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서구의 문화와 학문을 좇으려 애써 왔고 그에 따른 산물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서구 학문에 종속되는 지식을 경계한다며 김정운 교수가 내놓은 에디톨로지(editology)의 개념이다. 에디톨로지(editology)는 'edit'와 'ology'를 합성한 개념으로 편집학이라 해석할 수 있는데, 해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고 기존에 있는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편집하는 활동이 곧 창조의 요체라는 이론이다.
'생방송, 퀴즈가 좋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MBC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이다. 방송인 임성훈의 재치 있는 진행이 돋보인 데다 출연자들이 퀴즈의 답을 맞힐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고 새로웠기에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프로그램이다.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 출연진들은 상황에 따라 시청자들이 ARS로 선택한 정답을 참고하는 'ARS 찬스', 지인에게 전화로 답을 물어보는 '전화 찬스', 인터넷으로 정답을 찾아보는 '인터넷 찬스'를 통해 해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식이라는 것은 더 이상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기에 충분했던 프로그램이었다. 김정운이 그의 책 '에디톨로지'에서 말했듯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지식인이 아니라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어내는 사람,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김정운은 한 TV 프로그램에서 러시아 심리학자 루리아의 실험을 바탕으로 '도끼와 망치, 나무, 그리고 톱 중에서 하나를 빼야 한다면 무엇을 빼야 할까?'라며 방청객과 시청자들을 향해 질문했다. 나무를 빼야 한다고 답하는 방청객도 있었고 망치를 빼야 한다고 대응하는 방청객도 있었으니 예상하건대 시청자 또한 유사한 반응을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나무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도구'라는 기준으로 도끼, 망치, 톱을 엮은 것이고 망치를 빼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은 '벌목'이라는 잣대로 도끼, 톱, 나무를 엮은 것이다.
전자는 이론적 개념으로 정리된 '추상적 지식(abstract knowledge)'이라 볼 수 있고 후자는 맥락적 상호 작용으로 얻어진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 김정운의 보충 설명이었다. 편집자의 기준이나 판단에 따라서 정보는 달리 수용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편집자의 성향이나 감각, 맥락을 재구성하는 기준에 따라 지식과 정보는 참신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재편될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창의성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주입식 교육이 팽배하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학교, 자녀의 꿈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사'로 끝나는 직업을 종용하고 선행학습의 덫에 결려든 학부모,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무덤에 스스로 들어가기를 자청하거나 아예 넋두리만 늘어놓고 움직이지 않는 학생, 학벌에 따른 간판의 논리가 지배하고 직업에 따른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를 한꺼번에 바꾸어 놓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김정운이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역할을 맡아 국영수 중심 교육과정을 재편하여 다문화교육, 국제이해교육, 예체능교육, 환경교육 등 시대적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 학교현장에 맥락의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을 보이면 사회는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겠다던 교육부의 취지에 무색하게 전국 대부분의 교육청에서 학교 단위 도서구입비를 삭감하고 있는 조치와는 반대로 우리 학교만큼은 다른 예산을 줄이더라도 독서토론교육을 강화할 수 있는 장은 꼭 마련하고야 말겠다는 '김정운 교장'을 만나 학생들에게 맥락과 환경을 재구성함에 따른 재미를 느끼게 하고도 싶다. 대입 제도를 핑계로 죽은 공부만 강요하는 교사와 학부모에게 '미래는 창의력이다'라는 마인드로 소신 있게 교육하면 나무 아닌 숲이 될 수 있으며 그 중지(衆智)가 제도를 이끌어 나갈 수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김정운 교장'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믿고서 말이다.
"다양하게 생각하고 낯설게 생각하세요.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세뇌당한 관습적 사고와 태도를 버리고 열린 눈으로 세상을 크게 봐야 합니다."법인 스님이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이라는 책에 밝힌 내용이다.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야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인 스님은 좋아 보이는 것이나 모두가 동의한 것을 두고 비판적으로 뒤집어 보려 노력하고, 위로받기 전에 냉철하게 자기 문제를 진단하려 노력하면 사유를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김정운 교수가 언급한 내용이나 법인 스님의 가르침이 상통한다. 맥락과 환경을 분석하는 수준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체적으로 재편하려는 단계까지 승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운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훌라후프 제조사 사장의 일화는 맥락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훌라후프 만드는 회사 사장이 미국에서 엄청난 양의 훌라후프를 주문 받았다. 은행 빚을 내서 훌라후프를 잔뜩 만들어 인천 앞바다에 선적하려고 쌓아놓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주문한 회사가 망했다는 것이다. 사장은 이 훌라후프를 팔려고 발에 불이 나도록 운동용품점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모두들 한결같이 대답한다.
"아니, 요즘 누가 훌라후프해요? 필요 없어요."절망한 사장은 터벅터벅 인천 부두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기 들판에 가득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사장의 머리에 번뜩하고 아이디어가 생겼다. 그는 선적장에 가득한 훌라후프를 모조리 반원 모양이 되도록 반으로 뚝 잘랐다. 그리고 반 토막 난 훌라후프를 모두 비닐하우스 제작 공장에 팔아 치웠다. 계산해 보니 돈은 갑절로 벌렸다.
운동용품으로서의 훌라후프가 아닌 비닐하우스 뼈대로서의 훌라후프로 맥락을 바꾼 것에는 주체적인 사고가 전제로 깔려 있을 터이니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강제하는 학교 풍토에서 과연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을 얼마나 육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규격품 인간이 아니라 맞춤형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길이기도 하고 미래사회의 메가트렌드에 해당할 것이기도 하다는 소신으로 현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학부모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미래사회의 화두는 창의성이고 그 창의성은 주체적 사고에서 기인하며 주체적 사고의 바탕에는 쉼의 미학이 빠질 수 없다는 사실까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김정운 교장과도 같은 이가 나타나 학부모회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으면 한다.
"쉰다는 것은 내면의 나와 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논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나 스스로를 망각하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정말 잘 놀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쉬는 것과 노는 것은 분명 구분되어야 합니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이 적절히 조정되어야만 내면의 항상성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