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30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커다란 화재가 났다. 새해를 앞두고 인기 록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사망자만 195명에 달했고, 부상자 700명이 넘는 대참사였다.
사고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안 돼 소방대원들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었다.
부상자들과 가족들, 소방관, 구급 요원들이 몰려들어 사고 수습에 정신이 없는 순간, 추기경은 부상자들을 챙기며 위로를 건넸다. 당시 모습은 전국에 생중계됐고 사고의 아픔 속에서 모두에게 위안과 큰 힘을 안겨줬다.
이 멋진 추기경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누구일까. 본명은 낯설지만 그가 지금 쓰는 이름을 알면 누구든 '아하!'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는 바로 교황 프란치스코다.
교황 이해 위한 열쇳말... '예수회, 프란치스코 성인, 아르헨티나'
2013년 2월 28일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퇴임하면서 3월 13일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는 모든 사람들을 격의 없이 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등 낮은 곳을 향한 모습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큰 관심사다. 가톨릭의 대표로 그가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받는 존경은 이전 교황들과 비교될 정도다. 오는 8월에는 한국 방문이 예정돼 있어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교황과 나>는 교황 프란치스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 때 '교황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는 해설서다. 지금의 교황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주목되는 것은 저자가 해방신학자라는 데 있다. 해방신학은 '가난과 싸우며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잡는 신학'이다. 남미의 저명한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저자 김근수는 교황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쇳말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교황이 줄곧 몸 담았던 '예수회'와 '프란치스코 성인', 조국 '아르헨티나'다.
예수회는 청빈·정결·순명을 원칙으로 가톨릭의 야당 역할을 하는 개혁세력이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 해결을 위한 교회의 책임을 주장하고 전쟁 반대와 종교 간 대화 등을 강조한 성인이었다. 아르헨티나는 군사독재의 폭압 통치 속에 자유와 인권이 제한되는 현실에서 많은 사제들과 민중들이 저항이 있었던 곳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교황의 바탕에는 크게 이 세 가지 키워드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해방신학자의 시선에서 교황을 온건 해방신학자로 평가한다.
"한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방신학과 별 관계가 없는데도 해방신학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의견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교황을 지켜본 일부 몇몇이 주로 이런 의견을 밝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교황은 사실상 해방신학자이면서 일부러 해방신학이란 단어를 피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체로 해방신학을 추종하는 이들이 이런 의견을 내놓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읽는 세 가지 코드, 이른바 예수회, 성 프란치스코, 조국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대입해 내 나름으로 해석하면 나는 교황을 온건 해방신학자로 부르고 싶다. 프란치스코의 중심 주제는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과의 관계다"(본문 중)한국 추기경은 왜 조용할까
저자가 교황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2000년 가톨릭 역사상 3번째 개혁교황이기 때문이다. 1878년 취임해 최초의 개혁교황으로 평가받는 레오 13세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두 번째 개혁교황인 요한 23세는 1958년 선출돼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했다. 이를 통해 현대 사회와의 대화,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일치,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에 대한 관심과 세계 평화를 호소하면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시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개혁을 이뤄낼 수 있는 바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그를 개혁 교황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교황이 추기경 시절 가난과 관련된 문제에 적극 발언했고,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이 국민의 인권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에 맞서왔고,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무능한 정권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대에 호응하듯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과 함께 바티칸 금융감독 기구인 금융정보국 이사 5명을 해임하며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해임된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 기득권 출신들로 교황청 사정에 밝은 자들이었지만 교황은 대신 국제금융 전문가들을 투입했다.
개혁 교황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저자의 시선은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향한다. 교황이 가톨릭 운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발표한 회칙 <복음의 기쁨>을 한국 교회가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나타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복음의 기쁨>을 통해 교황은 '안주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고 외치지만 한국 가톨릭의 모습은 이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안일한 모습을 비판하면서 군사독재시대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김수환 전 추기경을 회상한다. 지금 한국 추기경들의 모습은 김수환 추기경과 비교할 때 무기력하게만 보일 뿐이다. 무려 2명씩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우리나라 추기경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교회 밖 사람들도 현 추기경의 말과 행동이 김수환 전 추기경과 많이 다르다고들 이야기 한다. 생각해 보면 김수환 추기경은 지금의 한국 추기경들보다 교리해석에 유연했고, 세상의 불의를 보고 피하지 않았으며 좀 더 겸손했다. 만일 비교 기준을 베르골리오 추기경에 둔다면 그 차이는 더 클 것이다. 대통령과의 갈등을 마다하지 않으며,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성직자를 축복하고 주요 언론에 대한 질타를 서슴지 않는 추기경을 우리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신앙과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것이다."(본문 중)비판 속에 담겨진 가톨릭에 대한 자부심
<교황과 나>가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교회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과 관련한 다양한 일화와 가톨릭의 역사, 교황 선출 과정의 뒷이야기, 옛 교황들에 대한 에피소드 등을 상세히 담고 있어서다.
아울러 가톨릭의 끊임없는 쇄신을 주장하면서도 가톨릭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2천년 동안 266명의 교황이 명멸했고, 전 세계에서 종교단체로는 유일하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가톨릭의 비결을 끊임없는 자기혁신이라고 해석한다. 느슨하거나 혼탁해지려는 순간 어김없이 혁신운동이 일어난 덕분에 지금의 가톨릭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교황 프란치스코를 있게 한 베네딕토 16세의 퇴임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러한 자기 혁신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해방신학을 탄압했던 베네딕토 16세에게 많은 감정이 있었지만 그의 퇴임 발표의 의미를 확인하며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없으면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의 말처럼 베네딕토 16세의 사임은 "권위와 기득권을 가지고 봉사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치 지금의 한국 추기경들에게 강조하려는 대목으로도 읽힌다.
<교황과 나>는 이를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회를 향한 질문을 던진다. 교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반성과 쇄신이 필요하다는 예언자적 외침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가 교황의 성품이나 신심은 선전하면서도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외면하려는 것에 대한 염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시국미사를 방해하는 일부 세력을 따끔하게 혼냈다는 주교를 보았는가. 제주 강정마을에서 경찰에 의해 성체가 훼손되는 사건에 대해 어떤 주교가 정권에 항의하던가.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한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이지만 미사가 방해를 받고 성체가 모독당하는 사건에 주교들은 애써 눈을 감는다. 주교가 본래 해야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인가. 주교회의에서 그런 일이 논의 주제로 오르기는 하는가. 지금 이 나라 천주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 시대에 살고 있는 게 맞는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본문 중) 덧붙이는 글 | <교황과 나>(김근수 (지은이) / 메디치미디어 / 2014-07-25 / 14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