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방영된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성계의 왕조 창업에 반대하는 정몽주가 이방원의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는 장면이 나왔다. 칼과 철퇴를 맞은 정몽주는 개경 선죽교에서 아주 처참한 모습으로 고려왕조와 이별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의 역할이 실제보다 훨씬 더 강조되었다. 암살의 배후 조종자인 신덕왕후 강씨의 역할이 거의 부각되지 않은 것이다.
이성계의 둘째부인이자 이방원의 작은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왕실에 관한 안내서인 <선원보감>에 따르면, 공민왕 초기인 1356년에 태어났다. 장래의 남편이 될 이성계(1335년 생)는 이때 스물두 살로서 결혼 6년차 유부남이었다.
강씨 집안은 제31대 고려 주상인 공민왕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손꼽히는 정치 명문가였다. 이 집안은 충혜왕(제28대)·충목왕·충정왕(제30대) 시대를 풍미했다. 또 몽골 황실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가문이었다.
그러던 가문이 공민왕의 반몽골 정책과 더불어 풍비박산을 당했다. 강씨가 태어난 해에 공민왕은 친몽골파를 척결했다. 이 과정에서 강씨의 아버지인 강윤성과 숙부인 강윤충·강윤희 등이 반역죄로 체포됐다. 강윤성과 강윤충은 결국 사형을 당했다. 강씨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화를 당한 것이다.
이방원이 신덕왕후 강씨를 따르게 된 이유
그 뒤 이 집안은 개경을 떠나 황해도 곡산으로 이사했다. 곡산은 황해도 동북부 지역으로서 함경도와 가까운 곳이다. 그런데 곡산으로 이주한 것이 결과적으로 강씨와 이성계의 만남을 가능케 했다.
강씨와 이성계가 어떻게 만났는지를 궁금해 한 학자가 있다. 바로 18세기의 다산 정약용이다. 그의 조사 결과가 담긴 <다산 시문집>에 따르면, 이성계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과 개경을 오고갈 때마다 중간 지역인 곡산을 통과했다.
1370년경의 어느 날이었다. 30대 중반인 이성계는 이날 곡산에 들렀다가, 목이 몹시 말라 개울가에 있는 10대 중반의 아가씨에게 물 한 모금을 부탁했다. 이 아가씨가 바로 강씨였다. 그런데 강씨의 행동이 이성계의 신경을 자극했다. 목이 말라 죽겠는데, 바가지에 물을 뜬 뒤 버들잎을 띄우는 게 아닌가.
<다산 시문집>에 따르면, 이성계는 버럭 화를 냈다. 아마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요?"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러자 강씨는 "급히 드시면 체할 것 같아 그랬습니다"라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 대답이 이성계를 감동시켰고, 이걸 계기로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현행 대한민국 민법 제810조에는 "배우자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라는 중혼(重婚) 금지 규정이 있지만, 고려시대만 해도 일부다처가 허용됐기 때문에 이들의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결혼이 계기가 되어 강씨는 이성계와 함께 개경으로 이사하고, 강씨 가문도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
21세 연상의 남편과 살게 된 강씨는 아내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특히 이방원의 과거시험 공부를 잘 뒷바라지했다. 영흥에 사는 첫째부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강씨보다 11살 적었다. 나이로만 보면 강씨는 큰누나 같았지만, 이방원의 어머니 겸 선생 겸 선배의 역할을 잘 해냈다.
이방원은 열일곱 살 때인 1383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평균적인 선비가 서른이 넘는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던 점을 고려하면, 이방원은 상당히 빠른 나이에 합격한 셈이다. 이때는 강씨가 이성계와 결혼한 지 13년 정도 지난 뒤였다. 강씨의 뒷바라지 속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이방원은 강씨를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누가 부추겼을까
이렇게 이방원의 성장과 학업을 다 지켜봤기 때문에, 강씨는 이방원이라는 인물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이방원의 심리구조와 행동패턴에 정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덕분에 강씨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방원을 자기의 의도대로 움직여서 정치적 목적을 성취했다. 그런 사례 중 하나가 바로 1392년 정몽주 암살이다.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암살을 당한 것은, 이성계가 낙마 사고를 당한 틈을 타서 이성계의 측근들을 탄핵하고 축출함으로써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방원은 영흥 어머니의 삼년상 때문에 1391년 하반기부터 함경도에 있었다. 삼년상 기간은 윤달을 제외한 25개월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삼년상을 지킨 것은 아니지만, 상류층이나 선비 가문에서는 삼년상을 지키는 게 미덕이었다. 이렇게 삼년상을 지키고 있던 이방원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정몽주를 암살하도록 만든 인물은 강씨였을 가능성이 높다.
<태조실록>의 서두에 따르면, 이때 강씨의 사위인 이제가 삼년상 중인 이방원을 찾아갔다. 이제의 방문은 강씨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제가 개경 상황을 설명해주자, 이방원은 정몽주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했다. 그런 뒤 얼른 짐을 싸서 개경으로 이동했다. 삼년상이 뭐고 다 잊어버린 것이다.
이방원이 짧은 시간 내에 분개하고 행동에 나선 것은, 이제가 전달한 강씨의 말이 이방원의 분노를 촉발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강씨가 이방원의 심리구조를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것은 이방원이 정몽주 암살을 결심하도록 만든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왜 어머니는 잠자코 계십니까?"
강씨가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정몽주가 암살된 뒤의 상황에서도 잘 드러난다. <태조실록>의 서두에 따르면, 암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성계였다. 그는 자초지종을 들은 뒤 이방원을 불러 호통을 쳐댔다. 이때 방안에는 이성계와 이방원 말고도 강씨가 있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세상 사람들이 내가 정말로 이 일을 몰랐다고 하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방원은 "몽주가 우리 집을 해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라며 맞대응했다.
이성계·이방원 부자의 설전이 벌어지는 동안, 강씨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이방원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방원은 옆에 있는 강씨를 돌아보며 "왜 어머니는 잠자코 계십니까?"라고 말했다. 그제야 강씨는 이방원의 편을 들고 이성계를 진정시켰다.
"왜 어머니는 잠자코 계십니까?"라는 말은 정몽주 암살에 강씨 역시 개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씨가 사위를 보내 삼년상 중인 이방원을 데려오고 이방원과 함께 암살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면, 이방원이 강씨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말에 방영된 <정도전> 제39회·제40회에서는 신덕왕후 강씨가 이 사건과 무관한 것처럼 묘사되었다. 드라마 속의 강씨는 일이 벌어진 뒤에야 상황을 파악하고 그제야 이성계를 설득했다. 또 이 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의 부인인 민씨(훗날의 원경왕후)가 이방원을 자극해서 암살을 벌인 것처럼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역사 기록과는 무관하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향후 강씨보다는 민씨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설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민씨가 이방원의 정치참모 역할을 한 것은 조선 건국 6년 뒤인 1397년 이후의 일이었다. 드라마 속 설정과 달리, 조선 건국 직전에 이방원을 움직인 인물은 아내인 민씨가 아니라 작은어머니인 강씨였다.
이처럼, 정몽주 암살을 실행한 인물은 이방원이지만, 이방원을 움직인 인물은 신덕왕후 강씨였다. 아버지와 친한 인물을 암살한 이방원도 무서운 사람이지만, 첫째부인의 아들을 이용해서 암살을 조종한 신덕왕후 강씨 역시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