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쟁점을 내세워 박근혜판 역사전쟁이라 할 만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것은 단순히 교과서의 발행을 단일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과서를 국정화한 다음에 새로운 역사관·세계관을 담은 역사책을 만들어 국민의 의식을 개조하는 것이 그의 진짜 의도로 보인다.
역사책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몰라도, 역사책에 새로운 역사관·세계관을 담는 것은 왕조를 창건한 건국시조들한테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건국시조가 아니라면, 적어도 건국시조에 준하는 위력을 가진 인물들이 흔히 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박 대통령은 대단한 것을 꿈꾸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역사전쟁에서 박 대통령은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역사책을 바꾸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를 새로 쓰는 것이든 역사책을 새로 쓰는 것이든 간에, 거기에는 일을 성사시키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이 있다. 박근혜 정권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지는 최근 시작된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를 시청하다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육룡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그 육룡은 아니다. <용비어천가>의 육룡은 세종의 여섯 조상을 의미한다. 드라마 속의 육룡은 이성계와 정도전을 포함해서 조선 건국의 무대에서 활약한 여섯 영웅이다. 드라마 속의 육룡에는 실제 인물도 있고 가상의 인물도 있다.
이성계·정도전, 건국 이후 역사책 새로 써
현재까지의 방영분을 기준으로 할 때, 드라마 속의 이성계·정도전은 세상을 새로 세울 목적으로 기성 정치권에 도전하고 있다. 이 도전의 결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성계·정도전은 쿠데타를 통해 고려왕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그렇게 기존 정치권을 무력화시킨 뒤에 조선왕조를 창업하게 된다.
이성계·정도전도 박근혜 대통령처럼 역사책을 새로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고려왕조의 실권을 잡았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을 추진하지 않았다. 기존 왕조의 실권을 잡았다고 해서 최종적 의미의 정치적 승자가 됐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새로운 역사책을 꿈꾸는 것은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정도전이 새로운 역사책의 편찬에 착수한 것은 1392년에 조선왕조를 건국한 뒤였다. 자신들의 승리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1392년 이후에 이들은 고려 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의 편찬에 착수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뒤에 비로소 자신들의 관점으로 고려 시대를 평가하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역사의 승자가 된 뒤에 역사서에 손을 댔던 것이다.
이성계·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정치적 승자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려사>에 담긴 내용의 상당 부분은 역사 왜곡 수준의 허위였다. <고려사>의 축약판인 <고려사절요>에 담긴 내용의 상당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이 점은 이들이 고려왕조를 한없이 격하시킨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몽골의 간섭을 받기 전에 고려 임금은 황제로 불리고 고려 수도도 경(京)으로 불렸다. 개경의 경(京)은 동아시아 관행상 황제의 도읍에나 붙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이런 점을 무시하고 고려를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이들의 고려 역사 왜곡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 그룹은 1388년의 쿠데타인 위화도 회군을 통해 우왕을 몰아냈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은 이성계 그룹의 적이었고, 우왕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성계 그룹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우왕에게 왕은커녕 제후의 권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고려사> 편찬자들은 고려왕들을 제후급으로 취급하여 이들의 역사를 세가(世家)로 분류했다. 본기(本紀)는 황제의 역사서, 세가는 제후의 역사서를 의미했다. <고려사> 편찬자들은 다른 고려왕들의 역사는 세가로 분류하면서도 우왕의 역사는 세가가 아닌 열전으로 분류했다. 열전은 왕 이외의 인물에 관한 전기 혹은 위인전이다. 우왕은 14년간이나 임금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새로운 역사책을 만드는 기회에 우왕을 왕이 아니었던 사람으로 격하시켜버렸다.
조선 건국 주역들이 고려 역사를 왜곡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들의 거친 질주를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새 나라를 세울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승자에게는 역사를 새로 쓸 권리가 있다. 승자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인정하든 안 하든 간에, 승자들은 그런 권리를 행사한다. 이성계·정도전을 포함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역사를 바꿀 정도의 정치적 승리를 획득했기 때문에 역사책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승리를 거둔 적이 없다
박근혜 정권이 추진하는 역사 새로 쓰기는 한국사의 발전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0·26 이후에 아버지의 부하들이 아버지 시대의 유신 정치와 선을 긋는 것을 보면서 세상과 정치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시급할 수밖에 없다.
그런 박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만들 국정 교과서에 담길 역사관은 1961~1979년 시기에나 어울릴 만한 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룩한 민주적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세계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역사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역사책이 이 정도로 바뀌려면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선행되는 게 이치에 맞다. 건곤일척의 정치투쟁에서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해 세상이 바뀔 정도의 변화가 이뤄진 뒤에야 역사책을 새롭게 쓸 수 있는 것이다.
역사교과서가 바뀐 뒤에 역사가 바뀌는 게 아니다. 역사가 바뀐 뒤에 역사교과서가 바뀐다. 이성계·정도전도 역사교과서를 바꾼 뒤에 역사를 바꾸지 않았다. 역사를 바꾼 뒤에 그 여세를 몰아 역사책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그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집권세력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이 희망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갈수록 진전되고 있고 복지사회를 향한 움직임도 점점 더 진척되고 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도 이런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는 여기에 편승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진보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은, 대한민국의 국가 의사를 결정하는 국회의원들의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새누리당의 선배 정당들에 맞서 싸운 광주항쟁과 6월항쟁의 주역이나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회 의석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이런 상태는 1979년 이전의 정치상황과 너무나도 판이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명령 하나만으로 대한민국의 역사관·세계관을 1979년 이전으로 획일화시키려 하고 있다. 국회 내의 정적들은 물론이요, 사회 곳곳에 만연한 진보의 표상들을 상대로 명확한 정치적 승리도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교과서부터 바꾸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모습은 새로운 나라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나라의 역사교과서부터 쓰려는 시도에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은 이성계·정도전이 고려도 멸망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새로 쓰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이성계·정도전은 그런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가능성도 없는 일이지만, 지혜로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도는 성공보다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박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 당선을 위대한 정치적 승리로 간주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역사교과서를 새로 쓸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승리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보면 작은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 승리는 전두환도 거뒀고 노태우도 거뒀다.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생소한 이름의 왕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왕이 되는 것은 그 개인에게는 위대한 승리일지 모르지만, 국가 전체나 역사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박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도 먼 훗날에는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박 대통령은 역사서 개조에 필요한 기본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와 진보의 흐름을 이끄는 거대한 힘을 상대로 아무런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책을 새로 쓰려 하고 있으니, 박 대통령의 도전은 대단한 오만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박 대통령이 역사책을 전면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청와대에 앉아서 대한민국을 합법적으로 통치할 게 아니라 광화문광장으로 나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불법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 거기서 승리를 거둬 사실상 새로운 나라를 세운 뒤에야 역사책을 새로 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