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휘를 받는 독립투사 안옥윤(전지현 분) 등이 조선주재 일본군 사령관과 거물급 친일파를 처단하고자 벌이는 작전을 담은 작품이다.
작품의 줄거리 자체는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몇몇 인물과 시대적 상황을 제외하면 그렇다. 하지만 전지현·이정재·하정우라는 톱스타를 등장시켜 독립운동과 친일·반일의 문제를 좀 더 대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독립운동에 활력 불어넣은 '암살 전문 단체'첫 문장에서 언급했듯,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다. 1931년만까지만 해도, 한국의 독립운동은 비교적 침체된 상태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활력을 보이던 독립운동이 어느새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시기의 끝자락이 1931년이다.
반면에 일본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일본은 1910년에 조선을 강점하고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승자가 되고 1920년에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1920년 당시의 일본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와 더불어 세계 4대 강국이었다.
이런 여세를 몰아 일본은 중국 정복의 1단계로 1931년 만주사변을 감행하고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를 점령한 뒤에 중국으로 진격하려 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한국 독립운동이 침체 상태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하늘 높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그룹 중 하나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1927년 취임)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이었다. '암살 전문 단체'인 한인애국단이 벌인 대표적 업적이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같은 해 4월 윤봉길 의거다.
이봉창은 지금 일왕(이른바 천황)의 아버지인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가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고"(당시 중국 국민당 기관지의 표현), 윤봉길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장성들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한인애국단이 벌인 일련의 사건은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 진영과 중국 정부의 연계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전까지 중국인들은 '조선과 일본은 한통속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 중국인들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한국인에 대한 애정을 갖고 한국 독립운동을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1931년의 사건들은 무명 청년인 이봉창·윤봉길을 국제적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국제적으로 무명이나 다름없던 김구를 일약 국제적인 중요 인물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김구는 임시정부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자서전 <백범일지>에서도 언급됐다시피 임시정부 초기만 해도 김구는 존재감이 미미했다. 공권력을 행사할 만한 역량도, 대상도 없는 임시정부였다. 그런 임시정부에서 그는 치안권을 총괄하는 경무국장을 맡았다. 이렇게 조금 무의미한 타이틀을 맡은 것은 그의 위상이 어땠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랬던 김구를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각시킨 것이 이봉창·윤봉길 의거였다.
'따돌림' 당했던 임시정부
김구의 국제적 부각과 함께 임시정부의 이미지도 바뀌게 되었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으로 대표되는 1919년 당시의 임시정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협의체의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1930년대의 임시정부는 누구한테라도 폭탄을 던질 수 있는 김구라는 지도자로 인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격적 단체의 모습을 어느 정도 띠게 되었다. 그래서 1930년대 이후의 임시정부는 1920년대의 임시정부와는 색깔 자체가 달랐다.
만약 1930년대에 김구가 임시정부를 되살리지 않았다면,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개정된 현행 헌법의 전문(前文)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가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1948년에 제정된 헌법에서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함으로써 임시정부를 간접적으로 언급했지만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또 1987년 헌법에서처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1948년 헌법에서는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선언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이 조선왕조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인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인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1950년 헌법(제1차 개정 헌법)부터 1960년 헌법(제4차 개정)의 전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
5·16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제정된 1963년 헌법(제5차 개정)에는 그런 문구마저도 없다. 1963년 헌법에서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라고 함으로써 임시정부를 간접적으로도 언급하지 않았다. 1969년 헌법(제6차 개정)부터 1980년 헌법(제8차 개정)의 전문도 마찬가지다.
이런 개헌 과정을 살펴보면, 1987년 헌법에서 임시정부를 명확히 규정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김구의 임시정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6월 항쟁 주역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런 획기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헌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은 1910년에 멸망한 조선왕조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가 아니라 1919년에 수립되고 1930년대에 리메이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다. 이 점은 조선 황족들이 해방 이후에 찬밥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영화 <암살>에서와 같은 일련의 암살 작전을 통해 독립운동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임시정부를 되살린 김구라는 인물의 역할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은 사실은 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먼저 주둔한 뒤에 고국 땅을 밟은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미군정의 배척을 받았다. 미군정의 훼방 때문에 그들은 공적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미군정 및 이승만과 대립했다.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이 추구하는 분단정책을 반대했다. 이승만은 한때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임시정부의 적이었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에 맞서 남북 구분 없는 하나의 정부를 지향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첫 선거인 1948년 5·10총선에도 불참했다. 38선 이남 혹은 이북만을 지배하는 정부는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정부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드러나듯,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거부한 정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자기 이름을 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출현했지만, 자기 이름을 딴 대한민국이 자기와 정반대의 길을 걷자 대한민국에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불편한 관계는, 1948년 헌법의 전문에서 임시정부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언급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이승만 진영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자의 불편한 관계는 1948년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선언하지 않고 '대한민국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라고 모호하게 선언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임시정부 계승하는 대한민국 헌법
그렇게 분단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을 거부했기 때문에, 김구는 1949년에 숙소인 경교장에서 미군 첩자이자 이승만의 하수인인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정부 수립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임시정부란 존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대한민국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가 명기되고,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등장한 것이다.
한 나라가 어느 국가의 정통성을 계승하느냐는 그 나라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기능을 한다. 훗날의 통일 코리아가 대한민국을 계승하느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계승하느냐, 조선왕조를 계승하느냐, 고려 혹은 고구려 왕조를 계승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정체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세워진 대한민국이 미군정과 이승만을 반대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쪽으로 1987년에 개헌이 이루어진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직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1987년 헌법은 어쩌면 개헌 헌법이 아니라 제헌 헌법일 수도 있는 것이다.
헌법은 국민의 보편적 정서를 반영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이런 규범에서 미군정과 반통일세력을 반대한 김구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에 의해 계승되었음을 선언하는 문구를 담고 있다. 헌법에 이런 문구가 있다는 것은, 미국과 반통일세력의 지배가 적어도 대한민국 법질서에서는 용인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땅은 여전히 미국과 반통일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 헌법에 반영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를 따를 것 같으면, 영화 <암살>에서처럼 1930년대의 암살 작전을 통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945년 이후에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을 지지한 임시정부의 계승자들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다. 그래서 이 땅의 현실은 모순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역사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역사는 대중의 보편적 정서에 맞도록 사회를 개조하는 쪽으로 운동해왔다. 이 같은 역사의 운동패턴을 고려할 때, 오늘날 한반도에 존재하는 거대한 모순이 머지않아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