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만나도 느릿느릿한 말투와 걸음걸이에 한 번도 줄선 바지나 반짝이게 닦은 구두 차림을 본 적이 없는 털털한 모습이었지. 빗질 한 적이 없는 듯한 머릿결이며 주름투성이 얼굴 표정. 길모퉁이 어디선가 매일 마주쳤을 동네 아저씨의 얼굴.
마음 속으로는 무슨 궁량을 펼치든지 겉으로는 푸근하고 낙천적인 이룰태림(고 성유보 선생의 호... 편집자) 자네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홀연히 가시다니, 망연자실 낙담은 이런 것이구나 알게 하시네.
자네와 나는 지난 54년, 거의 한 평생을 어울려 산 셈이었지. 다른 친구들도 많지만 지금 내 마음은 외톨이가 된 느낌이네. 우리가 친구 된 게 올해로 54년째 아닌가. 짧지 않은 세월이었지.
서울대에서 동아일보, 그리고 민통련까지4월 민주혁명의 여진이 아직 뜨겁던 1961년. 우리가 입학한 서울대 정치학과는 펄펄 끓고 있었지 않았던가. 4·19 아름다운 황혼에 흠뻑 취했지. 자네는 이미 1960년 2·28 대구 경북고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 4월 혁명의 전령사 노릇을 하지 않았던가. 4월 혁명의 메카로 자부하던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가 보니 동기생 42명 중에 자네와 나 같은 햇내기들은 재수, 3수, 4수생 형들 앞에서 기를 펼 수가 없었지.
이렇게 청년기, 그것도 시대의 고뇌와 문제의식이 용광로처럼 들끓는 현장에서 삶의 중요한 순간을 시작해야 했네. 아직 여물지 못했던 우리 영혼은 새로운 생각과 충격을 소화 흡수하기에도 벅찼지. 선배 동료들의 권유대로 시위의 대열에 나서기도 했지. 언제나 여유작작했던 자네 처신은 그제나 이제나 같았지. 입학할 때 이름은 철수, 학교 다닐 때는 내진으로 바뀌었지.
졸업과 군 제대 이후 자네와 나는 직장에서 다시 만났네. <동아일보> 기자로서 말이네. 한국의 언론을 대표한다고 기대를 모았던 <동아>에는 우리 말고도 대학 동기생 권근술과 강황석도 함께 있었지.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앞둔 68년의 기자 초년 시절은 언론을 휘어잡아야 했던 권력과 언론의 샅바싸움이 치열하던 때였네. 우리의 운명을 뒤틀어 놓은 1972년의 유신체제는 오늘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며칠 뒤면 40주년을 맞을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맞았고 결국 우리들은 134명의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1975년 동아에서 쫓겨나 거리의 언론인이 되었네. 자네와 나는 학내 서클에서부터 시작해서 동아에 들어와서도 붙어다녔으니 모진 인생을 예약해 놓았던 게 아닐까.
대학 입학과 동아 입사 동기, 그리고 해직과 감옥행도 동기가 되고 말았지. 한 가지는 내가 선배가 된 적이 있었네. 1986~87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내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사무처장으로 일하다가 투옥됐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피하거나 투옥되자 자네 혼자서 사무처장으로서 민통련을 지켜내고 거대한 6월 민주항쟁의 불씨를 살려내지 않았던가. 앞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초대 사무국장으로 <말>지의 창간을 주도해 자유언론의 맥을 이어온 일도 자네 몫이었네.
당시 터져나오던 '독재타도' '직선개헌'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로 엮어낸 자네를 비롯한 당시 운동지도부의 노력과 지략은 평가 받게 될 것이네. 6월 민주항쟁은 완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4월 민주혁명과 함께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민주시민 쪽이 승리를 거둔 사례로 기록되었네.
그렇게 거둔 민주주의 승리 위에서 자네는 민주-자유-독립언론의 건설에 나섰네. <한겨레> 신문이 창간됐을 때의 감동을 난 지금도 간직하네. 물론 나야 그 흥분에 직접 함께 하지 못했지만 초대 편집위원장으로 창간호를 받아든 자네의 기쁨과 보람은 어떠 했겠는가. 다른 것들이 우리를 배반해도 국민들이 기금을 모아 만들어준 <한겨레>는 두고두고 국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네.
이룰태림 자네는 백마 타고 온 초인이 되었네
<한겨레>를 은퇴한 자네는 자연 발걸음이 넓어져갔지. 방송 일로, 언론개혁운동으로. 결국에는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희망래일운동으로 이어졌지. 이제는 민주시민의 흩어진 대오를 함께 모으는 작업에 깊이 몸과 마음을 쏟아 넣다가 먼저 가셨네.
1976년 초 어느 추운 날, 자네와 정정봉형과 셋이서 받은 '청우회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위반사건' 결심공판을 기억하네. 그때 자네의 최후진술이 지금도 내 가슴을 울리네.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광야'였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자네가 그처럼 그리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일세. 이룰태림, 이제 자네가 그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었네. 며칠 전 "내년 해방 70주년에는 광화문 일대에 난장판 축제를 벌이고 한 일 주일 해방의 거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던 희망을 후배들이 준비하겠지. 믿어 주시게.
우리의 청춘, 우리의 꿈, 우리의 투쟁, 우리의 못 다한 이야기는 우리보다 나은 후배들이 이어받아 이루어낼 걸세. 고단한 삶의 짐 내려놓으시고 편히 가시게. 나도 곧 따라가겠네. 잘 가시게, 나의 동지여!
2914년 10월 9일
친구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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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성유보 선생 약력 |
1943년 출생 1965년 서울대 정외과 졸업 1967년 동아일보 편집국기자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1975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1988년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위원장 1990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1993년 사회평론사 대표이사 1998년 (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2000년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대표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공동대표 2003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남북방송교류 추진위원장)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선거방송심의위원 2013년 희망래일 이사장 2014년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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