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
2014년 9월초 입양을 신청하고 일 년이 되었다. 긴 기다림 속에 가정조사를 나온 입양기관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요일이었다.
"월령이 좀 많은 아이도 괜찮겠어요?" 나이가 있는 연장아 입양을 생각했다 포기한 적은 있었지만 월령이 많은 아이는 전혀 뜻밖이었다. 9개월이라고 했다. 여자 신생아는 일 년을 넘게 기다려야 하는데 9개월 동안 입양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럭 겁부터 났다. 우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또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했다.
"아기가 헬멧을 쓰고 있어요.""마음은 수없이 많은 갈래로 쪼개지고"사두증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였다. 요행 질병이 아닌 질환이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심하게 눌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모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뇌출혈 증세를 검사했는데 그 결과가 주말을 지나고 월요일 나온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장애까지도 예상할 수 있다고 했다. 헬멧은 머리모양을 바로 잡기 위한 교정 장치였다.
처음 입양 상담을 할 때 유일하게 원했던 게 건강한 여아였다. 혈액형도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비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큼 생각은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9개월이 지나는 동안 입양되지 못한 알 수 없는 어떤 상황들과 큰 병이랄 수는 없지만 사두증이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수없이 많은 갈래로 쪼개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긴 기다림 끝에 처음으로 소개된 아이였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지만 '안 되겠' 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자가 말했다.
"월요일 검사결과를 보고 다시 전화를 드릴게요."주말이 지나고 전화를 받기까지 가슴속에서는 큰 폭풍이 지나가고 있었다. 9개월, 사두증, 장애 등의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복잡하게 얽힌, 할 수 있는 갖은 상상을 해야만 했던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월요일 오후 전화가 왔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뇌출혈이나 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는데요." 가슴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너무 궁금했지만 보내지 말라고 했다. 사진을 보고 입양을 결정한다는 게 이상하고 불편했다. 입양을 신청하고 실제 입양아를 결정하는 방식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봉사를 다니면서 눈에 밟히는 아이를 입양하는 거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상상은 했지만. 일단 만나 보기로 했다.
2014년 9월 18일,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아가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부부의 얼굴에 함박 놀라운 웃음이 번졌다. 9개월, 사두증이라는 단어 때문에 빚어졌던 온갖 불온한 상상들이 한꺼번에 그리고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부에게는 눈부시게 예쁜 아이였다. 낳아도 낳을 수 없을 만큼 환한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2014년 10월 30일, 입양을 신청하고 정확하게 400일 되던 날, 이젠 '그런 아이'가 아닌 딸 레아를 집으로 데려왔다. 레아 생후 10개월이었다.
"지금은 레아가 없던 시절이 잘 생각이 안 나요. 입양사실조차 가끔 까먹을 때가 있어요. 그냥 처음부터 여기 이렇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 거죠."2015년 2월 24일, 설 연휴가 지나고 레아 아빠 이상호(37·삼성전자)씨와 엄마 박정은(36· 영어과외)씨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집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유학 생활 교회 봉사 중에 얻은 깨달음 '아, 입양해야겠구나'세기말 끄트머리였던 1999년 12월 군에서 휴가를 나온 이씨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스카이러브' 라는 인터넷 채팅 사이트에서 후배와 정담을 나누던 박씨의 방을 우연하게 찾아 들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둘이 같은 학번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건물에서 수업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친구도 아닌 애인은 더욱이나 아닌 애매한 사이로 일 년을 만나다 이씨가 고백을 했다. 거절 당했다. 인연을 끊진 않았다. 다시 일 년을 가급적 편한 사이로 지내다 두 번째 고백을 했다. 또 거절 당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일 년 후 세 번째 고백을 했다. 단서가 있는 허락이 떨어졌다. 모태신앙이었던 박씨를 따라 교회를 다녀야 했다. 어렵게 얻은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이씨는 2학년 복학생, 박씨는 어학연수와 휴학 등으로 대학 4학년이었다.
먼저 졸업을 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있던 박씨와 졸업과 동시에 공공기관에 입사를 한 이씨는 2006년 6월 결혼했다. 당시 나이 스물일곱, 스물여덟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집안 형편은 어려운 편이었다. 하지만 2년 뒤 두 사람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 "원래 경제학을 계속 전공해 박사를 따고 교수를 하고 싶었어요. 고민을 하다가 회사생활을 접고 일 년 유학준비를 하고 시험에 합격해서 2008년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박= "(재정적으로) 말이 안 되는 유학이었어요. 반 지하 단칸방 신혼집 전세금 털고 이것저것 다 모아도 일 년 학비가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용감하게 간 거예요." 자식이 똑같은 상황이라면 말리고 싶을 만큼 힘겨운 유학생활이었다. 더구나 이씨가 전공을 살려 원하던 교수가 되려면 10년 정도가 걸리는 지난한 세월도 흘러야 했다.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꿈이 되고 있었다.
이= "유학하고 있으면 삼성에서 유학생들을 채용해요. 그렇게 삼성전자에 입사를 하고 2010년에 국내로 들어왔죠."2년 동안의 유학생활이었다. 두 사람에게 무척 힘겨운 2년이었다. 하지만 그 힘겨운 시간이 두 사람에게 그냥 버티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가 짙다'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처럼 두 사람에게 미국에서의 2년이 아니었으면 지금 '없던 시절이 잘 생각이 안'날 만큼 소중한 레아와의 만남도 불가능했다.
박= "저도 공부욕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신랑 학비를 내고 돈이 한푼도 없는데 학점별로 돈을 낼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영어교육이었어요. 일 년 안에 마칠 수 있는 과정인데 그것도 유학 가서 일 년 뒤에야 시작을 했어요. 유학 간 첫 해는 붕 뜨잖아요. 그 때가 제가 사회잉여로 그냥 무존재로 산 처음이에요. 한국에서는 집안은 어려웠지만 다른 건 학력이니 뭐니 무엇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미국에 가니 그냥 조그맣고 이상하고 소속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는 거예요. 자존감이 그렇게 무너지는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그런 상황이 견딜 수 없어서 미국 사회에서 나라는 사람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나란 사람 자체가 되게 아름다워서 그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국인 교회를 갔어요. 백인이 98%인. 그런 교회를 가서 동양인 아이가 적응하겠다고 언어도 안 되는데 성가대에 들어가겠다고 하고 여러 모임에 들어가려 하고 그랬죠. 처음에 너무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너무 잘 적응을 했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게 됐죠. 그렇게 가까이서 미국 사회를 보게 됐죠. 그런데 제 주변에 미국 친구들의 50% 이상은 입양을 했거나 입양을 준비 중이거나 입양 형제가 있거나 그런 거예요. 가족의 새로운 유형을 보게 된 거죠. 그 때는 아이에 대한 욕심도 없었는데 교회 안에서 미국인이 아닌 다른 가정 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제가 그 때 그 아이들을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돌봐주는 봉사를 했는데 그 중에 '유토'라는 일본 아이가 있었어요. 같은 동양인이라 그런지 유독 저와 교감이 잘 되는 아이였죠. 백인 여자가 안으면 자지러지는 아이가 저에게만 오면 울음도 그치고 방긋방긋 웃는 거예요. 제 친조카가 세 명이나 있는데 '유토'를 안고 있을 때는 조카들에게서도 느낄 수 없던 강한 유대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 '아, 이게 특별히 피가 통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불길한 기운 때문에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고 혼자 생각으로 '만약 우리 부부한테 임신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거 하지 않고 입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시기를 지나오면서 이상호씨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유학 중에 구체적으로 입양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저도 마음이 열린 게 미국에서 같이 봤으니까. 저도 사실 깜짝 놀랐어요. 왜냐면 한국에서 방송을 통해서 본 입양은 아이를 위해서 숨기고 내가 낳은 아이인 것처럼 키우잖아요. 그게 보편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미국에서 백인이 동양 아이를 입양하면 공개 안 할 수가 없는 외모잖아요. 근데 그게 너무나 당연하더라고요. 입양이라는 게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고. 그리고 또 놀란 점은 자기 아이가 있는데도 입양을 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상당히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두번째 시험관 시술도 실패... "입양, 더는 미루지 말자"만약 임신에 문제가 있으면 다른 생각 안 하고 바로 입양을 할 거라는 박정은씨의 불온(?)했던 혼자만의 상상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 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난생 처음으로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난임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 "헛헛했어요. 직장도 안정되고 이제 우리가 아이와 함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도 난임이라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허탈하더라고요." 박= "난임 판정을 받은 그날 신랑한테 이야기했어요. 사실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약 임신이 안 되면 바로 입양을 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입양을 하자. 그런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 그거 괜찮은 거 같아' 그러는 거예요. 되게 고마웠죠. 그런데 신랑이 좀 더 생각을 해보더니 '정은아 입양을 우리는 반드시 할 거다. 그런데 먼 훗날 돌이켜 봤을 때 우리 아이를 가지려는 시도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게 시간이 지나면 후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속내는 못마땅했지만 이 문제는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귀국 다음 해인 2011년 부부는 첫번째 시험관 시술을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박= "두번째부터는 진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첫 번째 시술을 했을 때도 사실은 제가 여러 면에서 정성을 다하진 않았어요. 그게 저한테는 그렇게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았거든요. 입양을 해도 같은 자식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해서 낳아야 하는지 의문도 들고 또 그게 제가 미국에서 결심했던 입양결심에 대한 배신 같은 그런 마음도 들었거든요. 그런데 또 어느 날 남편이 '정은아 나는 도저히 너를 닮은 딸이 포기가 안 돼'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실패를 하더라도 후회가 없는 실패를 하자 해서 병원도 더 좋은 데로 바꾸고 원래 사람들한테 말을 안 했는데 말도 하고 도움도 받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임신이 됐다는 거예요. 첫 실패 하고 3개월 만에. 신랑은 하루 종일 가슴이 울컥울컥해서 일 하기가 힘들었다고 해요. 신랑만큼은 아니었지만 저도 되게 기쁘긴 했어요. 신랑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하지만 두 번째 시험관 시술도 실패로 끝이 난다. 임신 확인 후 삼차에 걸친 피검사를 하는데 수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야 했지만 두 번째 피검사에서 오히려 수치가 낮아지는 결과가 나왔다. 착상에 실패를 했고 세 번째 검사에서 수치가 다시 높게 나오는 바람에 착상이 어디에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임신 아닌 임신이었던 것이다.
산모가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의사의 권고로 항암주사까지 맞는 치료과정을 거치면서 시험관 시술은 끝을 맺는다. 정은씨에게 이 과정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남편에게는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박= "나중에 돌이켜 보니까 신랑의 마음을 정리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했더라고요."이= "당연히 우리 아이를 갖고 싶었죠.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죠. 순서를 바꾸자. 입양을 하고 그 다음에 만약에 아이가 생기면 좋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입양을 본격적으로 실행하자." 입양신청에서 판결까지 수많은 절차... 입양,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2013년 2월 시험관 시술을 통한 출산을 완전히 포기한 이상호씨와 박정은씨는 그 해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입양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함께 입양기관을 방문했다. 2013년 9월이었다. 그러나 2012년 8월 시행된 입양특례법은 입양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레아가 집에 온 지 4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레아는 법적으로 아직 두 사람의 딸이 아니다. 입양특례법에 의한 법적인 완결은 판사의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신청에서부터 판결까지 많은 서류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박= "법적으로 따지면 자식은 아니고 아직 위탁 형식이에요. 서류 다 내고 법원 인터뷰 끝내고 남은 게 법원에서 하는 가정조사 방문하고 판사 면접이죠. 면접까지 마치고 나면 또 판결이 날 때까지 시간이 더 걸리고요. 서류 내면서 정말 영혼까지 다 털리는 기분이었어요. 에세이 써 내고, 심리검사, 아이큐 검사 그게 40~50만 원 들어요. 거기에 통장 잔고, 보험잔고 증명서, 재산 증명서, 원천징수영수증, 재직증명서, 학력증명서, 지난 5년 동안 먹었던 약 리스트에 병원리스트, 범죄수사경력조사서까지. 제가 정말 유학도 가보고 뭐도 다 해봤지만 심사 받을 때 이렇게까지 스캔 당한 적은 처음이에요. 저는 그래서 지금 입양절차를 거치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사람들이 입양한다고 하면 버려진 아이 데려 온다고 흔히 생각해요. 근데 정말 그게 아니거든요. 이 아이는 사실은 운이 없어서 친생 부모가 키울 수 없을 뿐이지 생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위험을 감수하고 정식기관에 공식적으로 의뢰를 한 거예요. 만약 파양이 되면 다시 자기 호적에 올라가 버리거든요. 그런 환경 속에서 아이가 더 좋은 가정을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린 거고요. 입양기관을 통해서 의료처치도 다 받고요. 위탁 가정에서도 크게 사랑을 받아요. 레아가 태어나서 400일이 넘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정식부모가 되지 못할 정도로 까다롭고 엄격한데 사람들은 쉽게 버려진 아이 데려와 쉽게 키운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최초 입양 신청을 하고 400일 만에 딸이라고 데려 왔지만 그 뒤로 또 120일이 지나도록 레아는 아직 두 사람의 법적인 딸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미 정서적으로 레아는 이상호씨와 박정은씨의 분명한 딸이다. 레아 없는 삶은 도대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레아가 어떤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는지에 대해서.
"그저 자기한테 벌어지는 일 즐기며 살기 바라요"박=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애가 분명 상처가 있는 아이잖아요. 근데 저도 살아보니까 제가 가진 상처가 있거든요. 돌이켜 보면 그게 저를 키웠어요. 많은 면에서 제가 또래보다 성숙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집안에서 엄마 아빠의 갈등 이런 것들이 심했기 때문에 저는 많은 걸 깊이 생각해야 했고 그걸 통해서 제가 컸거든요. 단점은 달리 보면 자양분인 것 같아요. 힘들게 생각하면 한없이 삐뚤어질 수도 있지만 딛고 일어서면 남들보다 훨씬 아름답게 필 수 있는 동기가 되거든요. 저는 레아가 입양사실에 상처받지 않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다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있는 그대로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존감 있는 사람으로요." 이= "미국과 한국의 입양 문화가 분명 차이가 있죠. 아이는 자라면서 아마 틀림없이 또래나 주위 사람의 편견에 상처를 받을 거예요. 하지만 그거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당연해 지는 거잖아요. 입양을 비밀스럽게 하는 것조차도 저한테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우리가 입양의 아름다운 과정을 사람들에게 잘 보여줘서 이런 입양문화가 당연해졌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이 아이는 독립된 객체고 입양은 자기의 어떤 운명 같은 삶인 거죠. 이 아이의 인생에 대해서 이게 더 좋을 것 같으니까 이 길을 선택해라, 이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대신 입양을 통해서 네가 우리한테 온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이렇게 우리가 만날 수 있어서 더 감사한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생모에 대해서도 여러 감정이 들겠지만 자기를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레아가 삶이라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살다 보면 좋은 일 나쁜 일이 계속 이어지죠. 좋은 일만 있는 책만큼 재미없는 책도 없잖아요. 레아는 시작부터 재미있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잖아요. 자기의 긴 삶 중에 있는 슬픈 한 대목에만 빠져 있지 않기를 바라요. 삶은 어차피 유한한데 마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욕심 부리며 살지 말고 그저 자기한테 벌어지는 일을 즐기며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2015년 1월 가까운 가족들이 모여 레아의 돌잔치를 조촐하게 치렀다. 이상호씨와 박정은씨는 조촐하지 않게 했다면 들어갔을 초과 돌잔치 비용을 입양기관에 레아 이름으로 기부했다. 그리고 해마다 레아 생일이 돌아오는 날에 맞춰 기부를 계속하기로 약속했다.
아직은 위탁가정의 임시 부모로 레아를 키우는 이상호씨와 박정은씨에게 레아가 법적인 딸로 영구적인 가족이 되는 달은 이변이 없는 한 2015년 5월 무렵이다. 어린 생모로부터 레아가 세상에 태어난 지 일 년 하고 다섯 달 만이다. 레아의 사두증은 현재 완치단계에 있다.
☞인터뷰 후기 : 레아의 아주 특별한 '세 번째 엄마' http://omn.kr/bw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