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퇴근길은 내게 운동시간이다. 광화문에서 공덕까지, 한 시간 남짓 빠른 걸음으로 걷는 운동은 신체는 물론 정신건강에도 좋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날도 걷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개운해진다.

2012년 8월의 퇴근길이었다. 서대문 골든브릿지빌딩 근처를 지나가는데 자꾸만 도로 쪽으로 다가가는 개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어서 위험했다. 반려고양이와 함께 살다보니 길에서 혼자 헤매는 개를 보면 마음이 쓰인다.    

가까이에서 보니 털이 꼬질꼬질한 것이 바깥생활을 한 지가 꽤 된 것 같았다. 주인의 연락처가 적힌 이름표 같은 것도 없었다. 개는 도망치지 않고 내 곁에 가만히 있었다. 그냥 두고 가자니 마음에 걸렸다.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로드킬 등의 위험을 피할 수 있고 굶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동안 주인을 찾기로 했다. 개를 안았다. 꽤 무거웠지만 목줄도 없었고, 그 상태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주위에 하나쯤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물병원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충정로를 지나 애오개, 공덕까지 걸어가는 동안 팔이 후들거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나중에 개의 몸무게를 재보니 8kg이 넘었다).

"그 녀석 호강하네!"

작지도 않은 개를 힘겹게 안고 가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들이 웃으며 한 마디씩 했다. 품에 안긴 개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는 내내 한 번도 짖지 않고 얌전했다. 반항하거나 물고 도망갈 수도 있을 텐데, 낯선 사람에게 이토록 순한 개라니…. 물론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개가 나를 배려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쌔근쌔근, 조용히 숨소리만 내는 길 위의 천사에게 나는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가까스로 병원을 찾았다. 유기동물을 따로 보호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미 적지 않은 개, 고양이가 수용되어 있었다.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집에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라서 병원에 맡겼지만, 낯선 곳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얄팍한 동정심 때문에 한 생명의 삶에 괜한 참견을 한 건 아닐까?

순둥이, 새로운 가정을 찾다

동물보호관리시스템  사이트 주소 www.animal.go.kr
동물보호관리시스템 사이트 주소 www.animal.go.kr ⓒ 동물보호관리시스템

전국의 동물병원, 임시보호소의 유기동물은 주인을 찾기 위해 동물보호관리시스템에 공고된다. 공고 기한은 열흘. 기한 내에 주인을 찾지 못하면 자체적으로 입양을 보내려고 애쓰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안락사된다. 유기동물은 넘쳐나고 수용공간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주인을 찾아야 했다. 개를 발견했던 장소 근처에 주인을 찾는 전단지를 붙였다. 하지만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주인을 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입양처도 알아봤다. 하지만 입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다 커서 귀엽지도 않은데다가 소위 '똥개'라 불리는 잡종은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린 '품종견'을 선호한다.

유기동물 보호소를 알아봤지만 모두 포화 상태였다.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푼돈이라도 내가 돕는 것이 마땅할 정도로 다들 형편이 어려웠다. 스스로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데려온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다행히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나서줬다. 주인을 찾지 못하면 자기가 평생 데리고 살겠다면서. 개의 순한 성격 때문인지 자꾸만 정이 간다고 했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교사인 친구는 과거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길고양이를 싫어했지만, 반려고양이를 통해 변해가는 나를 보며 동물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학생들에게 동물의 처우에 대해 알리고 있다.

친구의 집으로 개를 데려가기 전에 건강검진을 했다. 겨우 한시름 놓았다 싶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결과가 나왔다. 심장사상충 감염 진단을 받은 것이다.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흔한 병이지만 치료과정이 고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도 입양할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내게 친구는 이렇게 대꾸했다.

"건강하던 개도 나이가 들면 이런저런 병에 걸리잖아. 병들었다고 안 키우나?"

어찌나 고맙고 미안하던지. 입양과 함께 치료가 시작되었고, 친구는 개에게 '순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순둥이는 친구를 잘 따랐다. 친구는 순둥이가 밥그릇을 싹싹 비우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말했다. 퇴근 후 집에 가면 펄쩍 뛰어올라 반긴다며 기뻐했다. 친구의 가족들도 순둥이를 사랑으로 대했다. 나는 순둥이에게 친구의 연락처를 적은 이름표를 선물했다.

그런데 열흘쯤 지났을 무렵, 친구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택배를 받느라 잠깐 문이 열린 사이 순둥이가 가출했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무언가에 쫓기듯 정신없이 달려갔는데, 개천을 건넌 후부터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했다. 참담했다. 이제 겨우 새 보금자리를 찾았는데….     

순둥이를 찾아서...

 순둥이
순둥이 ⓒ 조세형

순둥이를 찾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사방에 전단지를 붙이고 사례금을 걸었다. 낮에는 친구의 가족들이, 밤에는 친구와 내가, 휴일에는 모두가 온종일 찾아다녔다. 무엇보다 심장사상충 치료가 급해서 빨리 찾아야 했다. 그래도 전화번호가 적힌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제보가 왔지만 결정적인 제보는 없었다.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하는 생각, 오늘은 순둥이를 찾을 수 있을까? 전단지를 붙이는 범위를 넓혀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개를 찾는 전단지를 보면 빌어주었다. 꼭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루에도 수차례씩 동물보호관리시스템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순둥이가 이름표를 분실한 상태로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 백 마리에 가까운 동물이 공고됐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버려지는 동물이 10만 마리에 육박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순둥이와 많이 비슷한 개를 보았다는 제보에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 양주의 보호소에 비슷한 개가 있어서 확인하러 갔다. 그러나 순둥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고마운 분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동네를 수색해준 제보자, 전단지의 순둥이 사진을 어루만지며 "어디로 갔냐"며 울먹이던 여성, 전단지를 돌리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유기견을 입양했다며 집에서 커피를 타가지고 와서 손에 쥐어주던 아주머니, 전단지를 보고 꼭 찾기를 바란다며 격려 문자를 보내준 사람들…. 고마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순둥이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옛 주인을 찾아간 걸까? 아니면 당시 직장에 있었던, 가족 중에서 가장 잘 따랐던 친구를 찾아간 걸까? 이름표까지 착용했는데 왜 연락이 오지 않은 걸까?

순둥이가 내게 남겨준 것

 순둥이를 처음 만났던 장소를 도로 건너편에서 찍은 모습.
순둥이를 처음 만났던 장소를 도로 건너편에서 찍은 모습. ⓒ 조세형

퇴근길 순둥이를 처음 만났던 장소를 지날 때마다 괴로웠다. 순둥이에게는 나를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았다. 이 미안함과 죄책감을 어찌해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겠지만 내 잘못은 사라지지 않는다. 순둥이를 찾아다니면서 목격했던 보호소의 비참한 환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순둥이와의 인연이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순둥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또 다른 순둥이란 유기동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음식·의복·장신구의 재료로 삼는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 그들은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어떤 의미로는 반려동물보다 친숙한 동물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혀끝의 즐거움, 한때의 유행이지만 동물에게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와 대안이 있지만, 동물에게는 역시 고통과 죽음뿐이다. 내 선택만으로도 '나로 인한 고통'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물론 일상에서 동물의 고통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따지면 먹고 입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할 바에는 어떤 실천도 무의미하다면, 이타적인 행동이나 사회변화를 위한 실천이 전부 무색해진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약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에 반대할 근거마저 사라지게 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고통부터 줄이는 실천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동물의 고통이 줄어든다.

"순둥아, 정말로 미안하다. 약속할게. 네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평생 동물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이는 글 | 출퇴근길의 추억 공모글입니다.



#유기동물#입양#순둥이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