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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그가 지금껏 해 왔던 선택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선택들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선택이 그 사람의 모든 걸 말해 줄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밀한 생각들, 신념, 정의나 사랑에 대한 의견 등등이 꼭 선택에 영향을 미치란 법도 없으니까.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은 결국 선택에 의해 많은 부분 결정된다는 점에서 역시나 선택은 어느 한 사람을, 곧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정의하고자 할 때 우리가 취했던 선택들을 돌아보곤 한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삶이 마땅치 않아 가슴이 답답해져 올 때면 이렇게 넋두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 그 선택을 하지 말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 삶은 조금은 달라졌을까?'

지나간 일은 후회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고 또 먹어도 가끔은 나 역시 이런 넋두리를 하게 되는 날이 있다. 몇 날 며칠을 이런 넋두리 속에서 허우적대며 매일 아침을 숙취와 함께 맞게 되는 때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며칠을 이렇듯 정신을 못 차리고 지내다 보면 다시금 지금의 내 삶을 긍정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 나는 크눌프의 죽음을 떠올린다.

자유인 크눌프, 그를 떠올리는 이유

 <크눌프> 표지
<크눌프> 표지 ⓒ 민음사
어렸을 적부터 나는 '자유'라는 단어를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을 보면 한눈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가 현실 세계의 사람이건, 허구 세계의 사람이건 상관 없었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자유를 추구하진 않는다. 아니,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은 사실상 거의 없다. 자유는 불안을 동반하기 때문이며, 인간은 또한 안정을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 인간이기에 자기 자신에게 자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가짜 자유라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느끼며 행복해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진짜 자유인을 만났다고 해보자. 어떻게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있을까.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에 나오는 크눌프는 진짜 자유인이었다. 그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평생을 여행하며 살았던 그는 진정한 방랑자이기도 했다. 집도, 직업도, 돈도 없었던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그저 자유를 위해 살았다. 사람들은 이렇듯 자유로운 그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고, 또 허구 같은 그의 삶을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조롱하는 사람도 그를 사랑하긴 마찬가지였다.

크눌프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예의 바르고 우아했으며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으며 춤을 추길 즐기던 크눌프에게는 보통 사람들에겐 없는 총천연색 영혼이 깃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알았다. 크눌프가 이러한 영혼을 지닐 수 있게 된 건 그가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방랑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방랑을 묵인해 주었고 그가 혹여나 도움을 요청할 때는 영광스런 마음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가 자신의 집에서 며칠 묵는다는 것은 그 며칠 동안은 밝고 즐거운 빛이 자신의 집을 환하게 비추어 줄 거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크눌프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크눌프는 누가 봐도 재능있는 사람이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교사도, 의사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부러 아무 직업도 갖지 않고 가난뱅이 방랑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거였다.

크눌프를 손님으로 맞은 무두장이 역시 크눌프가 왜 이렇게 사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착하고 깨끗한 크눌프를 집으로 들이는 것은 좋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충고를 해주고 싶었다. 자기 자신처럼 살라고. 자신이 이룬 이 행복한 가정과 어느새 장인이 돼 있는 자신의 이 신분을 한 번 보라고. 사람은 결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크눌프는 무두장이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깊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2월의 햇살이 벌이는 유희, 집 안의 고요한 평화, 친구에게서 보이는 진실로 성실한 장인의 얼굴, 귀여운 부인의 의미있는 눈길, 크눌프는 이 모든 것들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 모든 게 싫었다. 그것들은 그의 목표도 아니었고 그의 행복이 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본문 중에서

크눌프는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그들이 즐겁길,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눌프 본인이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 크눌프에겐 자기 자신의 삶이 있었으니까.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 이렇게. 이 중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에서의 크눌프가 바로 지금까지 소개한 젊은 방랑자 크눌프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 자체로 만족하던 크눌프 말이다. 

그런데 <종말>에서의 크눌프는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방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자신의 삶에 의문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종말>에서의 크눌프는 더는 젊지 않았고,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죽음을 앞둔 그라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일까.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한 사내가 물처럼 맑게 흘러 삶의 마지막에 다다랐는데, 그는 자신의 삶이 의미 없었다며 슬퍼하고 있었다. 자신을 방랑자로 이끈 어린 시절의 그 선택을 후회하며 차라리 그 때 죽었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만족했던 크눌프였는데, 그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역시나 사람들의 의견처럼 크눌프의 삶의 방식은 잘못된 거였기 때문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그럴듯한 직업을 가져야 했었기 때문에?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단지, 세상엔 완벽한 선택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를 선택했다는 건 다른 하나를 포기했다는 뜻이니까. 한 가지를 포기하고 다른 한 가지를 택하며 살아온 우리 삶은 그래서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할 수 없기에 우리는 지난 선택을 떠올리며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일 테다.

크눌프 역시 자유를 선택한 대신,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총천연색 영혼을 선택한 대신,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후회만 하고 있어야 할까. 헤르만 헤세는 우리가 후회를 좀 그만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삶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 헤르만 헤세는 하느님을 등장시킨다. 그리고는 크눌프와 하느님을 대화하게 한다. 크눌프는 계속 삶을 한탄하고 후회하고 절망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다정하게 크눌프를 타이른다.

너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거였다고. 세상 곳곳의 사람들에게 사랑도 받고 조롱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너의 몫이었다고. 너는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고. 그러니 한탄할 필요 없다고. 너의 모든 것은 선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왔고 그 어떤 것도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그게 너의 삶이었다고. 그게 내가 너에게 준 삶이었다고.

하느님은 크눌프를 충분히 설득했다. 그리고 물었다. 더 한탄할 게 있느냐고.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크눌프는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나는 내가 하느님을 믿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하느님이 크눌프를 타이르는 부분에서는 큰 위안을 받았다. 완벽하든, 완벽하지 않든 어찌됐건 이 삶은 내 삶인 것이 분명했고, 나는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거였다. 내가 했던 모든 선택들이 나를 만들었다. 완벽하지 않은 선택이 완벽하지 않은 나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될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크눌프>(헤르만 헤세/민음사/2004년 11월 20일/7천5백원)

개인 블로그에도 중복게재 합니다.



크눌프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민음사(2004)


#헤르만 헤세#크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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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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