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조복은 은화사의 예 총관이 맘에 들지 않았다. 조용히 임무를 지시하고 말없이 지켜보는 태도, 그 자체를 흠 잡을 건 없지만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없는 게 마땅치 않았다. 임무를 정확하게 하달하면 결과에 따른 책임도 명확해진다. 그럴 경우 주어진 임무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단점도 있지만 잠복 임무에 뭘 그리 융통성을 발휘할 게 있단 말인가. 과연 기다리는 자가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오더라도 발각될 것인가, 잠행에 성공할 것인가, 그것만 따지면 될 것을 지나치게 신중한 면이 있다.  

예총관은 금의위 위사(衛士)들에게 자중할 것을 지시했다. 표국 내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은밀히 행동해 주고 타인의 눈길을 끌지 말아달라고 했다. 관조운 일행의 표국 잠입을 예상하면서도 눈에 띄는 수색이나 순검(巡檢)은 자제해달라고 했다. 선보고 후조치를 원칙으로 하되 특별한 기미나 이상한 기색이 보일 때에만 검색을 하라고 했다.

잠복이란 게 은밀하면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기미가 보일 때에는 현장에서 즉시 상황을 장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불어 약간의 단서라도 발견했을 땐 철저하게 파헤쳐 도주의 빌미를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예 총관이 그럴만한 재량을 주지 않는 건 우리가 금의위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의 자질이 원래 그런 건가. 그랬던 예총관이 오늘 아침 회의에선 강경하게 나왔다. 사흘이 지났건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동안 본관이 신중했던 건 수배자를 이곳으로 유인하려 했기 때문이었소. 감시가 있다는 걸 눈치 채면 수배자가 걸려들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오. 허나 사흘이 지난 지금에선, 수배자들의 목적지가 아예 이곳이 아니거나, 아니면 이미 잠입했는데 우리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소. 그러니 오늘부터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작은 짐 하나라도 눈여겨보며 더욱 만전을 기해 주기 바라오."

예진충은 풍천의를 쳐다보며 "잠복, 탐색, 추적 등에 관한 기술(技術)은 금의위 여러분도 은화사 못지않을 터이니 더 이상 말은 않겠소이다"면서 명토 박았다.

조복은 하역장 한 구석에 있는 전각의 기둥에 기대고 서서 분주히 오가는 일꾼과 표사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찼다. 박주에서 관조운과 계집년이 도망칠 수 있도록 관병을 처치하고 수배령까지 해제한 것은 자신과 거래하는 자의 정보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흘이 지났으니 그자의 말대로라면 빠르면 그제, 늦어도 어제쯤 표국에 왔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기미가 없다. 정보가 잘못 됐거나 아니면 연놈들이 이미 잠행한 걸 자신들이 놓쳤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성질 같아서는 표국을 휘저으며 이곳저곳 닥치는 대로 수색을 해보고 싶지만 지휘권이 은화사에 있는 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입장은 지금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다. 금의위에 충성하는 것도 아니지만 은화사에 도움을 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단지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이 상황에 깊숙이 개입했을 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설령 연놈들이 나타난들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까. 뭐라 불러야 하냐니까, 무영객, 하고 짧게 답하던 그자에게 도움만 주면 된다. 그러니까 설령 이곳에서 연놈들을 잡게 된들 그건 은화사에 바치는 격이다. 한마디로 죽 써서 개주는 꼴이다. 어떡할까.

이번 일로 무영객과의 거래만 무사히 끝내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금의위에 잠입한 세작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군자금까지. 그렇다면 관가 놈과 계집년의 행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고 다음으로 은화사에 연놈들을 넘겨선  안 된다. 결국 관가 놈과 계집은 여기서도 탈출시켜야 하고, 그 다음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관가 놈의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풋, 조복의 커다란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조 영반님, 저 마차를 조사해 볼까요?"

조복의 상념을 깨운 건 사방(司房) 전광(全曠)이다. 사방은 위사보다 한 단계 위이고 영반 바로 아래 직급이다. 전광은 조복이 속한 금릉지부의 대원으로 조복의 요청에 의해 뒤늦게 금릉에서 달려와 합류했다. 조복으로선 오른팔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왜 그래? 수상쩍은 데가 있나?"

조복이 마차를 쳐다보았다. 마차의 구조물이 특이했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수레 위에 커다란 나무상자가 얹혀 있고 마부 뒤로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정도의 공간이 칸막이처럼 세워져 있다.  

"보시다시피 나무통이라서 속이 안 보입니다. 안에 사람이 있다면 대여섯 명은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지 않습니까?"
"알았어. 안을 살펴봐."
전광이 수하 위사와 함께 수레로 향했다.
"잠깐, 서라."

전광이 손을 들어 마차를 제지하자,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갑자기 고삐 잡힌 말들이 바로 서지 않고 푸욱, 푹, 연거푸 투레질을 해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삐를 죄는 마부의 손길이 섬세하지 못했다. 젊어서 그런지 손에 힘이 들어 간 모양이다. 차림이 꾀죄죄한데다 얼굴에 땟국이 자르르 흘렀다. 거기에 키에 비해 옷까지 깡총하니 궁끼가 절로 났다. 

"내용물이 뭔가?"
"잉어입죠. 생물이라 수조(水槽)에 넣어 가야 합니다."
마부가 답했다.

"안을 살펴야 하니 잠깐 내려라."
전광이 명령조로 말했다.

"저, 이 수레는 황궁에 바치는 공납물입죠. 오늘 중으로 개봉부까지 가서 조운선(漕運船)과 만나야하기에 시급을 다투고 있습죠. 나리께서 빨리 마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부가 내리자, 전광은 대답도 않고 마부석을 딛고 칸막이 판자가 있는 곳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칸막이 안에는 웬 여자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것 아닌가. 여자 역시 꾀죄죄한 옷차림에 얼굴이 시커멨다. 천한 일을 하는 게 몸에 밴 하녀이다. 

"웬 아녀자냐?"
"수조에 물을 갈아줘야 하고, 때가 되면 먹이도 줘야하는 인부입니다."
"어디 소속이냐?"
"잉어를 키운 곳에서 따라온 여종입죠."
"알았다."

전광이 말을 자르고 수조 옆으로 가자 여자가 뚜껑을 열어 보였다. 전광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물이 삼분지 이 정도 차있고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다. 전광이 고개를 들고 두리번대다가 수조 옆에 놓인 작대기를 발견했다. 그는 작대기를 집어 들고는 수조의 바닥을 휘젓고 벽을 몇 번 두드렸다. 전광이 달리 이상스러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수조 밖을 요모조모 살피려는 데 어느새 조복이 마차 옆에 다가왔다.

"어때?"
"별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빨리 보내줘, 황궁까지 가는 공납물이라는데 우리가 잡는 바람에 잉어가 죽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해지잖아."
조복이 귀찮은 듯 말했다. 황궁 공납물이 잘못 되면 표국의 원망은 물론이고 도찰원에 괜히 꼬투리 잡힐 수도 있다.

전광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이랴!"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끄으윽 하품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조복이 마부를 향해 다시 소릴 질렀다.

끼익, 수레가 다시 비명을 지르며 멈췄다.
"공납물을 운반하는 데, 왜 표사가 한 명도 없나?"

"헤헤, 잉어 따위를 운송하는데 어찌 표사를 붙이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누가 감히 황궁의 공납품을 노리겠습니까. 게다가 여기 비룡표국의 기(旗)까지 꽂혀 있는데……."
마부가 좌석 옆에 있는 기를 가리키며 굽실거린다.

"그래도 그렇지, 황궁에 가는 공납인데. 내가 금의위 기(旗) 하나 더 꽂아 주지. 훨씬 나을 거야."
조복은 뒤를 돌아보더니 전광의 뒤에 있는 위사(衛士)한테 말했다.

"이봐, 우리 기(旗) 하나 가져와 마차에 꽂아 줘라"

위사는 쏜살 같이 달려가 깃발 하나를 들고 왔다. 기에는 두 개의 원으로 둘러 싼 황금색 금(金)가 선명했다. 멀리서 봐도 금의위 깃발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위사는 마부석 옆에 있는 깃대꽂이에 기를 꽂았다. 

조복은 굽신거리는 마부에게 말없이 손을 들었다. 어서 가보라는 몸짓이다. 수레가 하역장을 벗어나 제융전을 지날 때까지 조복은 수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깐, 게 섰거라!"

뒤에 있던 전광이 소리쳤다. 조복이 돌아보니 수레 다섯 대가 일렬로 서서 하역장에 진입하고 있는데, 수레마다 사람 키만한 짐이 검은 천으로 덮여 있다. 수레가 서기도 전에 말을 탄 표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전광에게 무언가 말을 했다. 짐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모양이다. 조복은 이내 고개를 돌려 막 표국 정문을 통과하는 수조마차의 꽁무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49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