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시를 잊은 그대에게> 표지
 <시를 잊은 그대에게> 표지
ⓒ 휴머니스트

관련사진보기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난 후 감상을 묻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있는가.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어."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길래 아름다웠냐고 묻는 친구에게 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말로 못하겠어. 그냥 너가 한 번 봐봐."

이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부제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를 읽고 든 생각이 바로 이랬다. 이 책이 어느 시를 담고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나는 그냥 이 책을 내 친구들에게 추천하고 싶었다. 내 친구 공대생들에게, 그리고 시를 잊은 그대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추천을 해줘도 읽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 시를 한번 읊어주고 싶다. 신경림의 <갈대>이다.

언젠가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시를 읊어주고 나는 물을 것이다. 너는 혹시 갈대인 적이 있느냐고. 갈대처럼 조용히 울어본 적이 있느냐고. 우느라 온몸이 흔들린 적이 있느냐고. 그런데 바로 그 우는 행위 자체가 삶의 속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시인 신경림이 "산다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하느냐고.

이렇게 삭막한 시절에, 무슨 시냐고

우리는 분명 시를 배웠었다. 시를 읽는 법도 배웠었다. 시를 낱낱이 분해해 그 시에 담긴 상징과 함축을 역시나 낱낱이 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를 과연 느껴본 적이 있던가. 시를 내 삶과 연관 지어 본 일이 있던가. 시를 읽고 내 삶이 떠올라 웃거나 울어본 적이 있던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시인은 삶을 노래하느라 시를 지었는데, 우리는 시를 배우며 한 번도 삶을 떠올려보지 못했으니.

이렇게나 삭막한 시절에 무슨 시냐고 말하는 친구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갈대이거나, 갈대가 아닌 것이 사는 데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묻는 친구도 있을 것 같다. 울면 그뿐 다시 삶을 살기 위해선 시니, 사랑이니, 낭만이니 따위를 다 잊어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친구도 있을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지. 시니, 사랑이니, 낭만이니 따위를 잊고 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책의 저자 정재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 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 머리말 중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을 잊고 살고 있다. 삶이 더욱 더 팍팍해져 갈수록 점점 더 잊고 살고 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삶이 점점 더 팍팍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우리 삶에서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어렵겠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 이러한 것들을 다시 우리 삶으로 끌어온다면 조금은 더 삶이 살만해 지지는 않을까.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한양대학교에서 수업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학교에서 '문화혼융의 시 읽기'라는 교양 강좌를 처음엔 공대생을 대상으로 열었다가, 인기가 높아지자 의학, 법학, 경영학 등 "시를 잊은", "시를 사랑하는 법을 아예 배워보지도 못한", "시를 읽고 즐길 권리마저 빼앗긴" 학생들에게도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학생들은 처음엔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저자와 함께 천천히 선물을 음미하더니, 결국에는 그 선물을 예쁘게 포장해 저자에게 다시 건네줄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이제 시를 읽으며 웃고 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재미없기만 하던 시를 학생들은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걸까. 교과서를 내려 놓고 시를 손에 든 저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손에 든 시를 정성을 다해 학생들의 손에 건네주었다. 영화, 음악, 그림과 사진, 광고 등 이미 학생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도구들을 이용해 학생들이 시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이제 시를 손에 들게 되었다

어떨 때는 욕을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를 가르칠 때는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뒤에 '씨발'이라는 욕을 덧붙이기도 했다는 거다.

교과서에 따르면 이 시의 주제는 '인간적 진실의 따뜻함과 아름다움' 혹은 '따뜻한 인간애'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 아름다운 주제를 품은 시를 읊은 뒤에 욕을 해댄 걸까. 그건 시를 읽어보면 안다. 시는 이렇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이 시의 주제가 따뜻한 인간애라면 이 시는 사뭇 부드럽고 따스한 어조로 낭송을 해야 할 터, 나는 도저히 이 시를 그렇게 읽을 방도가 없다. 특히 점층적 고조에 이른 마지막 부분에서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라는 대목은 울부짖듯이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의 시간에 실제로 이 시 구절 뒤에 욕설 하나를 슬쩍 붙여서 읽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보아도 이 시의 초점은 가난한 노동자의 따스한 마음에 가 닿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이 현실을 향한 것으로 보아야 옳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학창 시절, 학생들은 이 시를 공부하며 가난한 노동자의 따뜻한 인간애를 떠올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이 시를 읊으며 가난한 노동자처럼 분노한 채 울부짖고, 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어디 학생들뿐일까. 이 책을 읽은 독자도 마찬가지이리라. 우리 역시 교과서를 덮고, 시를 손에 들게 되었다. 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다시 시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휴머니스트/2015년 06월 15일/1만5천원)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지음, 휴머니스트(2015)


#신경림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