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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소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국권침탈을 주도하여 '친일파의 대명사'로 등극한 이완용. 그는 살아생전에 온갖 친일 망언들을 쏟아냈다. 그는 이미 죽고 없지만 그의 망언을 여전히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맨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95년 전에 이완용이 쏟아낸 어이없는 망언들부터 살펴보자.
한국인의 10%가 넘는 200만 명 이상(일본측 추산은 110만 명 정도)이 "대한독립 만세!" 혹은 "조선 독립 만세!" 또는 "일본 나가라!"를 외친 1919년 3·1운동. 이때 한국인의 10% 이상은 단순히 시위에 참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헌병의 총칼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것은 시위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1910~1919년의 식민통치 9년간이 그만큼 괴로웠기 때문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그 9년 동안 한국인들이 잘살았다면, 그처럼 수많은 대중이 헌병의 총칼 앞에서 만세를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측이 그 어떤 통계 자료를 들이민다 해도, 3·1운동을 통해 드러난 식민통치의 참혹함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민족적 궐기에 대해 친일파 이완용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이완용의 느낌은 한마디로 '딱하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1919년 4월 5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발표한 경고문에서 확인된다. 이 경고문은,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만세운동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해 작성한 것이다.
'식민통치 순응이 살 길'이라 했던 이완용<매일신보> 톱기사로 실린 이 경고문의 서두에서, 이완용은 "오호! 조선 동포여! 속담에 사중구생(死中求生)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조선 인민은 생중구사(生中求死)하려 하고 있으니, 이 어찌된 까닭인가?"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참고로, <매일신보>에 실린 이완용의 경고문은 100년 전 문투인 데에다가 중간 중간에 중국어문장으로 되어 있어, 이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면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가 편하지 않다. 그래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대 한국어로 옮겼음을 밝힌다.
이완용이 인용한 사중구생이란 속담은 '죽을 고비에서 살 길을 찾는다'는 뜻이다. '생중구사'는 사중구생을 뒤집은 말이다. 충분히 살 수도 있는 상황에서 헛되이 죽을 길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3·1운동을 한 달 넘게 지켜본 이완용의 소감은 "다들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가는구먼!"이었다. '식민통치에 순응하면 죽일 고비에서도 살 길이 생기는데, 왜들 저렇게 살 길을 놔두고 죽을 길을 찾아가는가!'라며 그는 나름대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것은 이완용식 동족애였다.
뒤이어, 이완용은 자신이 글을 쓴 동기를 설명했다. "조선독립이라는 선동이 허언이고 망동이라는 점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천 마디 만 마디가 부족함이 없는데도 (일반 대중이) 계속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서게 되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뒤에, 3·1운동의 본질을 이렇게 해석했다. "처음에 무지하고 몰지각한 아이들이 망동을 벌이더니, 그 뒤 각 지방에서 뜬소문을 듣고 함께 일어나 치안을 방해하고 있다." 무지몽매한 학생들의 망동에 어른들이 부화뇌동하는 바람에 이런 사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완용의 제1차 경고문'이라 불린 이 기사의 결론은 "동포여! 내 말을 듣고 앞으로는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이완용은 "백작 이완용, 삼가 고하다"라는 표현으로 경고문을 끝맺었다. '경고문'이란 제목과 '삼가 고하다'라는 끝맺음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이완용, 3차 경고문에 모든 친일철학 동원제1차 경고문이 나가자, 한국인들 사이에서 분노와 비판이 터져 나왔다. <매일신보>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매국노의 말이 세상의 이목을 더럽힌다"라며 울분을 표시했다. 이완용도 이런 반응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4일 뒤인 4월 9일 제2차 경고문을 발표한다. 제1차 경고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고 뭔가 울컥했던 것 같다.
4월 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제2차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자기의 진심을 믿어달라고 말한 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한다. 여러분이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협에도 개의치 않고 경고문을 다시 발표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비판에 대해 다소 조롱 섞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자기가 소신을 갖고 제1차 경고문을 작성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외에는 특별히 추가된 내용이 없다. 제1차 경고문에 대한 대중의 반응 때문에 심기가 좀 불편했는지, 이완용은 "백작 이완용, 다시 고하다"라는 말로 끝맺음을 했다. '삼가 고하다'가 '다시 고하다'로 바뀐 것이다.
3월 1일 시작된 만세 시위는 4월에도 계속 확산되다가, 5월 하순이 되면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이완용은 제3차 경고문을 발표할 필요성을 느꼈다. 시위가 약해지는 시점에서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5월 29일 제3차 경고문을 발표한다.
확실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서인지, 이완용은 <매일신보>에 실린 제3차 경고문에서 자기의 모든 철학을 총동원했다. 모든 철학이란 것은 친일 철학을 말한다. 모든 철학이 다 동원되어서인지, 제3차 경고문은 앞의 두 개에 비해 내용이 훨씬 더 길다.
"일한합병은...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
제3차 경고문의 서두에서 이완용은, 시위가 누그러진 것에 대해 치하의 뜻을 표시했다. '잘 생각했다'고 칭찬한 것이다. 그런 뒤에 그는 "본인이 한마디 더 하고자 하는 것은, 독립론이 허망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각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일한합병은…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라고 그는 단언했다.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완용은 자기 나름대로 결정적인 근거들을 제시했다. 하나는, 한국 땅이 좁다는 것이었다. 이런 좁은 땅으로 무슨 독립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또 다른 근거는 "모든 수준이 부족한 천여 백만의 인구로는" 독립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국민 수준이 모든 면에서 질적으로 떨어지는 데에다가 인구도 천여 백만밖에 안 되니 무슨 독립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당시의 조선 인구는 2천만 명 정도였지만, 그는 한국인 인구가 일본인 인구보다 적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일부러 '천여 백만'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거짓말 같지 않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완용은 하느님까지 들먹였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상천(上天) 즉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는 "상천도… 두 땅의 분립을 불허하실 것"이라고 못 박았다. 두 땅은 한국 땅과 일본 땅을 지칭한다. 하느님도 일본의 통치 하에서 조선과 일본이 함께 살기를 바라실 것이라는 게 이완용의 말이었다.
그런 다음에 이완용은 식민통치의 우수성을 찬양했다. "총독 정치 10년의 성적을 볼 때, 인민이 향유한 복지가 막대하다는 점은 내외 국민이 공감하는 바다." 한국인의 10%가 목숨을 걸고 시위에 뛰어든 참혹한 현실을 무시하고, 식민 통치 10년간 한국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식민통치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되었다는 주장)의 교과서였다.
뒤이어 이완용은, 식민통치는 우수한 통치이므로 지금 단계에서는 총독부에 저항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또 일본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자제하자고도 말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지방자치, 참정권, 병역문제, 교육문제, 집회 및 언론의 자유 등의 문제가 꽤 많지만, 여러분의 생활 및 지식수준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해야만 동정을 얻을 수 있다."총독부에 요구할 게 있더라도 생활수준과 지식수준을 향상시킨 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요구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동정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독립하고 싶으면 힘부터 기르라던 이완용자신의 경고문이 나가고 나서 1개월 뒤에 시위운동이 약해졌다는 사실에 스스로 고무되었는지, 이완용은 일본인들에 대해 관용의 마음을 품자고 한국인들을 설득했다. 이완용의 마음속에서 호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는 조선인을 차별하는 내지인 즉 일본인들에 대해 아량을 갖자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내지인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지 않다고 할 수 없으니, 아량을 크게 갖고 가급적 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오."
이렇게 꽤 긴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한 뒤 이완용이 결론적으로 내린 한마디는 "여러분의 급선무는 실력을 양성하는 것뿐이다"였다. 독립하고 싶으면 힘부터 기르라는 것이다.
이완용은 실력을 양성해서 일본을 이겨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실력에는 주먹이나 무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주먹이나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는 게 그의 관점이었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이완용은 '정당한 방법'으로 일본을 상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이 정한 법과 제도 안에서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말은 일본에게 저항하지 말자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을사늑약과 국권침탈에 협력한 일로 인해 이미 큰 죄를 지은 이완용은 위와 같이 3·1운동 시기에도 동족의 기를 꺾고 동족을 우롱하는 죄악을 범했다. 그는 오늘날의 일본 총리나 장관들 못지않게 온갖 망언을 쏟아냈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1926년에 '대일본제국'의 '품안'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이완용들'이 기사의 서두에서 "이완용은 이미 죽고 없지만 그의 망언을 여전히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면서 "그 이유는 맨 뒤에서 언급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그 이유를 언급한다.
이완용은 죽고 없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이완용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친일 망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식민통치는 끝났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식민통치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마음 놓고 망언을 하는 것이다.
더욱 더 한심한 것은, 이완용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대한민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까지 탐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것을 막으려면, 이완용과 똑같은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지도층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하려면, 누가 이완용과 똑같은 말을 하고 다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95년 전 이완용의 친일 망언을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