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21일)에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 제47회에서는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속의 신덕왕후는 전처소생인 이방원과의 신경전 속에서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드라마가 아닌 실제 역사에서, 신덕왕후는 죽기 4년 전까지만 해도 이방원에게 매력적인 작은엄마였다. 이방원(1367년 생)보다 열한 살 연상인 신덕왕후(1356년 생)는 함경도에 있는 첫째부인 한씨를 대신해서 이방원을 열성껏 뒷바라지했다. 신덕왕후는 이방원의 과거시험 준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덕분이었는지, 이방원은 고려 우왕 때인 1383년 열일곱의 나이로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다. 10대가 문과에 급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 집안이 본래 여진족 구역에 살았다는 점과 무사 집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문과에, 그것도 열일곱에 급제한 것은 모두 대단한 일이었다. 개경의 명문가 출신인 신덕왕후의 기여가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였는지, 이방원은 함경도 어머니 못지않게 신덕왕후를 잘 따랐다.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친엄마처럼 따랐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스승·선배·누나처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정치적인 문제가 생겨도 작은엄마와 상의했다. <태조실록> 서두에는 그가 정몽주를 암살할 때도 신덕왕후와 상의했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들이 나온다.
끈끈한 동지였던 이방원-신덕왕후, 그런데...
이렇게 끈끈했던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사이는,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급속도로 틀어지고 만다. 원인을 먼저 제공한 쪽은 신덕왕후였다. 남편이 왕이 되자마자 이방원을 집중 견제하고 나섰던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이성계의 친위 세력인 여진족 사병부대가 의흥친군위라는 경호부대로 편입되었다. 이성계를 왕으로 만든 부대가 의흥친군위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의흥친군위의 책임자인 절제사가 되는 왕자는 차기 주상의 후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태조실록>에 따르면, 건국 22일 뒤인 태조 1년 8월 7일(양력 1392년 8월 25일)에 단행된 인사 조치에서 이방원은 의흥친군위 절제사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이방과·이방번·이제가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이방과(훗날의 정종)는 첫째부인의 아들이고, 이방번은 둘째부인인 신덕왕후의 아들이며, 이제는 신덕왕후의 사위였다.
첫째 부인 쪽에서는 이방과 한 명만 들어가고 둘째 부인 쪽에서는 이방과·이제 두 명이 들어간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인사 조치에는 신덕왕후의 입김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 당시 이성계의 정치적 판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 정도전과 신덕왕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인사 조치는 사실상 신덕왕후의 작품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인사 조치에서 이방원이 배제된 것은,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끈끈한 동지였던 두 사람이 건국 3주일 만에 이렇게 분열됐으니,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방원의 형인 이방과가 절제사가 된 데 대해서는 이방원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번·이제를 임명하면서 이방원을 배제한 것은 이방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인사 조치는 누가 봐도 좀 이상한 것이었다.
항상 이방원을 경계했던 신덕왕후그 뒤 신덕왕후는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된 이방번을 세자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자 신덕왕후는 정도전과 손잡고 둘째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된 왕자들이 후계자 구도에서 모두 밀려났지만, 신덕왕후는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절제사로 만든 뒤에 세자로 세우려고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사가 되는 것은 처음에는 매우 중요한 일로 인식되었다.
이방원을 그토록 아끼는 것처럼 보였던 신덕왕후가 이방원을 배제한 것은, 신덕왕후가 이방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 그의 능력과 야심을 잘 파악했던 것이다. 신덕왕후는 이방원과 함께 정치공작을 벌이는 중에도 항상 이방원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덕왕후는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방원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방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작은엄마가 자기를 밀어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정치적 동지였던 작은엄마가 건국 3주일 만에 자기를 토사구팽했다는 사실로부터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작은엄마가 정도전과 손잡고 자기를 견제했다는 사실은 더욱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임금이 아닌 재상이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전이 작은엄마의 편에 서서 이방원 자신을 압박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권 잡은 뒤 10년 동안, 이방원이 꾹 참은 것
이방원이 작은엄마한테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는지는 이성계가 죽은 뒤에 잘 나타났다. 이방원이 배신감을 느낀 1392년으로부터 이성계가 죽은 1408년 사이에는 중요한 사건들이 많았다.
먼저, 이방원이 배신감을 느낀 지 4년 뒤인 1396년에 신덕왕후 강씨가 사망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이방원은 정도전과 이방석을 죽이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다음에, 둘째형인 이방과(정종)를 왕으로 추대하고 정권을 잡았다(1398년). 그 뒤 이방원은 넷째 형 이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었다(1400년). 그런 다음에 이성계가 죽었다(1408년).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때로부터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 10년 동안, 이방원이 꾹 참은 것이 있다. 그것은 경복궁과 가까운 신덕왕후의 무덤이었다.
조선왕실의 무덤들이 한결같이 서울 외곽에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도성 안에는 무덤을 조성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덕왕후의 무덤도 원칙적으로는 도성 밖에 지어야 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죽은 신덕왕후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을 도성 안에 세웠다. 태조 6년 1월 3일자(1397년 1월 31일자)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정릉을 한성부 서부 취현방에 설치했다.
무덤이 세워진 장소는 훗날의 영국공사관(지금은 영국대사관) 자리였다. 영국대사관은 지금의 서울시청 좌측에 있다. 죽은 아내를 가까이 두고자 이성계가 이곳에 정릉을 만든 것이다. 관례에 어긋난 일이기는 하지만, 왕이 밀어붙이는 일이므로 누구도 막을 길이 없었다.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킨 이방원
신덕왕후가 죽은 뒤에 이방원은 작은엄마를 마음속에서 철저히 밀어냈다. 작은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만큼, 배신감과 실망감도 매우 컸던 것이다. 그래서 이방원은 경복궁 앞의 정릉이 보기 싫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에 정릉을 철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권을 잡은 뒤로 10년간은 정릉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다가 정권을 잡은 지 10년 뒤인 1408년에 이성계가 죽자, 이방원은 작은엄마에 대한 분풀이를 개시했다. 그는 이듬해인 1409년에 정릉을 파내어 도성 밖으로 이장했다. 그 뒤 정릉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정착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방원은 원래의 정릉에 있던 석물 중 일부를 청계천 광교(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했다. 성스러운 물건으로 인식되던 정릉의 석물을 광통교의 일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정도로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철저히 짓밟으려 했다. 작은엄마가 죽은 뒤로 13년이 지난 뒤에도 이렇게 행동한 것을 보면,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분노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로 인해 정릉은 왕비능이 아니라 후궁 무덤으로 격하되었다. '능'이 아닌 '묘'로 떨어진 것이다. 참고로, 왕족의 무덤은 능-원-묘의 3단계로 구분된다.
만약 정도전과 이방석이 이방원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정릉은 오래도록 한양 시내 유일의 왕릉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성계의 애정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이방원이 정릉에 대해 그토록 분풀이를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