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11시간 50분의 비행을 거쳐 한국에서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30분. 출국 심사를 하고 나오니 어느덧 오후 5시 반이었다. 하늘이 잘 익은 감처럼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로 차를 타고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니 주변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이 됐다. 북유럽에 있는 영국의 겨울은 해질녁이 짧아 순식간에 어둠이 도시를 덮친다. 어둠의 장막이 쳐진 도로를 달린 지 4시간, 드디어 헤이온 와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후 10시가 다 돼가는 마을은 어둠과 적막에 싸여 고요할 뿐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헌책방으로 유명한 마을, 헤이온 와이
다음날 아침, 밝고 경쾌한 새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었더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숙소 앞에 폭 50미터 정도의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 주변으로는 비록 겨울이라 잎을 떨어뜨리긴 했지만, 어른 혼자서도 밑동을 다 감쌀 수 없을 만큼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강 한편 기슭에는 하얀 백조 두 마리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 강의 이름이 바로 와이강. 회자(回)처럼 둘러 흘러가는 이 강의 이름을 딴 이 마을의 이름은 '강 옆에 있는 헤이라는 동네'라는 뜻의 '헤이온 와이'다.
숙소를 나서자 지난 밤 짙은 어둠의 커튼에 모습을 감췄던 동네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동네는 마치 동화 속 마을 같다. 유럽 특유의 삐죽 솟은 삼각형 모양의 까만 지붕에, 벽면은 하얀 페인트칠을 하거나 밝은 주황색 혹은 녹색 칠을 한 개성 있는 집들이 즐비하다. 높아 봐야 2층, 대부분 1층인 낮은 집들이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모습은 동네를 무척 정겹게 만든다. 또 집집마다 커다랗고 예쁜 유리창이 시선을 끄는데, 유리창에 전시된 것은 대부분 헌책들이다.
표지가 아름다운 헌책들이 시선을 빼앗는다. 전 세계적으로 헌책방 마을로 이름이 높은 헤이온 와이. 원래 이 마을은 주변에 탄광촌이 있어 광부들이 모여 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폐광이 되면서 마을도 서서히 쇠락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1961년 26살의 한 괴짜 청년이 이 마을에 나타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청년은 전 세계를 돌며 헌책들을 사 모으더니, 마을 소방서를 개조해 헌책방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은 영국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이 청년의 행동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주변에 학교도 하나 없고, 런던으로부터 4시간이나 떨어져 있으며, 도로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이 산골 마을에 대체 누가 헌 책을 사러 올 것인가?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염려는 비켜갔다.
괴짜 청년 리차드 부스가 전 세계를 돌며 100만 권의 책을 사 모으고, 희귀본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산골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처드 부스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던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서점을 열기 시작했다. 마을의 창고가, 낡은 극장이, 오래된 소방서가 다 헌책방으로 바뀌어 갔다.
1977년 리차드 부스는 또 한 번 기발한 생각을 한다. 이 마을을 '헤이온 와이 왕국'이라 선포하고 자신을 자칭 '헌책방 왕국 헤이온 와이의 왕'이라 칭하며 실제 왕 옷을 입고 즉위식까지 거행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서 통용되는 여권을 만들고, 화폐도 발행했다. 이런 요소들이 알려지며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록 일흔 살이 넘은 노인이 되어 겨울이면 추운 헤이온 와이를 떠나 있지만, 그가 남긴 왕국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하며 번창하고, 발전하고 있다. 헤이온 와이에서는 일 년에 한 번 5월이면 '헤이 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열린다. 열흘 동안 열리는 이 축제에는 전 세계에서 수십만의 책 마니아들이 모인다. 이들은 헌책방 왕국을 찾아온 유명 저자들과 만나고, 책을 좋아하는 새로운 친구들과 밤을 지새며 토론하고, 헌책의 진한 향기에 취한다.
헌책의 향기, 기억하나요?물론 헤이온 와이 역시 인터넷 시대의 도래로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점 중 일부가 문을 닫았고, 헌책의 판매가 줄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헌책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남아 이 마을을 지키고, 헌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마을을 찾는다.
지금 마을에서 세 곳의 서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는 데렉은 이 마을 출신의 서점 주인이다. 그는 청년 시절, 리차드 부스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함께 일했다. 당시 리차드 부스는 1년 내내 전 세계를 돌며 헌 책을 사들였고, 데렉은 그 책을 정리하고 서점에서 판매하는 일을 했다.
데렉이 운영하는 '살인과 대혼란'이라는 재밌는 제목의 서점은 현재 헤이온 와이의 명물 서점 중 하나다. 이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뭔가 사건 속으로 발을 디딘 느낌이다. 이곳에 진열되는 책들은 전부 탐정, 유령, 추리 소설들이다.
<사람을 죽이는 13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책이 시선을 끈다. 서점 바닥에는 누군가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데렉은 몇 해 전 '적어도 이 마을 안에서는 전자책을 보지 말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서점 앞에 지금도 '헤이온 와이 안에서는 전자책을 보지 못한다'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있다.
반면 서점 '로즈 북스'는 '살인자와 대혼란'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리창에 진열된 책들부터 <피노키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과 토끼 인형들이 함께 진열돼 있다. 어린이 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이다. 이곳에는 어린이 책 가운데 희귀본 책들도 여러 권 있다. 그중 <피터 래빗>으로 유명한 동화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초판본 책 가격은 1400여만 원에 달한다.
그동안 우리나라 헌책방을 돌며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었던 타샤 튜더의 그림책이 있는지 혹시 물으니 1979년판 <A TIME TO KEEP>을 꺼내놓는다.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듯 기뻐하며 가격을 보니 10파운드(약 1만 8000원 정도). 제대로 된 헌책방을 도는 재미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기뻐하며 책을 샀다.
리차드 부스가 1982년, 두 번째로 연 서점은 당시 마을의 농기구 창고를 개조한 것으로 지금도 가장 큰 규모의 헌책방이다. 지금 이 서점은 헤이온 와이에서 가장 번창한 서점 가운데 하나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서점에 들어서면 마치 해리포터의 마술 학교 도서관을 연상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서가에 책들이 분류대로 잘 정리돼 꽂혀 있을 뿐 아니라 군데군데 낮은 진열대에는 책을 전면으로 펼쳐놓아 시선을 끌도록 만들었다. 이 헌책방에 진열돼 있는 책만 해도 25만 권에 달한다. 서점 한편에 예쁜 엽서를 비롯해 작은 수첩 등 기념품도 함께 팔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모두 책의 위기를 말하는 요즘, 헌책방들의 설 자리는 더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헌 책의 왕국, 헤이온 와이'에 가면, 헌 책의 또 다른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간편하긴 하지만 차가운 전자기기에 불과한 전자책이 도저히 지닐 수 없는 책의 온기와 책의 역사가 헤이온 와이에 있기 때문이다.
낙엽 타는 냄새 비슷한 오래된 헌책의 향기가 감성을 일깨우고, 오래전 어느 디자이너가 고심하며 그렸을 책의 표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누군가가 넘겼을 책장을 조심스레 넘길 때면, 책의 온기를 제대로 느끼게 된다. 헤이온 와이에서 만나는 헌책은 사람처럼 체온을 지닌 따뜻한 책, 그곳에서 헌 책의 새로운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