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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즈맨의 죽음> 표지
<세일즈맨의 죽음> 표지 ⓒ 민음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아이에게 이런 잔인한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이 가끔 있다. 아이가 느낄 당혹감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다행히 어린 내겐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었다. 던졌더라도 대답하지 않았을 테지만. 의리! 그럼에도 지금 나는 비슷한 형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엄마를 알아, 아빠를 알아?'
대답한다면..

'엄마는 쪼오금 알 것 같기도 한데, 아빠는 쪼오금 모르는 것 같아.'

엄마는 좀 알 것 같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엄마에게 꽃피는 봄은 언제였는지, 엄마를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엄마를 기쁘게 하고, 살고 싶게 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아빠는? 엄마를 아는 만큼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많이 모르는지도 모른다. 아빠라는 존재는 잘 읽히지 않는 것 같다. 내 아빠만 이럴까? 아마 대부분의 아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빠들은 자식에게 본인을 온전히 열어 보이지 않으니까.

서툴러서 일 테다. 본인을 열어 보이는 것에서도 서툴고,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에서도 서툴고.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제목은 이러한 아버지들의 서투름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제목이 말하듯 아빠는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서툴 수밖에.

영화에서의 아빠가 그랬다. 아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줄줄 아는 아빠. 큰 소리를 내거나 비합리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 아빠.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강압적이지 않은 태도로 규칙을 정하고 명령하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빠가 되는 줄 알았다. 6년을 함께 한 아들. 아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키운 아들은 보내고, 낳은 아들은 데려와야 하는 상황. 아빠는 보내는 데에서도 서툴고, 데려오는 데에서도 서툴다. 두 아들 모두 그런 아빠가 밉다. 이렇듯 서툰 와중에 조금씩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빠보다 더 서툰 아빠인 윌리.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 등장하는 아빠 윌리는 아들의 인생을 망쳤다는 점에서 최악의 아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누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아들을 향한 사랑을 누가 폄훼할 수 있을까.

삼십 년이 넘게 한 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했던 윌리는 예순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잘 나가는 세일즈맨이었다. 경제 호황,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 젊고 유쾌한 세일즈맨에게는 더 없는 기회이던 때였다. 그때는 살만했다. 두 아들은 아빠라면 껌뻑 죽었다. 아빠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겠다던 사랑스런 아들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세상도, 그렇게 믿음직스럽던 큰 아들 비프도 윌리의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한다.

회사는 더는 윌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비프는 아버지를 경멸하기만 한다. 그런 세상을, 아들을 윌리는 포기하지 못한다. 포기할 수 없기에 그는 과거 속으로 도피한다.

윌리 (동정심과 결단이 얽혀) 아침에 그 아이를 좀 봐야겠소. 잘 얘기해 봐야지. 세일즈 자리를 주선해 주어야겠어. 곧 거물이 될 거야. 제기랄! 고등학교 때 아이들이 그 아이를 얼마나 따라다녔는지 기억나요? 그중 하나에게 웃어 주기라도 할라치면 애들 얼굴이 빛이 다 환해졌지. 길을 걸을 때면.... (회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계속 허황된 꿈을 꾸는 아빠

누가 뭐라 해도 윌리의 유일한 희망은 큰 아들 비프가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향해 한 방 크게 폭죽을 쏘아 올리는 거였다. 비프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비프는 정말 대단했다! 기백 있고 개성 있는, 남자 중의 남자! 비프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장학금을 주고 데려가겠다던 대학이 있을 만큼 실력 있는 미식 축구 선수이기도 했다. 그랬던 비프라면 지금쯤은 보란 듯이 성공을 했어야 하는데! 아직 늦지 않았음이 분명하다고 윌리는 생각한다.

그런 아빠에게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고 소리치는 아들.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를 제발 놓아달라고 부탁하는 아들. 아들은 외친다.

이 집에서는 단 십 분도 진실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윌리는 언제나 허황됐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빠의 허황된 기질은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들의 잘못을 보고도 아빠는 혼을 내지 않았다. 아들은 나쁜 아이가 아니니까. 아들은 대성할 거니까. 내 아들이니까. 아빠는 본인의 모습도, 아들의 모습도 제대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들은 삶에 대한 그 어떤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아빠를 분노하게 할 놈팽이가.

놈팽이가 된 아들을 보고도 왜 윌리는 계속 허황된 꿈을 꾸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윌리가 의도적으로 현실을 거부하는 느낌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살기 위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들이 꼭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 미친듯 아들을 닦달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 있는 듯 했다.

이유가 있었다. 아빠는 다시 사랑 받고 싶었던 것이다. 윌리는 알고 있었다. 아들이 인생을 자포자기한 이유가 본인 때문이라는 것을. 아직 아빠를 사랑하던 그때, 열일 곱 살 아들은 그만 아빠의 실체를 알아버렸다. 아들은 엉엉 울었었다. 아빠는 그런 아들을 무시했고, 이후 아들은 망가졌다.

현실을 거부하는 기질이 다분했던 윌리의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아들의 인생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지고 만 것이다. 아들의 실패에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 있다는 것, 윌리는 그것을 알았기에 더욱 더 아들의 성공에 집착했던 터였다. 아들이 성공한다면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해줄거라 기대하면서.

일자리마저 잃은 지금. 윌리는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그 애에게 뭔가 남겨 주면서 나를 더 이상 혐오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하고. 아빠가 아들에게 주고 싶은 건 다시 시작할 기회였다. 성공적인 삶이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윌리는 자동차를 몰고 나간다. 아들에게 보험금을 남겨주기 위해. 

어른이 된 자식을 놓아주는 용기마저 없었던 윌리. 윌리는 끝까지 황망한 방법으로 아빠 역할을 자행했다. 모든 꿈은 포기할 수 있어도, 너에 대한 꿈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끝까지 꿈 속에서 살다가 죽은 것이다.

가족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비치지 못하고, 본인 역시 가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가족을 사랑한다는 면에서만큼은 진짜 아빠가 된 우리 아빠들. 우리는 이런 아빠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아빠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이것뿐인 것 같다. 서툴지만 사랑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이 아빠들은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다는 것.

덧붙이는 글 |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민음사/2009년 08월 31일/9,000원)



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민음사(2009)


#아서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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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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