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귀중한 음식 재료다. 특히 가을에 접어 드는 이 시기는 고추의 진가가 두드러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요즘 시골 나들이 길에 나서면,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거나, 말리기 위해 마당에 널려져 있는 고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파란 가을 하늘과 대조되는 고추의 붉은 빛은 시골 풍경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먹을 거리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볼 거리로도 빠지지 않는 게 바로 고추다.
고추는 색깔만 강렬한 게 아니라 맛 자체도 '핫'하기 그지 없다. 사실 고추는 생김새와 색깔, 그 성질까지 여러모로 매우 독특한 작물이다. 생김새만 해도 유사한 작물이 거의 없다. 길다란 호박과 오이, 갓과 무청 등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데 반해 고추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작물은 없다시피 하다. 그런가 하면 고추는 다른 농작물에 비해 농약을 상대적으로 아주 많이 쳐야 하는 작물이다.
고추가 농약 신세를 많이 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병충해 때문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덥지만 건조한 아메리카 지역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여름철 날씨는 충분히 덥기는 하지만, 건조한 게 아니라 반대로 습기가 많은 탓에 병충해가 기승을 부리기 쉽다. 습도가 높은 날씨는 병충해 확산을 부추기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추를 맵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로도 지목된다.
고추는 왜 매워졌을까? 고추가 매운 작물로 진화한 연유 가운데 하나로 식물학자들은 '자위'를 꼽는다. 짐승이나 병충해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고추 열매가 매워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고추의 품종은 셀 수도 없이 많은데, 특히 매운 고추들은 상대적으로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는 추정도 있다. 습도와 고추의 맵기가 대체로 비례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추는 돈벌이가 되는, 이른바 대표적인 경제작물 가운데 하나다. 이는 뒤집어 얘기하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을 들여야 만족할 만한 수확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내와는 달리 남미 등에서는 야생 상태에서 자라는 고추도 수두룩한데 남미의 볼리비아 등이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지역에서도 물이 적은 환경에서 자라는 고추는 대체로 매운 맛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건조한 날씨에서는 병충해가 기승을 부리기 쉽지 않은 탓에 고추 또한 덜 맵게 적응한 것이다.
매운 맛의 대명사인 고추와 관련해 흔히 작은 '고추가 더 맵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릴 확률이 높다. 같은 품종으로 같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작은 고추라고 매울 리 없다. 특히 성장이 다 되지 않은 어린 고추라면 오히려 큰 고추보다 덜 매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환경이나 생육 여건이 달라져서, 고추가 크게 자라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좀 더 매울 확률이 높다. 생육 여건이 좋지 않다는 것은 병충해 등의 공격에 그만큼 취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고추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운 성분을 보다 맹렬히 합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운 고추를 즐긴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한국 음식이 대체로 더 매운 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매운 고추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고추가 월등 매운 편은 못된다. 한 예로 청양 고추가 매운고추의 대명사로 꼽히곤 하지만, 아메리카나 인도 등에는 청양 고추보다 훨씬 더 매운 고추도 드물지 않다.
덧붙이는 글 | 위클리 공감(korea.kr/gonggam)에도 실렸습니다. 위클리 공감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행하는 정책 주간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