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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 육군 병장을 막 제대한 남자다. 이제 25살. 남들보다 늦게 갔다 왔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남지 않는다. 어차피 가야할 군대. 내가 사회에 좀 더 공헌하고 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이 이곳 저곳에 취업했다. 그때 나는 군대에서 운전을 했다. 운전병. 나의 직책이다. 운전 하나 재밌게 배워간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남들보다 뒤처지고 싶진 않다. 이제 내가 잠시나마 했던 '뒤처지지 않기 위한' 구직기를 써보려 한다.

나의 스펙- 학보사 생활 3년 끝?

내가 군대에 늦게 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학보사 생활이다. 남들은 놀고 먹고 한다는 대학생활을 나는 스스로 고생길(?)에 들어 섰다.

대학 학보사 생활은 지금도 말하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남들이 다 놀러 갈 때 나는 편집국에 틀어박혀 기사를 쓰고 후배들을 돌봐야 했다.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먹었다. 그래야 글쓰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지금도 내 기사의 반은 닭과 밀가루의 합작품이다. 그 생활 덕택일까? 남들이 쌓는다던 변변한 토익 점수 하나 만들지 못했다. 지금도 난 토익 무능력자다. 이 학보사 활동 외에는 특이한 경력 사항이 없다.

아, 하나 있다. 전국대학생기자연합(아래 전대기련)에서 잠시 몸담았던 것. 운동권이냐구? 아니다. 겨울기자한마당에서 집행부 맡아서 했던 것. 그것이 전부다. 무슨 엄청난 의식이 있어서 한 게 아니다. 그저 대학기자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설렘에 하게 된 거다.

이게 내가 가진 스펙의 전부였다. 간간히 했던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그나마 그것도 3개월도 채 안된다. 전역 후 내 스펙을 작성해 나가다 보니 정말 나는 미친놈이었다. 그저 학보사만 판 미친놈.

"그래도 선배들이 최고..."

그래도 학보사와 전대기련 경력은 언론사에서 조금 인정을 받았다. "그래. 그래도 선배들이 최고지." 같은 언론 선배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을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곳저곳 불러주는 곳은 있었다.

잠깐 사이 이런(?) 스펙으로 언론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소위 얘기하는 메이저 급 언론은 없었지만, 구직 사이트에 있는 언론사에는 전부 넣었다. 그리고 오는 전화들.

"서류 합격하셨고요. 면접보러 오세요!" 

신기하게도. 영어 성적 하나 없는 나에게 이런 행운이. 대부분 주택이나 대학과 같은 특정한 것만을 취급하는 언론사였지만, 그래도 갓 전역한 내가 이렇게 쉽게 팔린다는 게 신기했다. 옷을 갖춰 입고 첫 면접을 했다.

면접의 기본도 모르던 풋내기

 MBC <무한도전> 프로그램 중 무한상사 면접 장면.
 MBC <무한도전> 프로그램 중 무한상사 면접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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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면접을 본 곳은 서울 중구에 한 언론사. 간편한 청바지 차림에 셔츠를 입고 갔다. 첫 면접이라서 그런지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정말, 날 면접하던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면접인데 이런 차림이라니? 내가 정말 개념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면접이 끝난 후였다.

분명 느낌도 좋았고 재밌게 끝내고 온 것 같았다. 그저 일만 달라고 했으니까. 고생시켜달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나오면서 본 지원자들은 죄다 정장차림이다. '아 떨어졌구나'라는 생각만 하면서 지하철을 탔다.

두 번째 면접은 교대. 교대 근처에 있는 언론사였다. 면접은 메이저 언론인 출신 편집국장이 봤다. 규모는 작았다. 그래도 그 편집국장과 기자들은 나를 아껴주고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었다. 본격적인 연봉 문제. 음. 너무 짰다. 솔직히 어느정도 각오하고 왔지만, 그정도를 생각했다. 그래도 현실로 다가오니 갈등이 됐다. 아직 대학도 1년 정도 남은 상황. 정중히 사양했다.

"합격 전화가 달갑지 않다"

그때 당시 내 수중에는 돈 20만 원이 전부였다. 한 번 면접을 보러 가면 차비만 5천 원 이상. 밥값에 뭐에하면 하루에 2만 원 금방 나갔다. 많이 곳에 합격했지만, 전부 갈 수는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전부 쫓아갔다가는 내 수중에 돈이 바닥 날 것 같았다. 결국, 두 번째 면접을 끝으로 나머지 면접을 전부 취소했다.

아직은 내가 본격적인 취업에 뛰어들 준비가 안 됐다. 미련이 남았지만, 아쉬움을 뒤로 했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느 회사에서 나의 이력서만을 보고 전화를 한 것이라 했다. 추천하고 싶다고. 그래도 그 회사만을 가 보기로 했다.

그곳은 보험 회사였다. 처음엔 홍보와 마케팅으로 나를 꼬득였지만, 결국 보험을 팔라는 얘기였다. 나를 추천한 사람은 능숙하게 사람을 요리했다. 믿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교육은 들을 만 하다고 했다. 돈을 지불해 준다는 약속을 믿고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상했다. 수업이 끝나고 준다던 돈은 등록하고 영업해야 준다는 것으로 바뀌었고, 월급도 성과급이었다.

처음 추천한 사람에게 물었을 때는 그런 얘기는 없었다. 자신은 월급을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뭔가 크게 속았다. 그래도 이미 수업을 들을 만큼 들은 몸. 결국 3주차 되던 때에 빠져 나왔다. 더 있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험을 팔고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면접을 봤던 곳에서 합격 전화를 받았지만 이 일에 대한 호기심에 거절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잠시 동안의 외도는 큰 상처로 나에게 다가왔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오늘도 노력합니다

지금 나는 인바운드(텔레마케팅의 한 형태로 고객으로부터 온 전화를 콜 센터에서 받아 처리하는 것) 업체에 취직했다. 잠시 머리도 식히면서 내 나름대로 공부하려고 한다. 메이저급 언론을 지망하기 위해서는 토익은 필수란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네들이 토익을 필요로 하니, 그 토익 점수 만들어서 한번 뚫어보려 한다.

얼마나 잘난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기에 학보사 3년 경력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지 궁금하다. 이번 구직을 통해 깨달은 건 정말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돈만을 노리고 오는 사람도 있고 돈만을 보라면서 유인하는 사람도 있다. 합법적인 보험 업계에서부터 심지어 잠시 면접을 봤던 대부 중개 업체까지.

2년간 군에 있다가 와서 세태를 잘 모르는 건지, 세상이 원래 이랬는데 이제 깨닫게 되는 건지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구직#인턴#전역#언론고시#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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