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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교육감 시대'가 열렸다. 6·4 지방선거에서 17개 시도 중 13곳에서 진보 교육감이 탄생했다. 선거 결과를 두고,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혁신학교'로 상징되는 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앵그리맘'의 표심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혁신학교를 처음 도입한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 혁신학교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힌 수도권 진보 교육감 당선자, 교육평론가, 혁신학교 교장, 혁신학교 졸업생 등에 대한 연쇄 인터뷰를 통해 진보 교육감들이 추진할 교육 개혁의 미래에 대해 전망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입시 스트레스 없이 동아리 활동하면서 잘 놀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무언가 이루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퍼즐 맞추듯 자연스럽게 완성이 되더라고요."

지난 2월 서울형 혁신학교인 배화여고를 졸업한 정소연(20)씨가 좁은 대학문을 뚫은 비결이다. '교과서만 봤다'는 전국1등의 얘기만큼이나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이런 '기적'을 경험한 학생이 소연씨말고도 또 있다. 17일 오후 <오마이뉴스>가 만난 서울형 혁신학교 졸업생 네 명 모두가 그랬다. 혁신학교가 대학입시에 불리하다는 일반적 오해와 달리 이들은 오히려 "혁신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간호사가 꿈이었던 조용주(20)씨는 혁신학교 안에서 직접 간호동아리를 만들었다. 동아리 친구들과 동네 병원을 수소문 해 직업 체험까지 하며 차곡차곡 꿈을 키웠다. 이런 경험들이 대학 입시에서 빛을 발했다. 성적뿐만 아니라 특기, 창의력 등 학생의 '잠재력'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제'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하헌승(20)씨는 "경험한 게 너무 많아서 자기소개서에 뭐부터 써야할지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혁신학교 입학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입학 전후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혁신학교를 '유토피아'처럼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계했다. "혁신학교 학생들도 학원에 다니느냐"라고 묻자 모두 "우리도 학원에 다닌다"고 답했다.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벌인 좌담은 2시간 40분 동안 진행됐다. 예정시간보다 40분이나 초과됐다. 그만큼 혁신교육에 대해 나누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튿날 오전에 있는 전공시험 준비도 미루고 찾아 온 졸업생도 있었다. 좌담에는 하헌승(인헌고 졸업생)·조용주(인헌고 졸업생)·장유진(삼각산고 졸업생)·정소연(배화여고 졸업생)씨가 참여했다.

"입학사정관제는 '로봇경시대회' 출신이나 가능한 줄 알았다"

 17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서울형 혁신고등학교 졸업생들. 왼쪽부터 하헌승, 조용주, 장유진, 정소연.
 17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서울형 혁신고등학교 졸업생들. 왼쪽부터 하헌승, 조용주, 장유진, 정소연.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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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신학교 3년 동안 가장 특별했다고 생각하는 교육은 뭐가 있었나?
장유진(아래 유진) : 수업 방식이요. 토론이 없는 수업은 거의 없고, 수업 중간에 10분이라도 토론을 꼭 해요. 선생님이 '국어시간에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해 토론해봐라', '과학시간에는 동물실험이나 핵을 두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어 보자'고 해요. 토론이 수업의 한 방법이었어요. 중학교 때 수업하고 완전히 달라서 처음엔 정신을 못 차렸어요.

하헌승(아래 헌승) : 2학년 때 '교과교실제'(각 과목의 특성에 맞게 강의실을 차려두고 학생들이 찾아오게 하는 '교과 중심' 수업)가 도입됐어요. 수업이 되게 재밌어졌어요. 국어시간에는 교과서 안에 있는 문학 작품으로 연극을 해보고, 역사 시간에는 모둠 토론을 하면서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가르쳐 줘요 우리끼리 토론하다 답이 안 나오면 다른 모둠의 의견을 묻거나, 선생님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어요.

정소연(아래 소연) : 우리 학교엔 '하늘공부방'이라는 멘토제가 있었어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조금 뒤쳐지는 학생을 6개월 동안 책임지고 같이 공부하는 제도예요. 저도 후배 한 명과 짝이었는데, 처음에는 연락도 안 받고 게을렀는데 나중에는 꼬박꼬박 오고 질문도 하더라고요. 동아리 활동도 활발해요. 대기업·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기업 견학을 떠나는 아이들도 있고, 클레이 찰흙을 만드는 애들도 있었어요.

조용주(아래 용주) : 저도 동아리 활동 했던 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3학년 때 같이 간호학과 지망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간호학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이 친구들과 인근 병원에 찾아다니면서 '간호사 체험'을 시켜줄 수 있냐고 부탁하기도 했고요. 계속 거절당하다가 한 병원에서 허락해줘서 그날 하루 동안 직업 체험을 한 적도 있어요.

- 학부모 입장에서는 '공부하기 바쁜데 무슨 동아리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일류대학'에 진학하지 못할까봐 부모님이 걱정하지는 않았나?
유진 : 저는 강북에서 공부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중학교에 다니면서 명문고·자사고에 가겠다고 고집했던 학생이에요. 대학에 못가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거든요. 고등학교 가면 진짜 '빡세게' 해야지 했는데, 다 떨어지고 혁신학교로 배정받은 거예요. 부모님도 많이 걱정하셨고, 저도 분위기가 '헬렐레'일까봐 걱정했어요. 처음에는 학교 분위기가 낯설어서 우울증이 왔어요. 강의식 수업은 하나도 없고, 애들은 뮤지컬 연습한다고 복도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나.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저도 어느새 그런 아이들 속에 있더라고요. (웃음)

헌승 : 부모님은 공부하라고 압박하기보다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시는 편이에요. 오히려 제가 좀 걱정했죠. 1학년 때 처음 본 모의고사 점수가 낮아서 불안했어요. 그 때부터 앉아서 공부하는 건 내 적성이 아니다, 입학사정관제로 승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아니면 대안이 없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용주 : 제가 첫째라 부모님과 저, 모두 입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혁신학교도 다른 데 썼다가 떨어져서 '강제배정' 받은 거예요. 다니다보니 적성에 딱 맞더라고요. 적당히 공부하고, 동아리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말 그대로 학교생활을 즐겼어요. 그러다보니 입학사정관제로 대학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더라고요. '로봇경시대회' 같은 데서 입상한 애들이나 입학사정관제로 대학가는 줄 알았는데.

소연 : 부모님은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제가 공부를 아주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버려두신 것도 있어요. 혁신학교에서 입시 스트레스 없이 동아리 활동하면서 잘 놀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입학사정관제로 대학 간 친구들 중에, 과거경험을 억지로 끼워 맞춰서 자기소개서를 쓴 사람이 없어요. 혁신학교에서 경험한 걸 되돌아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퍼즐 맞추듯 무언가 완성되어 있는 거죠.

- 혁신학교의 핵심은 '자기성장'을 동반한 교육이다. 혁신학교 입학 전후를 비교했을 때  스스로 달라졌다고 평가하는 점은 무엇인가?
유진 :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유를 찾게 돼요. "남들 다 하니까 해야지"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이걸 왜 하고 싶어 하는지 알게됐어요. 또 꿈이 확실해졌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선생님이 하고 싶었는데, 중학교 때 '선생님 되면 교과서에 밑줄 치는 것이나 가르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혁신학교에서 국어시간에 영화를 만들고, 이야기 나누고 하는 걸 경험하면서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내가 지금껏 받아왔던 수업이 다가 아니란 걸 알게 되니까 꿈이 확실해졌어요.

헌승 :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요. 동아리 활동을 많이 하면서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시장에서 피케팅도 해보고, 어느 대학 교수님께 연락해서 인터뷰도 했어요. 거절도 많이 당했었는데, 단련되더라고요. 거절하면 또 해보지 뭐, 이런 식으로요. 또 혁신학교에는 정말 다양한 애들이 많거든요. 중학교 때 만난 애들은 꿈이 대부분 비슷하고 전형적이었어요. 근데 혁신학교 애들은 바리스타, 큐레이터 등등. 알지 못했던 직업도 알게 됐고, 시야가 넓어졌어요.

"혁신학교가 유토피아는 아니에요"

 17일 서울 종로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혁신고교 졸업생들. 이들은 "혁신학교 입학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라고 말했다.
 17일 서울 종로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혁신고교 졸업생들. 이들은 "혁신학교 입학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라고 말했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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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신학교 학생들도 사교육을 받나?
유진 : 혁신학교가 특이하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근데 혁신학교에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같아요. 사교육은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사회 풍조인데, 혁신학교 몇 개 만든다고 없어지진 않잖아요. 혁신학교 세워주고, 너희들은 공교육만 받으라고 하는 건, 좀 무리 아닌가요?

헌승 : 혁신학교에도 학원 다니는 친구들 있어요. 토론 수업만으로는 수능에 대비하기 힘든 점이 분명 있으니까요. 부족함을 느낀 애들은 스스로 학원에 찾아가는 거죠. 남들 다 가니까 가는, 그런 차원은 아니고요. 정말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껴서 가는 경우에요.

- 그럼 '일진'은 있나?
헌승 : 공부에 관심 없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은 있죠. 일진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하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친구들이 있죠.

유진 : 맞아. 혁신학교라고 그런 애들이 없겠어요? 유토피아도 아니고. (웃음)

용주 : '노는 애들'이 있어요. 근데 일반학교처럼 '얘는 모범생', '너는 문제아' 이런 구분이 없었어요. '노는 것'도 혁신학교에서는 하나의 개성이라고 해야 되나? 그리고 혁신학교에서는 노는 학생, 공부하는 학생이 함께 활동하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경계도 없어진 거 같아요.

- 혁신학교의 한계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유진 : 한 반에 정원이 30명쯤 되는데, 토론수업 때 한마디씩만 해도 시간이 다 가요. 15~20명 사이로 줄였으면 좋겠어요. 또 공부 잘하는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 대로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모두를 끌고 가려다보니 무리가 따르는 점도 있고요.

소연 : 동의해요. 모두가 행복한 교육은 모두가 똑같은 교육을 받는 게 아니에요. 개개인에게 맞는 교육이 중요한 거 같아요. 동아리 활동을 좋아하는 친구도 있지만, 반대로 싫어하는 친구도 있거든요. 그런 친구들에게는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고 봐요.

용주 : 혁신학교는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교육감이 바뀌어도 줬으면 좋겠어요. 곽노현 교육감에서 문용린 교육감을 바뀌었을 때 예산을 대폭 줄였어요. 돈이 없으니까 원래 계획했던 사업도 진행이 안 되고, 학생들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니까 '혁신학교도 별 거 없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전교조 선생님? 교실에선 중요하지 않다"

- '혁신학교는 전교조 학교다'라는 인식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 전교조 선생님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알고 있나?
소연 : 저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계실지도 모르는데, 제가 선생님이 전교조인지 아닌지 관심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럴 거예요.

헌승 : 저희 학교는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근데 전교조든 교총이든 상관없어요. 저희에 대한 열의만 있으면 돼요.

용주 : 선생님이 우리에게 사상을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었어요.

유진 : 전교조 명단 공개됐을 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저희 학교에 많더라고요. 뉴스에서 전교조에 관해 안 좋게 나오는 것도 봤는데, 전교조라고 해도 선생님마다 견해가 다 다르지 않나요? 옳다, 그르다 딱 자를 수 없는 문제 같아요. 또 학교 생활하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기도 하고요.

- 혁신학교에서의 경험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나에게 혁신학교는 OOO다'라고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헌승 : 나에게 혁신학교는 특별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준 곳이다. 저는 중학교에 '어중이떠중이'였어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꿈도 평범했고. 그런데 평범했던 내가 특별해진 걸 느꼈어요. 혁신학교에서 스스로를 수식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어요.

용주 : 혁신학교는 나를 알아가는 곳인 것 같아요. 혁신학교에서 몰랐던 내 모습을 많이 발견했어요.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 고민해봤던 거 같아요. 내가 뭘 잘하는지 탐구해보고, 스스로 진로도 찾아볼 수 있었어요

소연 : 나에게 혁신학교는 나 자신이다. 저는 한 번에 확 바뀌기보다 조금씩 변하는 스타일이거든요. 혁신학교가 딱 그래요. 서두르지 않아요. 저는 원래 언론정보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선생님은 국문과를 추천했어요. 경쟁률이 세니까 우회로를 알려주신 거죠. 이런 상황에서 일반고라면 고민없이, 성적에 맞춰 원서를 넣으라고 하겠죠. 근데 혁신학교 선생님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저를 설득하셨어요. 저도 충분히 고민한 끝에 국문학과로 진학했어요. 그래서 국문학과로 온 걸 후회하지 않아요.

유진 : 혁신학교에서 3년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너무 어려워요. 나에게 혁신 학교란 우물 밖이다.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는데 혁신학교를 만나 탈출했거든요. 지금도 우물 안에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우물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우물에 빠지는 게 두렵지 않아요.


#혁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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