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씨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았다. 고등학교 때 어울리던 친구들과 우르르 군산 군장대학 물류유통과에 입학했다. 친구들이 군대 갈 때, 덩달아 입대 지원서를 냈다. 공익 근무 요원으로 근무하고 대학을 졸업한 성지씨, 또 친구를 따라갔다. 수원에 있는 한 반도체 회사에 취직했다. 그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이건 사는 게 아니다'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 직장으로 다닐 만한 회사였어요. 월급이랑 복지도 좋았어요. 친구 네 명이서 옥탑 방에서 살았는데 너무 추워서 겨울에는 잠바를 입고 잤어요. 하루 12시간씩 교대 근무를 했고요. 방진복을 입고서 기계 앞에서 하는 일이었어요. 눈 뜨면 회사 가고, 퇴근하면 자는 게 다였어요. 8개월 일하니까 '이건 사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지씨는 점차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숱한 선택, 성지씨 스스로 결정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후회 없이 달려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계속 살면 후회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어릴 때 어머니한테 항상 듣던 말이 생각났다.
중학생 성지는 팔이 빠지는 습관성 어깨 탈골(스물두 살에 수술해서 완치됨)이 있었다. 자주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팔을 들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빠진 팔을 끼워 넣기 수십 차례. 차츰차츰 스스로 빠진 어깨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됐다. 성지는 허리 디스크도 있었다. 어머니는 성지를 데리고 정형외과에 다녔다. 어머니는 문득 누워서 치료받는 아들에게 말했다.
"성지야. 너는 커서 물리치료사가 딱 맞겠다. 험한 일은 못하겠어."수원에서 군산 집으로 내려온 성지씨. 부모님한테 "대학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부모님은 "자리 잡았으니까 결혼만 하면 되는데 무슨 소리냐?"라고 했다. 성지씨는 그냥 버텼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도 못할 것 같았다. 친구들은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성지씨에게 "너, 미쳤냐? 정신 좀 차려!"라고 했다.
스물여섯 살 성지씨, 이미 졸업했던 군장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물리치료과,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뼈와 근육을 배웠다. 왜 근육을 이완시키고 운동 시키는지 알아갔다. 자가 오십견 치료기를 만들어서 서울의 코엑스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도 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왔다.
"3년간 학교 다니고, 스물아홉 살에 취직했어요. 경기도 일산에 있는 개인 병원이었는데 과 선배 따라서 간 거였어요. 주로 노인 환자들이 왔어요. 저는 핫팩 대주고, 전기 치료, 초음파 치료만 하면 됐어요. 환자들이랑 친해지니까, 진짜로 이 환자들을 낫게 해주고 싶었어요. 근데 그 선배 밑에서는 공부를 할 수 없는 거예요. 치료 기술 면에서 많이 아쉬웠어요."그는 도수 치료(손으로 하는 물리 치료)를 잘하는 물리치료사가 되고 싶었다. 군산으로 내려와서 개인 병원에 취직하고는 '칼텐본 협회'를 찾아다니면서 도수 치료를 배웠다. 1년 내내 물리 치료 연수가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갔다. 주말마다 광주와 대전, 구리까지 다녔다. "저 선생님 치료 잘하더라"는 말이 성지씨를 따라다녔다. 월급도 많이 올랐다.
"너는 결혼 늦게 해! 결혼하니까 책임감이 생기더라. 아내랑 아기가 있으니까 뭘 못하겠더라."함께 어울려 놀던 그의 친구들이 성지씨에게 말했다. '이 정도 기술 있고, 이 정도 벌면, 여자 만나서 결혼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던 성지씨는 '팍' 흔들렸다. 현재 삶에 대만족하면서 주저앉아 사는 서른두 살, 다른 길을 가보고 싶었다. 사표를 썼다. 두려움은 없었다. '나는 직장이 아니라 직업을 갖고 있다'라고 생각했으니까.
서른 두살, 회사 떠나 여행길 오르다"혼자서 우리나라 여행을 했어요. 통영의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한 달을 지냈어요.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야가 넓어지더라고요. '일적인 것 말고 다른 것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들면서 극한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철인 3종 경기(수영, 사이클, 마라톤)를 해보고 싶었어요. 퇴근하면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노느라 제 몸무게가 100kg 넘은 적도 있었거든요."군산으로 돌아온 성지씨는 수영부터 배웠다. 지방 덩어리였던 뚱뚱한 몸, 물에 잘 떴다. 수영하고, 헬스 하고, 은파 유원지 걷고. 두 달 만에 20kg이 빠졌다. "유레카!" 그는 목욕하다가 발가벗은 몸으로 달려가던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을 알았다. 그는 수영하면서 수중 치료에 눈을 떴다. '지금껏 해 온 정형외과 치료 말고 신경계 치료를 배워야 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1월, 성지씨는 뇌졸중이나 몸을 못 쓰는 신경계 환자를 치료하는 논산의 한 병원에 취직했다. 퇴근하고 운동도 계속했다. 자전거를 타다가 만난 '논산 철인 팀'이 "같이 해볼래요?" 물었다. 그들과 운동하면서 봄이 지났다. 논산 철인 팀은 그에게 6월에 열리는 대전 철인 경기대회에 나가자고 했다. 정식으로 수영을 해 본 적 없는 성지씨는 말했다.
"포기할게요.""도전을 해야 포기라는 단어가 있어. 도전도 안 했는데 포기라는 단어를 쓰지 마."
철인 팀 김용구씨가 한 말은 성지씨 가슴에 새겨졌다. 그는 대회 출전을 결심했다. 철인 팀은 며칠 뒤에 "지금 저수지에 배 띄워 놨으니까 빨리 와. 한 번도 안 해 봤다며?"라고 그를 초대했다. 저수지 바닥은 밑도 끝도 안 보였다. 수영에 자신 있던 성지씨, 물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숨이 탁 막히면서 팔 다리가 따로 놀았다. 그는 허우적댔다.
논산 철인 팀원들은 "경기 나가는 데는 강이다. 유도라인 줄을 잡으면 돼"라며 그를 다독였다. 그는 대회 전날에 논산에서 대전 경기장까지 리허설 갔다 와서 한숨도 못 잤다. 성지씨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철인 경기 첫 출전. 그는 엑스포 공원 옆 천변에서 수영 1.5km를 했다. 허우적대듯 헤엄치면서 '내 돈 내고 왜 이 고생을 하지?' 하며 이를 갈았다.
중간에 그만둘 수 없는 노릇, 그는 자전거를 타고 40km를 갔다. 다시 마라톤 10km 코스, 아무리 달려도 반환점은 안 나오고 다리에 쥐만 났다. 7km를 걷다 뛰다 하고 나니까 몸이 풀렸다. 마지막 100m를 남겨두고 논산 철인 팀원들이 같이 뛰어줬다. '완주!' 담담했다. 물만 마시고 싶었다. 뒤풀이할 때야 감정이 북받쳤다. 그는 "해냈어요" 하면서 좀 울었다.
성지씨는 연달아 두 번째 철인 경기 대회에 나갔다. 세 번째로 참석한 여수 대회에서는 바다 수영을 했다. 바다는 부력이 세니까 그의 몸은 가벼웠다. 대신 물살을 헤쳐나가는데 힘이 배로 들었다. 1.5km 수영하고 나니까 한꺼번에 10년이 늙은 듯 얼굴이 처졌다. 사이클, 마라톤도 쉽지 않았다. 이상도 하지, 죽을 것 같이 힘든데 재미있었다. 계속하고 싶었다.
지난해 가을에 열린 통영 철인 경기 대회. 성지씨는 하루 전날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통영 여행을 갔다. 당일에는 선수로 뛰었다. 누군가를 이길 필요 없이 자신과 싸우는 경기, 그는 식구들의 응원을 받고 싶었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며 뛰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마라톤 골인 지점에서 성지씨를 기다리던 부모님은 한없이 흐뭇해하며 말했다.
"장한 우리 아들, 이제 좋은 아가씨 만나서 결혼해라. 우리도 휴대폰에 손주 사진 넣어서 갖고 다니고 싶다. 논산에서는 술도 안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계속 거기 살아라."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헉! 성지씨와는 완전 반대였다. 그는 철인경기를 완주하며 '이대로 안주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경기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수중 치료하는 병원을 찾아봤다. 수중 치료 하는 물 온도는 34에서 36도, 항상 유지해야 한다. 공간도 많이 차지하는데 돈은 안 되는 게 이 치료의 특징. 우리나라에는 몇 군데 없었다.
군산 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수중 치료 물리치료사를 구했다. 면접을 보러 간 성지씨에게 복지관 관장 신부님이 "수중 치료 없애려고 해요. 물리치료사들이 계속 그만두니까요"라고 했다. 물리치료사는 오전 2시간, 오후 4시간, 하루 6시간을 물속에서 보낸다. 따뜻한 물속에 오래 있으면 몸이 늘어지고 근육들이 이완 된다. 힘들다. 그는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쳤다. 또래 물리치료사들은 한 달에 300만 원 이상의 월급을 받는다. 복지관에서 일하면, 월급이 반 토막 난다. 주위 사람들은 돈 벌고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 게 옳은 삶이란다. 성지씨 어머니는 "아들, 엄마가 후원해줄 수 있는 능력이 못 돼서 미안해"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이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도 안 됐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그게 아니면, 다른 병원에 다시 취직하면 되니까요. 논산에서 다니던 병원 퇴직하고, 10일간의 여유가 있어서 경주로 여행을 갔어요. 이런 저런 욕심을 다 버리고 왔어요. 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 출근했는데 뭐든지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더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수중 치료를 더 배울 수 있는 대학원에 가려고요."장애인들은 걷다가 잘 넘어진다. 물속에는 부력이 있어서 넘어지는데 시간이 걸린다. 넘어져도 덜 다친다. 물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된다. 물의 깊이에 따라서 사람의 몸무게가 달라진다. 힘이 없는 아이들도 물 속에서 걸을 수 있다. 그는 수중 치료 하면서 장애인 아이들한테 수영도 가르친다. 아이들을 데리고 장애인 올림픽에도 나가보고 싶다.
올해 3월, 그는 두 번이나 졸업한 군장대에 다시 들어갔다. 1년 치 학점을 따야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안주하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인생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뜻일 터. 그래서 더 뚜렷한 목표를 세운다. 수중 치료 센터를 열고 싶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미혼 인생, 결혼했으면 아마 못 했을 거라고 하면서.
"제가 친구들하고 술 먹으면서 수다 떠는 걸 되게 좋아해요. 월급이 줄어드니까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많이 사줘요. 전주 사는 친구는 일부러 술 사주러 오고요. 친구들 안 만날 때는 수영하고, 은파 유원지를 달려요. 논산 철인 팀하고도 가끔 운동하고요. 그 형님들이 '성지야, 빨리 가려면 혼자 가. 멀리 가려면 같이 가. 평생 이 생각으로 살아' 라고 한 말이 생각나요. 저는 사람들하고 같이 가려고 수중 물리치료사 공부를 하는 거잖아요."성지씨는 서른두 살에 여행을 떠났다. 히말라야 설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 길,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은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곳곳을 다녔을 뿐인데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장애인 수중치료 물리치료사로 살고 있다. 철인 경기까지 한다. "제가 어렸을 때, 되게 몸이 가냘팠어요"라는 그의 말은 상상불가. 풋! 나는 웃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매거진군산> 4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