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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이맘 때 즈음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기자 말

밤이 기니 낮이 짧다. 오전 9시를 갓 넘어 눈을 뜨니 창문 밖 뒤뜰은 아직 어스름하다. 신선한 공기를 상상하며 창문을 연다. 순간, 살을 에는 찬바람에 사지가 얼어붙는 듯하다. 잠이 확 깬다. 괜한 짓에 아침부터 목청껏 소리만 질렀다. 영하 33도. 2013년 1월 20일 울란우데의 수은주다.

레닌 두상 앞에서... 울란우데 시내에 위치안 소비에트 광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두상이 설치돼 있다.
▲ 레닌 두상 앞에서... 울란우데 시내에 위치안 소비에트 광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두상이 설치돼 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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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옆자리는 싫어요"... 기차표를 예약하다

나갈 채비를 하고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 검색창에 '울란우데'라고 입력하니 다음과 같은 정보가 뜬다.

러시아 부랴티야 공화국의 수도. 인구의 다수가 몽골계. 몽골횡단철도(러시아~몽골 울란바토르~중국 베이징)의 시작점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교착지역. 2011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개최된 도시. 세계 최대 담수량을 자랑하는 바이칼호수에서 남동쪽으로 100km 떨어진 곳.

검색 결과를 보니 도시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은연 중 여러 경로를 통해 알음알음 도시를 경험하고 있었다.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문밖을 나서려던 찰나, 홍콩에서 온 '청'이 직접 가이드를 해주겠다며, 따라 나섰다. 그의 영어실력에 비해 내 서툰 영어가 마음에 걸려 움찔했지만 시내구경이 한결 수월할 듯해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숙소를 나와 먼저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튿날 슬류댠카로 떠나는 내 기차표를 예약하기 위해서다. 다음 목적지로 슬류댠카를 선택한 이유는 바이칼 호수를 따라 운행하는 동네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전날 추위에 떨며 40여 분 남짓을 거리에서 보냈는데, 오늘은 기차역까지 약 15분 만에 도착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모은 제본에 있는 '기차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 정보는 알고 보니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이었다. 구글 지도만 잘 살펴봤어도 청이 안내한 지름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애먼 짓에 시간낭비하고 배낭만 무겁게 만들었단 생각을 하니 후회스럽다. 

애써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출입문을 열고 대합실로 들어섰다. 꽤 북적거린다. 기차표를 예약하기 위해 매표소로 걸어가 열차정보가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작은 구멍을 통해 메모지를 받아든 직원은 내 얼굴을 한 번 훑어 보더니 곧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러시아어를 못하는 청은 곁에서 상황을 지켜만 본다. 주뼛거리며,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또 다른 메모지에 적어온 말을 읊었다.

"니 하추 라댬스 뚜알렛트"

인터넷에서 찾은 "화장실 옆 자리는 싫다" 뜻의 러시아어다. 키릴 문자가 아닌 한글로 발음만 적어왔는데, 다행히 매표소 직원이 웃는다. 반응이 좋으니 새삼, 용기가 샘솟는다. 바디랭귀지로 추가 요구사항을 설명했다. 요구조건이 제대로 충족됐는지는 모르나 매표소 직원이 발급된 기차표를 건넨다. 괜스레 뿌듯한 기분이 든다.

기차표를 지퍼가 달린 점퍼 안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염려스런 마음에 몇 번 더 눈과 손으로 확인했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이상하게 낯선 공간에 덩그러니 떨어지니 자꾸 소심해진다. 움츠려든 마음이 멋쩍어 세차게 출입문을 밀며, 대합실을 벗어났다.

두 번째 행선지는 러시아 정교회로 정했다. 우뚝 솟은 금빛 지붕이 눈길을 끌어 홀린 듯 발길을 옮겼다. 그리스 산토리니 섬이 연상되는 외형이다. 교회 안은 일요일(현지시간 기준)이어서 그런지 꽤 사람들이 많았다. 출입구에 서서 실내를 스케치하듯 눈으로 훑어본다.  

한국교회와는 사뭇 다르다. 생소한 실내는 생각보다 비좁고 긴 의자도 없다. 대신 기념품 가게로 보이는 곳이 입구 근처에 위치해 있다. 벽면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사제들로 보이는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물론 교인이 아닌 나로서는 인물들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청이 기념품 가게서 작은 양초를 서너 개 구입해 촛불을 밝혀 촛대에 꽂고 기도를 하기에 덩달아 초를 하나 사서 그를 따라한다. 여행이 무사히 끝나길 빌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들고 온 통에 물을 받고 있다. 짐작컨대 성수를 길어 나르는 듯했다. 종교인이 아닌 내겐 그들의 모습이 낯설다. 나홀로 이방인이 된 듯하다.
닮은꼴 외모의 울란우데 주민 울란우데는 인구의 다수가 몽골계 민족이다. 시내 한 쇼핑센터에 들어선 세탁소의 유리창 너머로 닮은꼴 외모의 사람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 닮은꼴 외모의 울란우데 주민 울란우데는 인구의 다수가 몽골계 민족이다. 시내 한 쇼핑센터에 들어선 세탁소의 유리창 너머로 닮은꼴 외모의 사람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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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익숙한 도시풍경... 이태원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

이튿날 떠날 생각을 하니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서둘러 교회를 벗어나 다시 거리에 섰다. 아이들로 붐비는 스케이트장을 지나 쇼핑센터로 가는 길, 불교사원을 연상케 하는 문양의 설치물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울란우데 시내에서 좀 떨어진 지역이 러시아불교의 본산이란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게 어렴풋이 생각난다. 저녁 무렵 숙소에 돌아와 찾아보니 약 30km 떨어진 '이볼긴스키 닷산'에 불교사원이 있단다. 추가로 티베트불교가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정보도 알게 됐다.

청이 "쇼핑센터"라고 설명한 건물 내부는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식품코너와 의류, 잡화 등을 판매하는 상점이 즐비해 있다. 다른 게 있다면 곳곳에 세탁소가 있고 동양인 외모 소유자들의 비율이 높다는 거다. 인구 다수가 몽골계란 정보가 빈말이 아님을 실감한다. 흡사 서울의 이태원 한복판에 서 있는 듯했다.

"울란우데의 중심지는 어디야? 이곳에 여행 오는 사람들이 주로 가는 곳에 가보고 싶은데."

서투른 영어로 질문을 퍼붓자 청은 소비에트 광장으로 날 이끌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두상이 있는 장소다. 걸어서 도착한 광장에서는 얼음조각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추운나라답다. 헌데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용, 뱀, 잉어, 호랑이 등 동양문화와 밀접한 것들이다. 멀게만 느껴지던 러시아가 가깝게 다가왔다.

얼음조각상을 놀이기구 삼아 뛰노는 아이들 곁에는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느라 정신이 없는 부모들이 서 있다. 조각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휴일에 가족나들이를 나온 여느 한국가정과 흡사하다. 그 틈에서 우린 어린아이가 된듯 한참을 뛰놀았다.

숨은 헐떡이는데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는다. 영하 33도의 수은주는 신체변화의 이상 징후로 이어졌다. 겹겹의 옷으로 둘러싸인 등 부분만이 살짝 눅눅하다. 외부에 노출된 피부는 빨갛게 변해 볼과 귀는 홍조를 띈다. 체온이 높아져 달아오른 게 아닌 상상 밖 추위에 적색경보가 켜진 것이다. "우체국에 가자"는 청의 제안이 없었다면, 광장 한편에 있던 '게르(몽골의 이동식 천막) 카페'의 문을 박차고 들어갈 뻔했다.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우체국은 그냥 구경만 하는데 그쳤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벼 한참을 대기해야만 청은 홍콩의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낼 수 있었다. 잠시, 몸을 녹인 후 우린 시내중심가로 이동했다.

휴일의 아르바트 거리는 한산했다. 대다수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노점에서 서너 명의 부리야트계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유목민 복장으로 하고 양말 등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거리는 누비는 사람들이 적었다.

거리의 간이매점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음료를 사서 우린 늦은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하지만 전자레인지에 갓 덥힌 음식은 추위에 금세 차디차게 변했다. 벤치에 앉지도 못하고 오두방정을 떨며 서서 끼니를 때운다.

아르바트 거리의 한 기념품 가게에 들러 작은 컵을 하나 샀다. 배낭에 챙겨 온 인스턴트 커피와 녹차 티백을 기차 안에서 먹기 위해서다. 키릴 문자로 '바이칼'이라고 적힌 글자 밑에 두 남자가 배 위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벌써부터 바이칼 호수로 갈 생각에 들뜨게 된다.

콩나물해장국 대신 스파게티 영하 33도의 수은주는 따근따근한 뚝배기 콩나물해장국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이날 저녁식사는 홍콩에서 온 청이 직접 만들어준 스파게티로 해결했다.
▲ 콩나물해장국 대신 스파게티 영하 33도의 수은주는 따근따근한 뚝배기 콩나물해장국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이날 저녁식사는 홍콩에서 온 청이 직접 만들어준 스파게티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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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어둠을 빨리 몰고 온다. 오후 5시를 지나자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숙소로 되돌아가는 길, 마트에 들러 이튿날 점심까지 해결할 정도의 음식을 샀다. 한국을 떠나자 먹고 자는 게 가장 큰 숙제가 됐다.

특히 배고픔을 달래면 입맛이 돋아났고 맛 좋은 음식을 먹기엔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값싸고 뜨끈뜨끈한 뚝배기 콩나물해장국이 간절한 저녁이다. 하지만 저녁식사는 청이 직접 만든 스파게티로 허기를 달랬다. 그의 친절이 한 줌 그리움에 위로가 되는 밤이다.

덧붙이는 글 | 여행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오블(http://blog.ohmynews.com/kaos80)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울란우데 여행#러시아#울란우데#아르바트 거리#소비에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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