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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신 정신과 박사(마인드프리즘 대표)
정혜신 정신과 박사(마인드프리즘 대표) ⓒ 소중한

"염증으로 피부가 빨갛고 탱탱하게 부풀 때 메스(칼)를 대면 통증은 엄청 심해지고 상처는 더 덧나잖아요. 고름이 충분히 잡힐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그때 메스를 대면 빠르게 치료되고요."

정혜신 정신과 박사(마인드 프리즘 대표)는 정부가 추진 중인 세월호 침몰사고 유가족 심리치료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같이 비유했다. 유가족은 여전히 외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상담 방식을 적용하기 이르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PTSD의 심리상담이란, 치유자가 심리적 메스를 가지고 피해자의 상처 근원까지 피하지 않고 함께 들어가서 치유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며 "지금은 아직 (유가족의) 외상이 진행 중이라 메스를 들이댈 시기가 아니다, 메스를 대면 더 덧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심리 상담이 아니라 상담 받으라는 떼쓰기"

정부는 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즉시 유가족 심리 지원에 들어갔다. 주로 심리 상담 등의 방식이다. 안산에는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를 설치해 유가족 방문상담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접근에 문제가 있다는 게 정 박사의 주장이다.

그는 "정부 쪽 심리상담 요원들이 계속 유족을 찾아다니며 '빨리 상담 받아야 한다, 시기 놓치면 큰일 난다'며 상담을 강권한다"며 "대부분의 유족이 분노와 짜증으로 상담을 거부하는데도 권한다"고 전했다. 한 유족은 "상담이 아니라 상담 받으라는 떼쓰기"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 박사는 "지금은 일상을 챙겨주고 함께 울어주며, 아직도 외상을 반복적으로 가하는 이들에게 함께 따지고 분노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 비율이 높은 안산에서 유족과 생존자를 만나온 정 박사는 아예 이 지역에 계속 머무르면서 치유 시스템을 장기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부 주도의 트라우마센터가 생겼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피해자들이 마음을 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민간 주도의 치유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마인드프리즘을 그만두고 안산으로 들어간다"며 "이명수 심리기획자와 함께 '사회 치유적 모델'을 고민하며 기획하고 있다"며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점점 더 많은 분들의 손길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음은 정 박사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 전문이다.

1. 유족 부모님들이 늘 목에 걸고 다니는 번호 명찰이 있습니다. 팽목항에서 시신이 인양된 순서에 따라 붙여진 일련 번호. 그 숫자는 이제 그 아이(혹은 부모)의 출석부 번호처럼 됐습니다. 그런데 앞 번호대의 부모님들은 자기보다 뒷 번호대 부모를 보면 거의 무조건이라 할만큼 죄의식을 느낍니다. 아이를 찾느라고 나보다 더 피가 말랐던 부모에 대한 처절한 공감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직 아이를 찾지 못한 실종자 부모들에게 느끼는 죄의식은 어떻겠어요. 자기 아이를 잃은 슬픔이나 애도도 지금은 뒤로 미루는 상황입니다. 이 죄의식의 크기와 깊이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비슷한 번호대 부모끼리는 동질감 같은 것도 있습니다. 내 아이와 같은 시기에 인양된 아이는 내 아이와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한 아이일거란 생각때문이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동질감, 가장 슬픈 연대의식입니다..

유족 부모님들은 분향소 주변에 늘 반별로 함께 모여계세요. 집에 혼자 있으면 넘 힘이 드니까요. 어떤 엄마가 며칠 안 나온다 싶으면 즉시 연락하고 서로 찾아가고 챙깁니다. 유족 부모님들은 지금 어떤 상담자보다도 뛰어난 '상처입은 치유자'들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없는 밀착과 위로, 치유를 주고받는 협심자(協心者)들입니다.

2. 지금 상황은 정신과 의사들이 유족 부모님들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안 되는 시기입니다. 염증으로 피부가 빨갛고 탱탱하게 부풀 때 메스를 대면 통증은 엄청 심해지고 상처는 더 덧나잖아요. 고름이 충분히 잡힐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그때 메스를 대면 빠르게 치료되고요. 지금 유족 부모님들의 마음은 염증으로 치자면 빨갛게 하루하루 더 탱탱하게 부풀어가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상이 끝나고 고름이 깊게 잡혀있는, 외상 후(後) 스트레스 증후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분들의 외상은 여전히 진행 중(中) 입니다. 염증이 하루하루 더 탱탱하고 빨갛게 덧나고 있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 핵심은 아직도 남아있는 '실종자의 존재'이지만 정부가 날마다 날리는 다양한 비수들에 유가족들은 하루하루 더 깊이 찔리고 있습니다. 계속 되는 망언도 한몫을 단단히 합니다.

PTSD의 심리상담이란, 치유자가 심리적 메스를 가지고 피해자의 상처 근원까지 피하지 않고 함께 들어가서 치유를 이끌어내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메스를 들이댈 시기가 아니란 겁니다. 메스를 대면 더 덧나는 시기입니다.

이들에게 지금은 날카로운 전문가보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통과하는 고통스런 일초 일초를 담요처럼 싸안고 일상을 챙겨주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 아직도 외상을 반복적으로 가하는 이들에게 함께 따지고 분노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빨갛고 탱탱했던 염증에 고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는 메스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부 쪽 심리상담요원들이 계속 유족을 찾아다니며 '빨리 상담 받아야 한다, 시기 놓치면 큰일 난다'며 상담을 강권합니다. 대부분의 유족들이 분노와 짜증으로 상담을 거부하고. 그래도 계속 강권하고.

한 유족 부모님이 그러십니다. 이건 상담이 아니라 상담 받으라는 떼쓰기라고요. 유족들이 지금 상담 안 받아도 시기 놓치는 거 아닙니다. 오히려 시기가 덜 된 분들 훨씬 많습니다. 진정으로 이들의 자살을 막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조금 다른데 있습니다.

지금은 전문가 아닌 '사람'이 이들에게 최고의 치유자입니다. 그래서 저도 정신과 의사가 아닌 '사람'으로 이 분들 주위를 여러 방식으로 돌고 또 돌며 간간히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곧 때가 올 겁니다. 그러면 그때는, 잠시 아플 순 있어도 종래 아프지 않게 되는, 그런 치유적인 메스를 주저 없이 들 겁니다. 그때까지는 이분들을 극진하게 살피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3. 지금 심리 치유가 적극 진행돼야 하고, 진행할 수 있는 집단은 생존자들입니다. 우선 소아청소년정신과 선생님과 연대하며 저도 생존 학생들 치유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경기도교육청의 진심과 노력도 절절합니다.

생존 학생이나 그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심각한 증상들과 그로인한 고통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유족 부모나 실종자 부모들에게 느끼는 죄의식과 책임감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간 생존 학생들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저도 입박으로 꺼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생존학생들의 치유 상황에 대해 말하면 아마 생존학생들과 그 부모님들은 자기 아픔보다 먼저 유족 부모들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힘들고 위축될 겁니다. 

단원고 교사들의 고통에 대해 제가 언급하면 교사들은 생존학생과 부모, 유족들 모두에게 순식간에 죄인 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유족들의 고통에 대해 제가 말하면 오히려 유족들이 실종자 가족들이 받을 상대적 결핍감, 박탈감 때문에 더 많은 부담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세월호 참사의 가해자들은 털끝만큼도 죄의식을 안 느끼는데 피해자들끼리 모여서 스스로를 '상대적 가해자'로 느끼거나 그리 될까봐 자기검열을 모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죄의식, 책임감이 종래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상처입은 치유자'로 승화될 수 있을거라는 예감을 저는 합니다. 이분들 벌써 서로에게 그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놀랍고 감동스런 분들입니다.

4. 제가 지금 만나는 분들 중 중요한 그룹이 피해자가 많은 동네의 통반장님, 안산의 사회복지사들, 안산의 시민운동가들입니다. 피해자들과 가장 밀접하게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이고 친인척지간도 많고요. 저는 이분들에게 피해자를 만날 때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도움이 되는 것,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강의를 하며 다닙니다. 피해자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피해자들에게 가장 많은,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 분들을 도와드려야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갈 수 있습니다.

강의 중에 이분들은 정말 열심히 듣고, 꼬치꼬치 묻고, 눈물로 다짐합니다. 그러곤 불철주야 행동하고 계십니다. 이 분들도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이분들의 진심과 열정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세월호트라우마의 '사회 치유적 모델'>을 이명수 샘과 함께 깊이 고민하며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미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조만간 여러분들께도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그러고 싶어요.
알면 공감하게 되고 공감하면 행동하게 되니까요. 앞으로 많이 도와주시길.

5. 저는 한 달 여 안산을 오가며 제 삶의 중요한 결정 하나를 내렸습니다. 세월호 트라우마의 치유는 제가 부분적으로 시간을 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부 주도의 트라우마 센터도 생겼지만 피해자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마음을 주지도, 열지도 않으려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민간 주도의 치유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마인드프리즘을 그만두고 안산으로 들어갑니다. 이명수 샘과 함께요.

저는 마인드프리즘을 그만두지만 마인드프리즘은 저와 이명수 샘(선생님)을 적극 도와서 세월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에는 여러 방식으로 힘을 보탤 예정입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점점 더 많은 분들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때는 우리 직접 만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두 손 모아.


#세월호#심리상담#정혜신#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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