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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2월 23일 국무회의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헌법 파괴와 우리 사회를 혼돈에 빠뜨리는 행위를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헌법수호 의지를 담은 역사적 결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를 대리해 정당해산 심판을 이끈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신년사를 통해 "위헌정당 해산을 통해 헌법가치 부정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비롯한 수구보수세력들이 신앙으로 삼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고 외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은 헌법재판소가 작성한 진보당 해산 결정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가 보편적 가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선고가 열린 19일 오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판결문을 읽고 있다. 참석 재판관들은 판결문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서기석, 안창호, 이진성 재판관, 이정미 주심, 박한철 소장, 김이수, 김창종, 강일원, 조용호 재판관.
재판관 9인중 8인(김이수 재판관만 기각 판결)의 인용의견으로 통합진보당은 해산 결정됐다. 국회의원 5인도 의원직을 상실한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선고가 열린 19일 오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판결문을 읽고 있다. 참석 재판관들은 판결문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서기석, 안창호, 이진성 재판관, 이정미 주심, 박한철 소장, 김이수, 김창종, 강일원, 조용호 재판관. 재판관 9인중 8인(김이수 재판관만 기각 판결)의 인용의견으로 통합진보당은 해산 결정됐다. 국회의원 5인도 의원직을 상실한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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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이번 결정문에서 50여 차례 이상 등장한다.

헌재는 결정문 141페이지에서 "해방 이후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더불어 채택한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는 보편적 가치로서 산업화, 민주화의 밑바탕이 되어 오늘날의 자유와 국가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헌법은 그 동안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의 허울 아래 사실상 1당독재와 1인독재로 운영된 북한의 도전으로부터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스스로의 생존을 지켜왔다. 그것은 곧 우리 국민의 의지"라고 밝혔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가 인류 보편적 가치이고 우리 헌법이 공산주의와의 대결 지점에 서 있다는 주장은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역사관이다.

교학사에서 출간한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권희영 한국학대학원장은 지난 2011년 10월29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자유민주주의 기반 위에 건립된 대한민국'이란 글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떠나서는 서술될 수가 없다. 동시에 남북관계를 떠나서도 서술될 수 없다. 하나였던 한반도의 북부에 불법적으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고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침략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희영 한국학대학원장은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2011년 한국현대사학회는 기존의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지적하며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정운동을 벌여 교과서에 담긴 대한민국의 건국·운영 이념을 '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바 있다. 그리고 이들 학자가 주축이 돼 만든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지난해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을 통과했다.

2011년 출범한 현대사학회는 지난 2005년 만들어진 교과서 포럼에 참여한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단체다. 교과서 포럼은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가 좌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며 만들어진 단체다. 이들은 이후 뉴라이트의 주장을 담은 경제교과서를 만든 데 이어 2008년엔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만들었다.

당시 만든 교과서는 2013년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전신이랄 수 있다. 책의 주된 내용은 이승만 등 건국세력이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지켰고, 박정희 등이 근대화 혁명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친일세력의 사상적 기초

뉴라이트 대안교과서가 출판된 2008년은 건국절 논란이 빚어진 해이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는 8·15 행사 명칭을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경축식'으로 바꾸려 시도했다. 당시 정부와 한나라당의 건국절 주장은 뉴라이트의 역사관에 기초했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는 "개화기와 식민지 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 온 근대화 세력과 해방 이후 미국을 따라 들어온 자유민주주의 국제세력의 결합으로 대한민국이 성립하였다"고 규정했다. 이런 주장은 일제시대가 근대화의 바탕이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따르고 있다.

건국절 주장은 임시정부의 역사적 존재조차 부정한 채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일제로부터 축적된 역량이 바탕이 돼 좌우투쟁 과정으로 만들어진 반공국가'라는 인식과 닿아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북을 추종하는 인민민주주의의 대결이란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부정은 곧 '종북'이 된다. 이런 주장은 유신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초가 됐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이번 헌재 결정문에까지 등장하게 됐다.

유신논리 되풀이하고 있는 한국적 특수성 주장

2012년 10월 24일 오후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열린 선진화시민행동 주최 '대한민국 선진화 전진대회'에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 서경석 목사, 뉴라이트전국연합 대표 김진홍 목사 등 참석자들과 구호를 함께 외치고 있다.
 2012년 10월 24일 오후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열린 선진화시민행동 주최 '대한민국 선진화 전진대회'에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 서경석 목사, 뉴라이트전국연합 대표 김진홍 목사 등 참석자들과 구호를 함께 외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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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이 아니다. 헌재 결정문엔 '한국적 특수성'이란 대목도 등장한다. 헌재는 결정문 18페이지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임을 규정함으로써 북한은 단지 미수복지구일 뿐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임을 천명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궁극적으로 타도 혹은 대체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비록 1990년대 들어서서 냉전 체제의 붕괴로 시작된 변화의 분위기로 인하여 대한민국과 북한이 1991. 9. 동시에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대한민국정부와 북한의 정부 당국자가 1991. 12.13.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으며,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등이 공포. 시행되는 등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적대적 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진일보해 온 면이 있기는 하나, 한반도의 이념적 대립상황과 북한의 대남적화통일노선이 본질적으로 변경된 바는 없다고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한국적 특수성을 언급하면서 1991년 채택한 남북기본합의서까지만 언급하고 있다. 2000년 6·15공동선언과 2007년 10·4선언은 언급하지 않았다. 6·15 이전과 이후의 남북관계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을 감안하면 헌재의 인식이 여전히 20세기 냉전시대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북의 변화된 지형을 무시하며 냉전적 인식에 기반해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뉴라이트 역사관과 닮아 있다.

그동안 스스로를 '산업화 세력'이라 지칭해온 보수세력들이 이른바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주장 가운데 하나가 한국적 특수성이다.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2011년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라는 책을 출간했다. 안 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학자들이 참여해 만든 이 책엔 1987년 민주화는 민주화운동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건국, 산업화와 함께 이루어낸 복합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국적 상황을 바탕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담겨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민주주의 이론이나 실천과 관련해 항상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던 보수가 한국 민주주의의 수립과 관련된 공(功)을 공세적으로 자기정당화한 거의 최초의 합동 저작"으로 "민주주의 담론의 일반 이론적 측면과 한국적 특수성을 결합하려 한 점에서 민주주의론의 보편성과 구체성을 한국적 맥락에서 성찰한 보수 지식공동체의 노작(勞作)"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 한국적 특수성은 유신독재에 대해 세계적으로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적 민주주의'를 운운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장과도 통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6년 10월 일기에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는 나라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성장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유신체제는 이러한 귀중한 교훈에서 우러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고 한다.

자유로운 혼란보다 질서정연한 인위적 안정 더 경계해야

뉴라이트 등 수구보수세력들이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면서까지 지키려 애쓰는 자유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정치사상일까? 자유민주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원리로 규정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세우고 민주적 절차 아래 다수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입헌주의의 틀 내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체제를 말한다.

래리 다이아몬드 미 스탠포드대 정치학과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와 입헌적 자유주의의 결합"이라며 시민의 참여, 사상의 자유, 정치적 평등, 소수자 보장 등을 주요 가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구보수세력들이 주장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사전적 의미와는 거리가 먼 '반공사상'에 불과하다.

진보당 해산 심판에서 유일하게 기각의견을 밝힌 김이수 재판관은 결정문 315페이지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일견 난비(亂飛)하는 사상들과 표현들로 인해 초래되는 자유로운 혼란보다도, 통일되고 단합된 정견의 합치로 얻어지는 질서정연한 인위적 안정을 더 경계한다. 즉, 난립하는 정견들의 대립을 그대로 용인하고 그로 인한 불편 내지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큰 사회적 이득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이다. 구체적이지 못한 위험성이나 이념적 이질감, 정서적 불편함을 이유로 어떤 사상이나 견해의 표명을 억압하는 태도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회피되어야 할 가장 큰 오류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통합진보당 기관지 <진보정치>에서 취재기자로 9년째 일해오다 진보당 해산 판결로 지금은 실직자가 됐다.



태그:#통합진보당, #진보당, #정당해산, #헌법재판소, #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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