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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나자와시에 있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 관리에 대한 관심과 실질적 민간교류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윤 의사 암장지는 1932년 12월 19일 순국한 윤 의사의 유해가 암매장돼 있던 곳으로, 해방 뒤 1946년 유해가 조국으로 송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된 뒤 잊혔다. 이후 1992년 비석을 세우고 선양사업을 벌이면서 독립운동가 순례지로 부상했다. 윤 의사의 유골 가운데 201개만 수습하고 나무뿌리에 뒤엉켜 7개를 찾지 못해 아직도 유골 일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골 일부 남아 있는 일본의 윤 의사 암장지

윤의사 암장지비 주변에 설치물들이 어수선하다. 이 곳은 습하고 낮에도 어두워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바로 위 양지쪽에는 윤의사의 상해의거때 사망한 일본인들의 합장비가 세워져 있다. 조국을 잃고 비참했던 당시 상황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년이면 1~2차례씩 방문하는 고향단체들이 설치물 정비와 안내문 정리 등을 세심하게 한다면 더 의미있는 순례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윤의사 암장지비 주변에 설치물들이 어수선하다. 이 곳은 습하고 낮에도 어두워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바로 위 양지쪽에는 윤의사의 상해의거때 사망한 일본인들의 합장비가 세워져 있다. 조국을 잃고 비참했던 당시 상황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년이면 1~2차례씩 방문하는 고향단체들이 설치물 정비와 안내문 정리 등을 세심하게 한다면 더 의미있는 순례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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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일본 우익이 가나자와 시에 감사청구를 하면서 철거위기에 놓였으나, 2008년 월진회가 가나자와 시와 이 땅에 대한 영구임대계약을 맺고 임대료를 완불하면서 보존되고 있다.

윤 의사 암장지 관리는 가나자와에 있는 '(사)월진회' 지부와 '윤봉길 의사 순국지 보존회',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힘을 쏟고 있지만, 회원들의 노령화와 맞물려 활동력이 저하되면서 지속 관리에 대한 전망이 밝지 않다.

반면 충남 예산지역에서는 월진회와 매헌사랑회, 덕산고 매헌바로미 등 학생과 주민단체들의 방문이 늘고 있다. 따라서 예산지역 단체들이 방문할 때 가나자와 시 거주 관련 단체들과 교류하고 함께 시설물 정비와 안내광고지 제작비치 등의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김병권(83) '윤봉길 의사 순국지 보존회' 사무국장은 "법도 바뀌면 그만인데 영구임대계약을 했던 시장이 이미 바뀌었고, 역사 왜곡 문제 등이 풀리지 않고 일본의 우경화가 계속된다면 영구임대계약이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우익들이 입구에 버스를 대놓고 방문객들을 위축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민간교류가 좀 더 실질적이고 긴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윤 의사 고향민들이 구체적으로 노력해 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이어 "암장지를 지키고 영구임대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동포와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함께 했다, 그런데 한국언론과 고향단체에서는 한 사람의 개인 업적으로 찬양을 하고 영웅시하는 바람에 지속적인 관계와 상호협력의 기회를 잃었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암장지 영구임대 당시에는 윤 의사를 생각하는 일본인 모임도 있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지적한 뒤 "나 역시 나이가 많으니 누가 이 일을 이어갈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먹고사는 일에 바빠 우리 세대처럼 이런 일에 관심이 많지 않다"며 "이제라도 윤 의사 고향민들이 가나자와시의 양심적 일본인, 재일교포, 재일한국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일본 가나자와시 거주 재일교포2세 김병권씨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윤봉길의사 순국지 보존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병권옹.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윤봉길의사 순국지 보존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병권옹.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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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학교 다닐 때 이곳 전몰자 육군묘지공원이 통학구역이어서 한 달에 두 번씩 청소를 하러 왔는데, 윤봉길 의사가 묻혀 계신 줄도 모르고,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지며 온 몸무게를 실어서 착지하고 발로 힘껏 구르면서 놀았습니다. 나중에 바로 그 자리가 윤 의사 암장지로 밝혀졌을 때 얼마나 한이 되는지, 지금도 그게 그렇게 죄스럽습니다."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윤봉길의사 순국지 보존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병권(83, 사진)옹은 윤의사에 대한 남다른 마음을 나타내며, 유적지 안내와 인터뷰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윤 의사가 폭탄을 들고 상해의거를 할 당시 또 다른 분이 일본으로 와 일왕거처로 이어지는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져 옥사했는데 그 분이 나와 관계가 있습니다. 또 나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을 도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류성룡의 제자인 김성일의 외손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아버지 기일이 윤봉길 의사와 같은 12월 19일입니다. 그리고 1946년 서울에서 손님이 와서 윤봉길의사 유해를 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나도 어린 나이였지만 함께 쫓아다녔어요."

김씨는 윤 의사 유해 찾기에 얼마나 많은 교포들이 마음과 힘을 보탰는지도 증언했다.

"당시 우리 동포들은 대부분 하층민들이 사는 가나자와 강주변에서 살았는데, 어느날 윤봉길의사의 유해를 찾는다며 서울서 온 손님과 여기 어른들, 아이들이 나선 겁니다. 매일 암매장지를 찾아 헤맸지만 허탕을 쳤는데, 동네에서 구전되는 얘기가 암매장 당시 여승이 같이 있었다는 겁니다. 일본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여승에게 염불을 부탁한 거죠. 동포들이 나서 그 여승이 누구인지 수소문해 찾고 나서야 암장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자와고등학교에서 교사로 20년 이상 재직하면서 경제와 역사를 가르치고 난 뒤에는 신용금고 이사장을 지낸 김씨는 현재 윤 의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동북아연구재단 주최로 고려대에서 열렸던 학술대회에서 독도문제 관련 발표를 하기도 했다.

"윤 의사와 관련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이 있어요. 여기 윤 의사 암장지 바로 위에 상해사변사망자(윤 의사 의거 당시 일본인 사망자) 합장비가 있는데, 그 건립시기를 나중에서야 소화 7년(1932년) 12월이라고 새깁니다. 왜 그랬을까요? 또 일본은 왜 윤 의사를 사형장소가 아닌 이곳 노다야마까지 와서 1시간 뒤에야 암장을 했을까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연구와 정리를 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김씨가 제기한 의문점에 대해서는 이미 정리가 돼 있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김씨는 다른 문제의식 속에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일본 가나자와와 중국 상해의 윤의사의 유적지에 대해 한국민과 고향민들이 관광지 혹은 순례지 탐방 정도로만 의미를 두고 다녀간다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길수도 있다"면서 거듭 유적지 관리와 보존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윤봉길, #윤봉길의사 암장지, #독립운동가,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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