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2월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께 공개편지를 드렸던 신자입니다. 7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염 추기경님께 다시 공개편지를 드리게 됐습니다. 일개 평신도인 제가 한국 교회 최고위 성직자이신 추기경님께 공개편지를 드리는 무례를 관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무람없는 짓인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이 크고, 추기경님께 이런 글까지 드려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합니다.
추기경님께 드리는 공개 편지우선 저는 추기경님께 지난해 11월 29일의 일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은 성 안드레아 축일로서 염 추기경님의 영명축일이었습니다. 그날 추기경님은 명동성당에서 영명축일 축하 미사를 주례하시면서 의미 있는 강론도 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신자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복음의 기쁨> 일부 내용을 소개하시면서 사제들을 향해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용감하게 변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님은 '성전 안에만 안주하는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물질주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 교회와 사제들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 소외 받은 이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평소의 태도와 180도 다른 추기경님의 이런 말씀에 많은 이들이 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추기경 서임을 염두에 두고 기회주의적 선택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말들을 귀 담아 들으면서도 저는 추기경님을 믿고 싶었습니다.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길 바랐습니다. 추기경님 자신의 '쇄신과 갱신'을 뜨겁게 소망했습니다. 또 서울대교구 사제들 사이에선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가졌습니다.
충남 태안에 사는 저는 환갑에 들어선 2008년부터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자주 먼 나들이를 감행하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태안 앞바다 원유 유출 당시 '기름과의 전쟁'에 몰두한 나머지 병을 얻어 두 달 동안 병상생활을 했습니다. 퇴원한 다음엔 4대강 파괴 사업 중단을 위해 문규현, 전종훈 신부님과 수경 스님이 2년 동안 실행한 '오체투지 기도'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 다음 해부턴 용산 참사 현장에서 매일 거행된 용산 미사, 4대강 파괴사업 중단을 위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거리 미사,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함께 하는 대한문 미사에도 거의 매주 참례해 왔습니다. 2013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거행된 제18대 대선 불법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국미사에도 참례했고, 지금은 세월호 유족들과 연대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대교구 관할 지역 한복판에서 거행된 용산 미사, 여의도 미사, 대한문 미사에 참례하면서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미미한 참여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근 교구인 인천교구, 수원교구, 의정부교구는 물론이고 먼 교구에서도 다수의 사제가 참여하는데, 700명이 넘는 서울대교구 사제들 중 서울대교구 한복판의 거리 미사에 참여하는 사제들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의 부친 되시는 분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도 나처럼 거리 미사에 적극 참여하고 싶고, 아들 신부도 그러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서 그러지 못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분께 물었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눈치 볼 일이 뭐가 있습니까? 천주교 신부는 일생을 하느님께 바친 몸 아닙니까? 사제들의 로만 칼라는 독신 정결을 상징하고, 검은 수단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들었습니다. 가정도 없고 육신도 버린 사제들이 뭐가 아쉽고, 무슨 욕심이 있기에 주변의 눈치를 보고 삽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천주교 사제들이 뭐가 두려워 주변의 눈치를 봐야 합니까. 그 눈치 때문에 거리 미사에도 마음대로 참례하지 못한다면, 그건 '죽은 교회'의 표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부자들만의 교회인가?', '서울대교구는 진정으로 복음 정신이 살아 있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인가?'라는 의문에 계속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님이 작년 11월 29일 명동성당에서 행한 강론 내용을 들으면서 서울대교구의 쇄신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교구장님의 말씀은 서울대교구 전체 사제들에게 변화의 기운을 주고, 그 기운은 다수의 사제가 거리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한하시는 동안 교황님과 염수정 추기경님의 모습을 보면서 근심 한 가지 가져야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세월호 유족들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교종의 방한은 한국 집권 세력에게 패착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집권세력이 그것을 절감하고 한국 사회의 '교황 효과'를 차단, 또는 감소할 목적으로 추기경님과 더욱 밀착을 시도하고 최대한 활용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지요.
그것은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청와대서 대통령과 점심을 드시고 오신 염수정 추기경님은 지난 26일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가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방한 직후인 데다 교종과는 너무도 다른 각도의 말이라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면 안 된다.""정의를 이루는 건 하느님이 하시는 일.""예수님도 난처한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정치적 얘기는 안 하셨다.""가족들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어느 선에서는 양보해야 서로 뜻이 합쳐진다."
염 추기경님의 이런 견해에 다양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반론들 가운데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는 너무 대조된 염 추기경님의 본질과 성향, 한계에 대한 연민과 우려도 있었습니다. 반쪽 진리를 전체화하는 추기경님의 오류를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글도 나왔고, 염 추기경님은 중립을 지킨 것이 아니라 중립을 표방하는 척하면서 가해자 쪽을 두둔하고 엄했다는 것을 입증하며 공박하는 글도 나왔습니다.
저 역시 염 추기경님에게서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진 사람을 피해 가는 레위인과 사제의 모습'을 봤습니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구조하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굴절된 시각, 어떤 한계 안에 갇힌 말씀들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전해 들으신다면 많이 섭섭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염 추기경님의 여러 가지 말씀 중에서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특히 주목합니다.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인지, 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적시가 없어서 모호한 말로 들렸습니다.
하지만 염 추기경님께서 추기경 서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바티칸에 가셨던 지난 2월 바티칸 교황청이 발행하는 일간지 <로세르바또레 로마노>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을 가리켜 "비이성적이다"라고 한 말과 연관해 보면 이번에도 정의구현사제단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염수정 추기경, 언행일치와 솔선수범 보여야 할 때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씀입니다. '연대'하라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이 있기 전부터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유족들과 뜨겁게 연대하고 있습니다. 무덥고 딱딱한 광화문 앞 돌 바닥 위에 앉아 비지땀을 흘리며 단식기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향한 거짓과 불의에 맞서며 진실과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온몸으로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구현하고 확장하기 위해 사제단은 유족들의 아픔을 다른 의미로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연대와 공유는 얼마든지 상호 이용 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이쯤에서 사제단과 연대해 광화문 미사에 적극 참여하는 신자로서(또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공동대표로서) 염 추기경님께 광화문 미사에 한 번 오시도록 초대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광화문이 아니더라도 거리 미사의 주례를 한 번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광화문 미사를 거행하는 임시 제대에는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미사 지향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월호의 슬픔과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단 채 방한 일정을 마치시고 바티칸으로 돌아가시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전세기 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이 말은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 표지가 되었습니다. 광화문 미사에 참례하는 모든 사제와 수도자와 신자들은 오늘도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 그리스도인으로서 과연 얼마나 질적으로 기여했는가?"라고 물으시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깁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라고 하신 교종의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갈구합니다.
저는 크고 화려한 성전 안에 편안히 앉아 미사를 지낼 때보다 바람 부는 길거리에 서서 미사를 지낼 때 더욱 하느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엄동설한 어두운 밤에 두 손 호호 불어가며 미사를 지낸 적도 있고, 폭우 속에서 우산을 쓰고 미사를 지낸 적도 있습니다. 그 은총의 세계로 추기경님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처럼 낮은 데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로 오셔서 자신을 낮추면서 거리 미사 한 번 주례해 보시기를 충심으로 청원 드립니다.
끝으로, 추기경님께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을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지난해 11월 29일 명동성당에서 봉헌하신 안드레아 영명 축일 축하 미사 때의 그 강론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바로 그 확실한 모습일 것입니다.
염수정 추기경님, 거리미사로 나오세요추기경님은 사제들에게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용감하게 변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 소외받은 이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 밖의 불쌍하고 힘없는 이웃을 위해 행동하고 보살펴야 하며, 사랑과 나눔을 구호나 이론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염수정 추기경님 자신의 말씀이기도 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말씀만 하시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말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언행일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이며, 성직자에게는 솔선수범이 무엇보다 필요한 일입니다. 염수정 추기경님, 다시 한 번 언행일치와 솔선수범을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진정한 중립을 지키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