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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국인들의 눈에 남미 대륙은 군사 독재와 가난, 사회 부조리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비운의 땅으로 다가온다. 중동이 그런 것처럼, 서구 편향적인 시각으로 남미를 바라보는 언론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 남미는 진보적인 사회 변혁의 본보기로 볼 만한 사례들이 많다.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신대륙' 이후의 남미 500년 역사상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볼리비아는 그의 취임 이후 남미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2013년 3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서거를 '독재자의 죽음'으로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자국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질병, 문맹, 빈곤 등 사회 문제를 퇴치하는 대규모 프로그램을 시행해 '빈민들의 영웅' 대접을 받은 좌파 정치인이었다.

정치인들의 업적이나 역량만 남다른 게 아니다. 남미 국가들의 '시스템'은 세계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본보기로 봐도 될 것 같다.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이 나라는 세계 제일의 '지속 가능한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쿠바는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지만 전 국민 무상의료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2008년에 개봉된 화제작 <식코>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환자 출연자들을 이끌고 쿠바로 건너간다. 쿠바의 선진적인 무상의료 시스템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앓는 이(식코)' 같은 미국 의료 시스템을 비꼬기 위해서였다.

남미에는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는 강소국 우루과이도 있다. 국토 면적이나 인구로 볼 때 남미 전체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소득 수준이 중남미 전체에서 1, 2위를 다툰다. 한때는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이민 가고 싶은 나라로 손꼽히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미겔 앙헬 캄포도니코 지음, 21세기북스 펴냄)는 우루과이의 제40대 대통령 호세 알베르토 무히카 코르다노(1935~현재)의 평전이다. 지금까지 24쇄 넘게 최신 자료를 보완해가며 재판을 찍은 책이다. 그만큼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무히카는 2015년 2월 27일 높은 지지율을 받으며 퇴임한 후에도 상원의원직과 주요 정당의 총재직을 함께 유지하고 있는 현역 정치인이다. 낮은 지지율 속에서 쓸쓸히 퇴장해 국민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여느 대통령과 다르다. 팔순의 할아버지로,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하다. 그만의 '매력 포인트'가 있지 않았을까.

퇴임 때 지지율 65%... "떠나는 게 아니라 여러분에게로 돌아가는 것"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표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표지
ⓒ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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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우루과이는 군사독재 체제 아래 있었다. 그에 맞서는 최대 게릴라 조직으로 투파마로스가 있었다. 무히카는 그곳의 주요 리더 중 하나였는데, 조직 내에서 '로빈후드'로 불렸다고 한다.

무히카는 경찰 체포 과정에서 6발의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기적'의 주인공이었다. 수감 기간 중에는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 같은 고문"을 당했다. 독방 수감 기간만도 13년이나 된다. 감옥에서 땅굴을 타고 빠져나와 하수구를 거쳐 탈옥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온다.

1985년에 석방된 이후 민중참여운동에 꾸준히 참여한 무히카는 1994년 하원의원, 1999년 상원의원, 2005~2008년 농축수산부장관을 지냈다고 한다. 2009에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우루과이에 두 번째 좌파 정부 시대를 열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도시 게릴라 전사에서 대통령이 된 그는 '체 게바라 이후 가장 위대한 남미 지도자'로 불린다.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두 차례나 올랐다. 지금도 28년된 고물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그는 대통령 재임 시 월급의 90퍼센트를 기부했다고 한다.

세계 어느 대통령보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거쳤다. 검소하고 소탈한 성품 역시 여느 대통령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국민들로부터 '페페(Pepe)'라는 애칭을 얻으며 그들의 마음을 훔친 이유들이 아닐까. 퇴임사에서 한 그의 말에서 국민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저는 떠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 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저는 언제나 여러분이 있는 이곳에서,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44쪽)

무히카는 '철학자'로 불리는 대통령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넓고 깊은 안목이 책 곳곳에 보인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쇠락과 신 케인스주의(경제에 대한 국가의 일정한 개입을 인정함-기자 주)의 도래를 점친다. 일정한 국가 통제 정책이 유효해질 것이며, 국제 조직이 이를 강제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없어지면 문제가 끝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부가 개입해서도 안 되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며, 모든 게 저절로 사라지도록 놔두어야 한다는 식의 잔인한 무책임이 종결되리라는 의미입니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면서 시장을 성스럽게 만드는 행동은 끝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의식과 의지가 그 무엇에도 개입할 수 없는 아주 잔인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중략) 소비사회의 감옥은 금융자본의 감옥처럼 너무나 심각합니다. 경제구조가 바뀌면 과도하게 부당한 소유체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너무나 기계적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바뀌어야 종식될 문제입니다. (91쪽)

무히카는 "가치의 씨앗"을 뿌릴 것을 제안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인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삶의 태도와 같은 것 말이다. 평생 꽃을 재배하고 파는 평범한 노동자(우루과이 인물사전의 공식 프로필에는 직업이 '상원의원'이 아니라 '농부'로 되어 있다고 한다)로 살고 있으면서도 좌익 투사나 정치인으로 극적 변신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이 이런 데 있었을 것이다.

무히카의 이런 '철학'은 실제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장에서건 유엔총회에서건 '노타이' 차림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사저인 농장에서 출퇴근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연충 전 우루과이 대사는 '소개의 글'에서 "이웃이 아플 때, 국민이 어려울 때 제일 먼저 나타나 손을 건네고 힘이 되어주는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책 말미의 '무히카 어록'들에는 가난, 소유, 자유, 인생과 사랑, 소비, 물질주의, 신자유주의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단순하게 살 뿐이다"와 같은 말에서 절제의 삶에 대한 확신을 느낄 수 있다. 2012년 6월 유엔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 한 "발전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라는 연설은 발전지상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폐해를 고민하게 한다.

무히카는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거리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적인 정직성을 정치에서 요구되는 첫 번째 조건으로 보았다. 실패하고 있는 것은 정치이며, 그 이유는 삶을 부의 축적보다 우위에 두는 철학적 시야가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음과 같은 말은 권력 시스템이 어떤 전제 위에서 작동되어야 하는지 시사한다.

손에 무기를 지닌 인간은 아주 커다란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기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가능한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237쪽)

무히카는 정치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또는 대표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떠올린다. 박 대통령은 올바른 정치, 이상적인 정치인의 삶과 관련된 무히카의 '정의'에 얼마나 부합할까.

무히카는 취임 시 지지율이 52퍼센트였다가 퇴임 시 지지율이 65퍼센트로 증가했다고 한다. 임기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30퍼센트 후반대에서 정체하고 있다. 취임 초반 지지율은 40퍼센트대 중반이었다. 현재 상태로는 국정 수행을 위한 최소한의 동력을 확보하는 일도 힘들 수밖에 없다. 무히카 대통령 사례를 한 번쯤 돌아볼 만하지 않은가.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미겔 앙헬 캄포도니코 지음, 송병선, 김용호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399쪽, 1만 6천원, 2015.04.24. 이 글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 KBS <TV, 책을 보다> 선정 도서

미겔 앙헬 캄포도니코 지음, 송병선 외 옮김, 21세기북스(2015)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전 우루과이 대통령#박근혜 대통령#'남미의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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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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