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난 후 감상을 묻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있는가.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어."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길래 아름다웠냐고 묻는 친구에게 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말로 못하겠어. 그냥 너가 한 번 봐봐."이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부제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를 읽고 든 생각이 바로 이랬다. 이 책이 어느 시를 담고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나는 그냥 이 책을 내 친구들에게 추천하고 싶었다. 내 친구 공대생들에게, 그리고 시를 잊은 그대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추천을 해줘도 읽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 시를 한번 읊어주고 싶다. 신경림의 <갈대>이다.
언젠가부터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이 시를 읊어주고 나는 물을 것이다. 너는 혹시 갈대인 적이 있느냐고. 갈대처럼 조용히 울어본 적이 있느냐고. 우느라 온몸이 흔들린 적이 있느냐고. 그런데 바로 그 우는 행위 자체가 삶의 속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시인 신경림이 "산다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하느냐고.
이렇게 삭막한 시절에, 무슨 시냐고우리는 분명 시를 배웠었다. 시를 읽는 법도 배웠었다. 시를 낱낱이 분해해 그 시에 담긴 상징과 함축을 역시나 낱낱이 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를 과연 느껴본 적이 있던가. 시를 내 삶과 연관 지어 본 일이 있던가. 시를 읽고 내 삶이 떠올라 웃거나 울어본 적이 있던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시인은 삶을 노래하느라 시를 지었는데, 우리는 시를 배우며 한 번도 삶을 떠올려보지 못했으니.
이렇게나 삭막한 시절에 무슨 시냐고 말하는 친구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갈대이거나, 갈대가 아닌 것이 사는 데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묻는 친구도 있을 것 같다. 울면 그뿐 다시 삶을 살기 위해선 시니, 사랑이니, 낭만이니 따위를 다 잊어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친구도 있을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지. 시니, 사랑이니, 낭만이니 따위를 잊고 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책의 저자 정재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 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 머리말 중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을 잊고 살고 있다. 삶이 더욱 더 팍팍해져 갈수록 점점 더 잊고 살고 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삶이 점점 더 팍팍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우리 삶에서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어렵겠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 이러한 것들을 다시 우리 삶으로 끌어온다면 조금은 더 삶이 살만해 지지는 않을까.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한양대학교에서 수업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학교에서 '문화혼융의 시 읽기'라는 교양 강좌를 처음엔 공대생을 대상으로 열었다가, 인기가 높아지자 의학, 법학, 경영학 등 "시를 잊은", "시를 사랑하는 법을 아예 배워보지도 못한", "시를 읽고 즐길 권리마저 빼앗긴" 학생들에게도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학생들은 처음엔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저자와 함께 천천히 선물을 음미하더니, 결국에는 그 선물을 예쁘게 포장해 저자에게 다시 건네줄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이제 시를 읽으며 웃고 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재미없기만 하던 시를 학생들은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걸까. 교과서를 내려 놓고 시를 손에 든 저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손에 든 시를 정성을 다해 학생들의 손에 건네주었다. 영화, 음악, 그림과 사진, 광고 등 이미 학생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도구들을 이용해 학생들이 시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이제 시를 손에 들게 되었다어떨 때는 욕을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를 가르칠 때는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뒤에 '씨발'이라는 욕을 덧붙이기도 했다는 거다.
교과서에 따르면 이 시의 주제는 '인간적 진실의 따뜻함과 아름다움' 혹은 '따뜻한 인간애'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 아름다운 주제를 품은 시를 읊은 뒤에 욕을 해댄 걸까. 그건 시를 읽어보면 안다. 시는 이렇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두 점을 치는 소리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이 시의 주제가 따뜻한 인간애라면 이 시는 사뭇 부드럽고 따스한 어조로 낭송을 해야 할 터, 나는 도저히 이 시를 그렇게 읽을 방도가 없다. 특히 점층적 고조에 이른 마지막 부분에서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라는 대목은 울부짖듯이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의 시간에 실제로 이 시 구절 뒤에 욕설 하나를 슬쩍 붙여서 읽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보아도 이 시의 초점은 가난한 노동자의 따스한 마음에 가 닿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이 현실을 향한 것으로 보아야 옳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학창 시절, 학생들은 이 시를 공부하며 가난한 노동자의 따뜻한 인간애를 떠올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이 시를 읊으며 가난한 노동자처럼 분노한 채 울부짖고, 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어디 학생들뿐일까. 이 책을 읽은 독자도 마찬가지이리라. 우리 역시 교과서를 덮고, 시를 손에 들게 되었다. 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다시 시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휴머니스트/2015년 06월 15일/1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