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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북구 화명촛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명이든 열명이든 매주 목요일 7시에서 9시까지 현재진행형입니다.
 세월호 북구 화명촛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명이든 열명이든 매주 목요일 7시에서 9시까지 현재진행형입니다.
ⓒ 송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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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마지막 날 오전 8시 부산 북구 화명동 롯데마트앞에 8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북구화명촛불(이하 화명촛불)이란 이름으로 함께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전에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실종자의 무사귀환 기적을 기원하며 북구화명촛불이 밝혀졌다. 그날이 4월 18일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충격은 견디기 힘들었다. 기간제 교사를 했던 경험과 잠수사로 일했던 경험, 그리고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세월호 참사에서 오는 슬픔은 남달랐다.

그 후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화명촛불에서 초 하나를 드는 것이었다.  참사 59일째 500여명이 모여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문화제>이후 화명목요촛불로 전환되었다.(50일간 매일 들었던 촛불을 매주 목요일로 변경함) 

30~40여 명이 모여 들던 촛불은 이제 10여개 남았다. 참사 200일을 앞두고 세월호 유가족과의 만남에서 홍영미(고 이재욱군 단원고2학년의 어머니)씨와 안산분향소에 방문할 것을 약속하였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전달할 손편지(350여통의 엽서)을 들고 세월호 안산 합동분향소에 갔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전달할 손편지(350여통의 엽서)을 들고 세월호 안산 합동분향소에 갔다.
ⓒ 송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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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 교사인 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00, 작은 카페을 운영하는 구00, 새벽에 학교급식차량을 운전하는 이00, 꽃배달 사장님 김00, 여행사를 운영하는 이00, 데모당에서 노는 사람 윤00, 세월호 손편지의 주인공인 황기철선생님이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사229일째인 11월30일 오전 8시10분에 안산으로 출발하였다. 4시간 30분 정도 거리라고 예상했지만 빗길에 처음가는 길이라 점심도 먹지 못하고 오후1시가 넘어서야 안산 분향소에 도착하였다.

분향소 안의 시간은 순식간에 4월16일로 가 있었다. 근조리본을 달고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천천히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보며 이동하였다. 향을 피우고 국화를 헌화하고 다 같이 묵념을 하였다.

유가족 대기실에서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350여통의 손편지를 전달하자 환하게 웃으며 돌려가며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이런거 하면 곤란하지 않으냐며 걱정해 주었다.
 유가족 대기실에서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350여통의 손편지를 전달하자 환하게 웃으며 돌려가며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이런거 하면 곤란하지 않으냐며 걱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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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의 안내로 유가족 대기실에 들어갔다. '17개의 이빨이 빠지고 지금은 앞니만 남았다'는 7반 대표 아버님과 6반 대표 어머니와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공방에는 어머니들이 모여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뜨드뜨뜨뜨" 미싱소리 요란했다. 이야기공방앞에는 유가족들이 모여 복원된 세월호 CCTV에 자기아이가 찾을 때 마다 "여기 있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유가족 대기실 '이야기 공방'앞에 설치된 TV에서 세월호 복원 CCTV에서 유가족과 함께 4월15일 저녁 8시쯤의 영상을 보고 있다. 중앙 오른쪽 사진은 공방에서 만든 리본을 엄마들이 직접 달아주었다. 아래사진은 유가족과 간담회 모습이다.
 유가족 대기실 '이야기 공방'앞에 설치된 TV에서 세월호 복원 CCTV에서 유가족과 함께 4월15일 저녁 8시쯤의 영상을 보고 있다. 중앙 오른쪽 사진은 공방에서 만든 리본을 엄마들이 직접 달아주었다. 아래사진은 유가족과 간담회 모습이다.
ⓒ 송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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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반 대표 아버님의 말씀중 일부이다.

"우리가 주관했던 특별법과 지금의 여야합의 특별법은 천지차이입니다. 유가족 간담회는 서울대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어디든 부르면 갑니다. 제주도도 가고 다 갑니다.

4월 16일 팽목항이고 광화문이고 유가족의 요구나 유가족의 목소리가 제대로 방송되고 보도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인터넷에서 조금 나오지.... 제 잘 아는 후배도 잘 몰라요. 그래서 엄마 아빠들이 직접 전국을 돌며 간담회며 집회현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할 것 아닙니까! 저는 정치나 역사나 이런거 잘 모르는데, 공권력 아니 지금은 군권력이 세월호에 대해 감추려고 하는게 너무 많더라고요.

한데서 자고 오늘로 229일째(인데) 제대로 못자고 못 먹어서 그런지 이가 휘었어요. 이빨을 하나 빼고 두 개 빼고 하다 보니까 이빨을 17개를 뽑혔어요. 지금 앞니밖에 없어요. 바다가 출렁출렁하고 배(세월호) 꽁무니를 보고 있을 때 배타고 가서 보고 있을 때...... 전 처음에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전원구조라는 말만 믿고 팽목항에 갔었어요. 도착해서 유가족들이 막 우겨서 123정호 타고 사고 현장에 갔었거든요. 저는 다음날 오전에 현장에 갔었고, TV보면 구조한다고 조명탄 쏘고 구조한다고 나오고 있고 낮에도 구조한다고 하고 생방송 되고 있었어요. 가서 보니까 고무보트 한척에 잠수부 2명 태우고 사고난 지점을 빙빙 돌기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구조한다고 처음부터 숨기고 거짓말했었어요. 얼마나 황당해요. 1시간 30거리에 조명탄 쏘고 있으니까 구조하고 있는줄 알고 있었죠. 그 후 부모들이 배 빌러 가려고 해도 통제했거든요. 우리한테는 72시간 에어포켓, 골든타임 이야기하며 말만 툭 던져놓고 구조하지 않고 눈가리고 아웅한 거죠. 제가 17일날 사고난 지점 갔을 때 딱 드는 생각이 이제는 아이 찾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22일날 우리애 나왔고113번이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을 40%~50%라도 국민들이 알았으면 해요. 그래야 다음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천주교 사제가 꿈이었던 성호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당입니다. 성호뿐만 아니라 단원고 희생자를 위한 성당이기도 합니다.
 천주교 사제가 꿈이었던 성호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당입니다. 성호뿐만 아니라 단원고 희생자를 위한 성당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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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명촛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늦은 점심(3시 30쯤)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당에서 젖은 눈으로 나왔던 여행사를 운영하는 이00 대표는 대학생 딸이 있다.

"젖은 눈으로 겨우 한 컷, 슬퍼도 아파도 힘 들어도 이것만은 담으려.... 유럽에서 젤 작은 성당은 로마 트레비분수앞의 성당, 그리고 더 작은 포루투칼 식민지였던 마카오의 성당, 세상에서 제일 작은 성당은 성호의 성당(분향소 밖에는 사제가 꿈이었던 성호의 성당이 지어져 있다). 성호의 그 작은 성당이 메모리얼 파크의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짓다 만 세채 중 하나이던 성호의 성당에 바티칸 성물 가게에서 부산태생 수녀님께서 성호 긋고 손에 쥐어주신 붉은 묵주를 올렸다. 초록의 향과 함께....... '잊지않는다'함은 '기억한다'함이요"

데모당에서 노는 사람이라는 윤00는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가 달아준 리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수십번 수백번 망설이다 갔다. 직접받은 리본은 내가 지은 죄만큼의 무게가 느껴진다. 바늘 끝이 심장을 뚫는 듯 하다.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엉키며....... 피 흘리지 않고 이룰수 있는 것이 결코 한가지도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앗찔한 정신줄 다시 부여잡고 앙 다물었다."

점심식사후 단원고에 가기전에 경기도미술관을 들렀다. <잠들지 않는 꿈>이라는 제목으로 김시연, 박예슬, 박지윤, 빈하용, 이장환, 임세희 학생들이 남긴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경기도 미술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단원고 학생의 작품
 경기도 미술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단원고 학생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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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꿈
 잠들지 않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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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미술관에 1층에 전시된 <잠들지 않는 꿈>을 보고 있던 중 유가족과 다시 만날수 있었다. 이날 30일 세월호 유가족 임원 회의가 있었고 가족총회가 있다고 하였다. 단원고 2학년 교실이 치워진다는 보도에 대해 "엄마 아빠들은 2학년 교실이 남겨두기를 바라고 있고 총회에서 뜻을 모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정이 계속 늦추어 졌다. 해가 지고 난후에야 우리 일행은 단원고에 도착하였다. 분향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길을 잘못들고 퇴근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혔다.

단원고에 5시가 넘어 도착하였다. 해는 지고 어두운 학교건물의 2층과 3층의 교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경비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엄마 아빠들이 매일 2학년 교실을 청소한다고 한다. 2학년 교실은 24시간 불을 켜 놓고 있다고 하였다.
 단원고에 5시가 넘어 도착하였다. 해는 지고 어두운 학교건물의 2층과 3층의 교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경비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엄마 아빠들이 매일 2학년 교실을 청소한다고 한다. 2학년 교실은 24시간 불을 켜 놓고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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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배달 사장인 김00님은 단원고의 2학년 교실을 둘러보고 아래의 시를 보여주었다.

"단원고 2학년 어느 교실에 붙어 있던 메모시 한편입니다. <동행> 이수행
타는 가슴이야/내가 알아서 할 테니/길 가는 동안/내가 지치지 않게/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단원고 2학년 교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세월호 참사이후 새로 부임한 교감선생님을 만났다. 교감선생님은 2학년교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어떻게 결정할수 있는 것은 아니고 유가족들의 뜻에 따를 생각입니다. 개인적 생각은 유가족이 원하는 시간만큼은 2학년 교실은 지금 그대로 보존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 국민들이 찾아올수 있도록 개방해 놓을 겁니다. 주중에는 아이들 수업이 있으니까. 토요일 오전부터 일요일 밤까지는 언제든지 오시면 됩니다. 연락주고 오시면 더 좋고요. 2학년 학생들은 8반으로 해서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반에 10정도 되는데, 작은 인원이니까. 선생님과 한 번이라도 더 눈 마주치고 하니까 모아서 합반하는 것 보다 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라고 생각합니다. 사고나고 저 포함 13명 선생님이 바로 이곳에 왔습니다."

나는 단원고에서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2학년 교실을 둘러보았다.

▲ 단원고 2학년 교실 떠나기 전 2학년 교실에 한번더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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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날 11시간을 운전을 했다. 세월호의 선원들이 숨기는 것은 무엇인지. 세월호 참사에 희생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해경이 어떻게 대처하고 구조활동을 했는지? 유가족들의 요구가 어떻게 묵살되었는지, 잠수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다이빙벨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지, 정부는 어떤 잘못을 했고 숨기고 있는지 밝혀지기를 기도하며 11시간의 운전을 끝내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세월호 참사는 다른이의 아픔에 귀 기울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감사합니다. 4월16일을 기억하고 잊지 않겠습니다.



태그:#북구화명촛불, #화명촛불, #안산 분향소, #단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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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지, 헌옷, 고물 수거 중 하루하루 살아남기. 콜포비아(전화공포증)이 있음. 자비로 2018년 9월「시(詩)가 있는 교실 시(時)가 없는 학교」 출간했음, 2018년 1학기동안 물리기간제교사와 학생들의 소소한 이야기임, 책은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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