Moon)'라는 제목으로 2014년 6월 29일까지 열린다. 참여 작가는 백남준, 다비드 클라르바우트, 료타 쿠와쿠보, 안규철, 안세권, 조소희, 히라키 사와이고 그 장르는 사진, 영상, 설치 등 총18점이다.



태그:#백남준, #'글로벌 그루브', #'TV부처', #'TV정원', #정보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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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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