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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통화할 수 있어?"

아내 목소리에 긴장감이 배었다.

"응, 얘기해."
"아휴, 오늘 학부모 참관수업을 갔다 왔는데..."

휴대폰 속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는 떨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떨리는 목젖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수화기에서 귀를 멀리했다.

학부모 참관 수업 갔다가 마음 상한 아내

아내가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지난 6월 24일에 있었던 초등학교 1학년 첫째 아이의 학부모 참관수업 때문이었다. 교실에 들어가 뒤편 알림판을 무심히 봤는데 아이들의 성적이 적나라하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알림판에는 수학시험이나 국어 받아쓰기, 한자 쓰기 혹은 줄넘기 등급대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스티커가 유난히 적어서 속상하다고 털어 놓았다.

나도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담임선생님은 나름 소신 있게 하는 일이겠지만, 이 학급의 성적 데이터가 알림판에 버젓이 공개되어 있는 걸 유쾌하게만 바라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반에서 자기 위치를 파악해서 더욱 열심히 할 수 있게 동기부여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나 부모는 몇이나 될까? 게다가 매월 성적순으로 원하는 자리를 선택해서 앉게 한다. 키나 번호 순이 아니고 성적이 좋은 아이가 원하는 자리를 먼저 차지하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도 이렇게 성적을 대놓고 공개하지는 않았다. 프라이버시이기도 하고, 같은 반 친구들끼리 어색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오히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일까. 정부는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공교육의 기능을 늘리고, 선행학습을 중지시켜 아이들이 공부로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겠다고 공헌했지만, 이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다. 요즘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익힌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학부모 면담 때 다른 학생들과 같은 수준을 유지해야 수업진도를 나갈 수 있으니 '신경'을 써 달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저녁에 숙제하는 첫째 아들 한자쓰기랑 국어 받아쓰기를 끝내고 수학문제를 푸는 중.
▲ 저녁에 숙제하는 첫째 아들 한자쓰기랑 국어 받아쓰기를 끝내고 수학문제를 푸는 중.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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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태를 확인시켜 주듯 초등학교 문을 나서면 온통 학원 천지다. 보습학원, 수학 영어 등의 단과 학원부터 전 과목을 모두 가르쳐 주는 '사교육상품'이 널려 있다. 초등학생을 위한 특수목적고 입시학원까지 있다. 정부가 아무리 공교육을 살리자고 깃발을 높이 들어도 사교육이 이렇게 만연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아이를 처음 초등학교에 보낼 당시에는 아이에게 공부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다짐했건만, 입학 3개월 만에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다른 학생에 비해 학습능력이 크게 떨어지니 마음이 급해졌다. 같은 반 학부모들이 추천하는 학원을 알아본 적도 있다. 소수 정예반과 일대일 수업, 문제집 풀이에 아이는 초등학생인데도 오후 8시가 다 되어야 집에 온다. 어릴 적 난 공부와 담을 쌓았기에 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아들놈은 아직 성적순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올 텐데 그때가 되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

몸집만한 가방 멘 아이 안쓰러워

독서 과제 중인 첫째 아들 책만큼 아이에게 좋은 것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책읽는 습관만큼은 만들어 주고 싶다.
▲ 독서 과제 중인 첫째 아들 책만큼 아이에게 좋은 것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책읽는 습관만큼은 만들어 주고 싶다.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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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키도 유난히 작다. 아침에 학교 갈 때 제 몸뚱이만 한 크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바닥에 딱 달라붙어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이가 안쓰럽고, 교육제도를 바로 잡지 못하는 국가가 원망스럽고, 어쩔 수 없이 이 혼란스러운 사교육 대열에 동참하는 부모들이 불쌍하다. 그래서 요즘 '대안학교'가 뜬다지만,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 저녁은 아이와 함께 책도 읽고, 한자도 익혀야 하고, 받아쓰기 연습도 해야 하고, 수학 문제집도 풀어야 한다. 공부하기 전에 무거운 가방으로 쳐진 어깨 좀 주물러 주고, 밤까지 책과 시름을 하는 아이의 머리를 시원하게 해줘야겠다.


#사교육#선행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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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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