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피치 미술관'의 작품 재배치로 전시실을 옮겨온 '국제 고딕 양식'의 작품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또 '수태 고지'입니다. 그런데 이번 '수태 고지'는 그동안 봐왔던 모든 '수태 고지'의 원형처럼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사, 아니 서양 회화사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시에나 화파'의 시모네 마르티니가 처남인 리포 멤미와 함께 그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금박으로 입힌 화려한 패널에 인물과 사물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교한 묘사는 대상에 대한 리얼리티의 추구라기보다 오히려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줍니다. 마치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장식품 같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궁정 취향의 '국제 고딕 양식'. 시모네 마르티니는 당시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에서 그 양식의 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천사가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는 이유
그런데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의 '수태 고지'에서 천사는 성모 마리아에게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건넵니다. 그런데 이 '수태 고지'의 천사는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백합은 그냥 물병에 꽂혀있을 뿐이죠. 시에나 출신의 시모네 마르티니. 아무리 '수태 고지'라고 해도 경쟁 도시였던 피렌체를 상징하는 백합을 천사의 손에 들리기는 싫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면 위대한 예술가도 이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국제 고딕 양식'의 작품들이 이어집니다. 서양 근대 회화의 시초로 평가받는 지오토의 '성 모자와 성인들의 초상', 시에나 화파의 또 다른 거장 암브로조 로렌제티의 '마리아의 성전 봉헌', 마사초와 그의 스승인 마솔리노가 (그들이 아직 브랑카치 예배당의 프레스코를 제작하기 전에) 그린 '성 모자 상' 등 중세의 정취가 여전히 남아 있는 성화들을 지나 같은 소재의 그림 두 편을 봅니다. 로렌초 모나코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3명의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수태 고지', '최후의 만찬' 등과 함께 성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로렌초 모나코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둘 다 '국제 고딕 양식'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그 화려함만으로도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우선 모나코의 그림은 동방박사 행렬의 화려한 색채의 옷차림에 눈길이 갑니다. 붉은색과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등 알록달록한 색채의 옷을 입은 인물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은 마치 패션쇼의 현장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반추상화처럼 간략하게 묘사된 붉은빛의 마구간 건물도 특이합니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동방박사의 경배'도 화려함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입니다. 우선 패널부터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황금빛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과 배경은 모나코의 그림에 비해서는 훨씬 더 자연스러운 색채와 사실적 묘사를 보여주지만 성인들의 광배(nimbus)와 동방박사 행렬의 옷차림과 장신구에 금박을 입혀서 화려함을 극대화했습니다. 얼핏 보면 인물들의 얼굴이나 신체 위에 금빛이 조각처럼 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한 동방박사의 행렬을 엄청난 인파로 묘사한 것도 눈에 띕니다. 주제의 본질보다는 주문자의 권력과 명예를 보여주기 위해 외면의 화려함을 추구했던 당시 회화의 경향이 잘 나타난 부분이지요. 이런 전통은 이틀 전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에서 만났던 다음 세대,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행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부분을 배제한다면,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예술적 성취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텐데 좀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패널 아래 부분의 소품 세 점은 자연주의적 묘사에 빛을 능숙하게 사용한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그림들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반짝이는 별들이 아름다운 왼쪽 그림, '예수 탄생'과 성 가족의 고난을 보여주는 중앙의 '이집트로의 도피'는 놓쳐서는 안 될 작품입니다.
어쨌든, 전에도 한 번 언급했지만, 국제 고딕 양식의 정점에 있는 이 작품,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동방박사의 경배'가 피렌체 사람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은 것이 마사초의 '브랑카치 예배당' 프레스코로 상징되는 르네상스 회화의 탄생 불과 몇 달 전이었다는 것은 서양 미술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끝으로 '국제 고딕 양식'의 숲을 벗어나 다시 르네상스로 가는 복도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좀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커다란 그림 한 편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파울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의 전투'입니다.
번쩍이는 창들과 석궁들, 빼곡히 들어선 말과 병사들이 벌이는 치열한 전투. 목각 인형처럼 쓰러진 말들.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이 그림은 1432년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있었던 전투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원래는 3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인데 나머지 두 작품은 각각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그림은 연작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베르나르디노 디 치아르다가 창에 찔리다'입니다. 제목처럼 시에나의 장군이 창에 찔려 쓰러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죠.
그런데 이 그림은 전투의 승패가 갈리는 절체절명의 순간보다 마치 창이 주인공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창들은 원근법을 위한 장치입니다. 자세히 보면 창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연히 화면의 뒤쪽으로 갈수록 창이 길이가 짧아지죠. 경쟁이라도 하듯 쭉쭉 뻗은 창의 길이와 각도를 활용한 원근법. 이것은 투시원근법과 기하학에 깊이 빠져 있었던 우첼로가 고안한 특유의 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기하학적 계산에만 너무 빠진 탓일까요? 우첼로의 작품은 화면의 통일이나 형상과 색채의 아름다움은 아예 배제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인물들이나 말들이 피가 통하지 않는 다면체의 목각 인형처럼 보입니다. 치열하고 역동적인 전투 상황인데도 모든 것이 마치 꿈 속의 한 장면처럼 정지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원래 눈에 보이는 대로의 자연스러운 화면을 묘사하기 위해 시작한 투시원근법이 오히려 이런 비현실적인 장면의 원인이 되었다니 아이러니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아이러니한 것은 우첼로의 이런 비현실적인 표현법이 약 400년 후 입체파나 초현실주의의 같은 현대 미술에 영감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정말, 인생은 짧고 예술의 길은 길고 먼가 봅니다.
우첼로의 그림을 뒤로 하고 별도로 마련된 다른 나라(이탈리아가 아닌) 작가들의 전시실로 향합니다. 나는 이 전시실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소름 돋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렘브란트'였습니다.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무후무한 황금시대를 열었던 17세기의 네덜란드. 그 네덜란드 예술의 중심에는 렘브란트가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17세기는 '렘브란트의 시대'였고, 그 시기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의 나라'였습니다. 내가 만일 다음 미술 기행을 준비한다면, 그것은 프랑스와 플랑드르 미술 기행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시실로 들어간 내 눈 앞에 그 렘브란트가, 그것도 젊은 시절, 중년 시절, 노년 시절을 묘사한 그의 '자화상'이 떡하니 나타난 것입니다. 그를 만나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또 돋아납니다.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특유의 어두운 배경 위에 투박하고 거칠게, 아무렇게나 터치한 것처럼 보이는 유화 물감. 어떤 장식도 없이 희미한 불빛 아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묘사한 가장 단순한 인물화.
하지만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에는 아름답고 자신만만한 20대 젊은 시절부터 점차 고통스러운 삶에 발을 담기 시작한 중년을 거쳐 삶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예술을 놓지 않았던 그의 정신이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예술이란, 예술가란 저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기 예술을 놓지 말아야 함을 렘브란트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술의 숭고함은 아름다움의 창조 이전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네덜란드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마치 렘브란트의 삶처럼 말이죠. 그런 점에서 수많은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한 인물의 자서전이며, 동시에 한 시대의 역사입니다. 이곳 '우피치 미술관'에서 뜻하지 않게 그 자서전과 역사의 일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렘브란트에게서 느낀 소름은 다른 외국인 작가들로 이어집니다. 엘 그레코도 만나고, 루벤스도 만나고, 브뤼헬 일가도 만나고, 반 다이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작품들의 재배치로 국제 고딕 양식에서 갑자기 외국인 작가 전시실로 넘어와 처음엔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수많은 대가들의 작품을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만나고 나니 또다시 '우피치 미술관'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이제 다시 본 전시실로 향합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라파엘로를 만날 차례입니다.
(8-5, '우피치 미술관' 5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