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초상집이나 대사집 가듯 고속도로로 서둘러 가면 몰라도, 이 고을 저 고을 길섶 이슬에 발이라도 적시려면 거창은 장수에서는 육십령고개를, 무주에서는 구천동과 빼재를 넘어 들어가야 한다.

이 담은 보존가치가 커서 제일 먼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오래된 이 담은 이 마을을 지탱해온 원동력이다
▲ 단계마을 흙돌담 이 담은 보존가치가 커서 제일 먼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오래된 이 담은 이 마을을 지탱해온 원동력이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육십령고개는 장정 육십 명이 함께 넘어야 한다 하여 붙여졌다 하고 빼재는 경치가 빼어나 빼재(秀嶺)라 했다는 말도 있다. 백제와 신라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뼈를 묻은 고개, 뼈재를 경상도말로 빼재라 했다는 말도 전한다. 그만큼 거창은 북에서 가려면 애를 먹는 곳이다.

단계마을 가는 길

거창에서 산청이나 진주로 가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남쪽으로는 비교적 훤하게 트인 길이다. 거창 황산마을까지 왔으니 내친김에 산청 단계마을과 남사마을을 둘러보기로 마음먹고 지금 산청으로 가고 있다.

산청은 지리산 동남쪽에 있다. 지리산 서쪽에 섬진강이 있다면 동쪽에는 경호강이 있다. 섬진강 못지않은 물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 인물이 없을 리 없다. 안동에 퇴계이황이 있다면 산청에는 남명조식이 있다. 동갑내기로 학식 면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다만 벼슬을 거부한 진정한 처사(處士)로 명성이 덜할 뿐이었다. 

이런 산청이니 오래된 마을이 없다면 이상할 일. 신등면(新等面)에 단계마을이, 단성면(丹城面)에 남사마을이 있다. 먼저 찾은 곳은 단계마을이다. 거창에서 가려면 경호강 옆을 타고 간다. 여기서는 경호강이라 부르지만 진주에 가면 남강이라 부르고 진주를 떠나면 낙동강이라 부른다. 경호강이나 남강이나 한 배에서 태어난 같은 물이다. 

언제 손댈지 모르지만 모래톱이 아직 건재하다. 이물은 진주에 가면 진주남강이 되고 진주를 떠나면 낙동강이 된다
▲ 경호강 정경 언제 손댈지 모르지만 모래톱이 아직 건재하다. 이물은 진주에 가면 진주남강이 되고 진주를 떠나면 낙동강이 된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내 생각은 물 따라 흘러 어느덧 진주남강빨래터에 닿았다. 80년대 막걸리 한 잔 먹고 목청 좋은 친구가 구슬피 선창하면 누구나 따라 불러 술기운을 돋우던 '진주난봉가'가 입가에 맴돌았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가사는 뒤죽박죽, 한 곡 목 놓아 부르고 나니 어느덧  정곡삼거리, 여기서 강 길을 버리고 동쪽 산길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정수산과 둔철산, 두 산이 힘 겨루다 만든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다. 제 멋대로 생긴 다랑논은 길 양옆 산등성타고 하염없이 기어 올라가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주름마냥 주름 잡혀 산등성타고 올라가고 있다
▲ 단계마을 가는 길가에 있는 다랑논 마을사람들의 주름마냥 주름 잡혀 산등성타고 올라가고 있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산골마을사람들에게 주름진 다랑논은 노동으로 일군 거친 삶의 소산이다. 사람 주름살이 깊어지면 다랑논 주름도 늘어난다. 다랑논은 논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무슨 유산이라 되는 것처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쓰다듬고 싶어지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며 산길 따라 가다보니 어느덧 단계마을.

단계(丹溪)는 신라 때 적촌(赤村), 단읍(丹邑)이었다가 고려 때 단계현으로 고쳤다. 조선말 문인 김인섭의 호, 단계(端溪)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거꾸로 단계(端溪)가 단계(丹溪)마을에서 호를 따온 것으로 봐야한다. 단계 김인섭을 귀히 여기는 마을사람들의 소박한 정으로 받아들이면 무난한 것으로 보인다.

곰삭은 기와집들은 이 마을이 보통마을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옛 담과 기와집, 솟을대문 때문에 지나가다 이 마을을 들여다보게 된다
▲ 단계마을 기와집들 곰삭은 기와집들은 이 마을이 보통마을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옛 담과 기와집, 솟을대문 때문에 지나가다 이 마을을 들여다보게 된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마을 앞에 단계천이 흐르고 서쪽에 둔철산, 북서에 정수산, 북쪽에 황매산과 가까이 부암산이 에워싸고 남쪽으로만 터져 단성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마을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산이나 강을 보려면 마을학교 교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단계초등학교 교가는 '황매산 높은 기상 정기를 받아...'로 시작한다. 황매산이 단연 마을사람들이 제일 중히 여기는 산임에 틀림없다.

전통을 이으려는 마을사람들의 정성들

마을은 단계천을 향해 볼록하여 커다란 배(船)처럼 보인다. 배가 물에 잠기는 선(線)인 흘수선(waterline)마냥 남북으로 길게 마을길이 나 있다. 길 양 옆으로 방앗간과 양조장, 신등파출소, 정다방, 녹지다방, 시골짜장 단계반점, 옛날짜장 중앙식당, 금은방, 슈퍼마켓 등 가게와 관공서, 음식점 등 없는 거 빼고 있을 건 다 있는 소읍(小邑)인데 이 건물들 모습이 묘하다.

거의 모든 마을건물이 개량기와지붕을 이고 있는데 그 모양이 어울리지 않는 가발을 쓴 것처럼 보인다
▲ 단계마을 정경 거의 모든 마을건물이 개량기와지붕을 이고 있는데 그 모양이 어울리지 않는 가발을 쓴 것처럼 보인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하나같이 개량기와 지붕을 이고 있는데 어딘지 어리숙하다. 억지로 보기 좋게 꾸미지도 않았다. 기와지붕을 얹어놓은 모양이 티가 확 나는 가발을 쓴 것 같다. 그나마 관공서는 잘 꾸며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파출소는 미륵을 모시는 미륵전처럼 중층 집으로 꾸며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모두 전통을 있겠다는 마을사람들의 정성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리숙한 다른 건물과 달리 폼이 난다
▲ 신등파출소 어리숙한 다른 건물과 달리 폼이 난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단계는 신라 적부터 있었던 오래된 마을로, 각성바지들이 모여 사는 산성촌(散姓村)과는 다르다. 안동권씨와 순천박씨, 두 집안이 이 마을에 터 잡은 후 자손이 번성하여 어엿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마을은 가회와 단성을 잇는 큰길이 나면서 남과 북으로 두 동강났다. 그나마 다행이다. 남과 북이 각각 두 집안의 고가(古家)를 나누어 갖고 있다. 큰 길 북쪽에 안동권씨고가가 있고 남쪽 마을한가운데에 순천박씨고가가 있다. 모두 양쪽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그 중에 박씨고가로 들어가는 길이 오래된 담 길로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늙은 호박만한 호박돌을 담 밑동에 건성건성 두세 단 쌓고 그 위에 흙을 치대 흙돌담을 쌓았다. 지리산 영향으로 다른 고을보다 비가 많다보니 돌로 밑동을 쌓아 물이 잘 빠지게 한 것이다.
   
단계의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단계를 단계답게 하는 담이다. 단계박씨고가로 이 담이 안내한다
▲ 단계마을 흙돌담 단계의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단계를 단계답게 하는 담이다. 단계박씨고가로 이 담이 안내한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박씨고가 가는 길은 외길, 담이 길을 안내한다. 고가는 잡초가 무성한 거의 폐가수준. 근처에서 담을 쌓고 있는 분은 손을 분주히 움직이고 있고 이 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호박돌은 찬바람 부는 가을철, 집에 따다 모아놓은 늙은 호박처럼 보인다. 다행히 둥글고 몽실몽실 살이 올라 채석장에서 끌려온 상처 난 돌은 아닌 듯 보인다.  

채석장에서 끌려온 상처 입은 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 늙은 호박 같은 호박돌 채석장에서 끌려온 상처 입은 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닫힌 문과 열린 문

이 마을에는 유독 문이 닫힌 솟을대문집들이 많다. 단계권씨고가처럼 큰길가에 있어 닫아놓는 경우도 있지만 무슨 이유든, 살림을 하지 않는 별장처럼 보여 눈에 거슬린다. 닫힌 대문은 담보다 못하다. 담은 경계의 표시일 뿐 소통이 단절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닫힌 대문은 바깥과 단절을 하겠다는 메시지다. 문이 닫히면 그것은 바로 벽이 된다.  

이런 벽 같은 대문과 아주 대조적인 문이 있다. 활짝 열린 단계초등학교 교문이다. 예전에 고을마다 있던 향교의 문처럼 솟을삼문이다. 교문이름 한번 기막히다. 삭비문(數飛門). 삭비는 여러 번 난다는 뜻. 새는 태어나서 곧바로 날지 못하고 어미 새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 날갯짓한 끝에 날게 되는데, 이를 삭비라 하고 새처럼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닫힌 대문은 바깥과 단절을 하겠다는 메시지다. 문이 닫히면 그것은 바로 벽이 된다
▲ 닫힌 솟을대문 집 닫힌 대문은 바깥과 단절을 하겠다는 메시지다. 문이 닫히면 그것은 바로 벽이 된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교문이름이 걸작이다. 삭비문이라 읽는다. 여러 번 난다는 뜻, 습(習)과 통한다
▲ 단계초등학교 교문 교문이름이 걸작이다. 삭비문이라 읽는다. 여러 번 난다는 뜻, 습(習)과 통한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지금은 이성이 없는 동물의 세계에서나 있을법한 삭비, 진짜 새끼 새를 가르치는 것처럼 무한경쟁과 양육강식을 강요한다. 사람은 새와 다르다. 이성을 갖고 꿈을 향해 날갯짓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정글이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떤 삭비를 가르칠 것인가? 이성이 지배하고 경쟁 아닌 상생의 세계, 사람 사는 세상, 행복한 세상을 꿈꾸도록 우리는 이들을 보듬고 가르칠 의무가 있다. 전교생 50명, 단계초등학교 학생만이라도 경쟁 아닌 상생의 날갯짓을 했으면 한다.


태그:#단계마을, #삭비문, #남강, #경호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