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중략)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133~134쪽)인류의 진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비롯됐다. 과거 프랑스 대혁명이나 68혁명 등에서부터 현재 페미니즘 운동이나 동성애 합법화 운동 등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희망이 있는 사회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는 항상 불행할 뿐이다.
'생존하기'가 한 해의 목표인 시대다. 갈수록 삶은 팍팍해진다.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자문해보지만 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은 희망이다. 하지만 도처는 절망으로 점철돼 있다. 미래에도 삶이 더 낫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희망 대신 행복을 찾는다.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절망의 바다에서 '더 나은 삶'이라는 희망찾기를 멈추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선택한 일본 젊은이들을 다룬 연구서다. 저자는 독자에게 '불행 없음'이 어떻게 '행복 추구'로 귀결되는지 보여준다.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사회, 행복한 젊은이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연구는 일본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우리나라 청년에게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일본의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 아주 유사한 것은 공공연하다. 이러한 한일 간의 유사성은 일본 사회현상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근거가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34쪽)저자는 일본 청년이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분명 사회는 절망이 가득한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인간은 현재가 불행 혹은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보를 위해 투쟁해왔다. 방법은 다양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일 수도, 정치적인 혁명일 수도 있었다.
방법이 무엇이든 목적은 같았다. 더 나은 삶이라는 지향은 인류의 진보로 이끌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청년은 '진보'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을 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개인의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보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련 교육이 부재한 것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일 청년의 삶은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생존의 문제에서 타인의 삶이란 논외일 수밖에 없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기계발을 하거나 주변 사람을 돌보는 게 남는 장사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편해 보인다. 사회적 연대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더 나은 삶이라 믿는다.
경험의 부재, 행복의 맹신트위터나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쉬운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기능은 '사회 변혁'과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트위터에 마치 사회의식이 있는 것처럼 적당히 글을 올려 팔로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많은 수의 리트윗에 만족한다.(298~299쪽)혹자는 각종 커뮤니티나 SNS에 난무하는, 진보성 짙은 글의 향연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온라인 공간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지금 쓰고 있는 리뷰조차도 같은 처지다. 행동하지 않는 진보가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 청년은 더 이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덧없는 희망을 좇기보다는 눈앞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분명 행복한 것이 아님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의 영역에 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다. 우리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보다 스스로 인지부조화의 길로 걸어들어 간 것이다.
기성세대는 아마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청년은 분명 다르다. 경험의 차이다. 현재 기성세대는 인류의 진보를 목격한 세대다. 그들은 청년 시절 진보의 흐름에 참여했다.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아니다. 진보가 아니라 인류의 절망을 목격한 것이다.
진보가 불가능한 시대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능동적으로 현재에 순응하는 것이다. 현재에서 아주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든 행복할 지점을 찾아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프리터족이나 니트족보다 더한 종족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절망적인 사회, 불행한 청년이제껏 일본은 경제 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 성장이 멈춰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307쪽)사실 일본의 사례는 양반이다. 최저시급도 높을뿐더러 여러 복지제도도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일본 청년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니다. 일본 청년은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 청년은 불가능하다.
아직 우리나라 청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업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불행은 잠시뿐이라 믿으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점점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
끝은 정해져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정해진 끝으로 달려갈 뿐이다. 행복한 청년을 생산하는 사회구조를 깨뜨려야 모두가 살 수 있다. 8년 전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 세대>에서 '짱돌을 들어라'고 외친 것처럼, 이제 정말 저항과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과연 우리나라 청년은 생존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씀/ 민음사/ 2014. 12/ 정가 1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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