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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라는 말이 실감 났을 때는 가볍게 생각했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을 때다. 지난 10월 17일 내가 그랬다. 한 달이 지났지만 설악산 산행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움츠러든다.

1박(차 안에서 1박) 3일로 설악산과 오대산 산행을 하기위해 광주에서 오후 9시에 출발했다. 첫 날 산행은 설악산. 산행코스는 오색약수터-대청봉-희운각대피소-공룡능선-마등령-금강굴-비선대-설악동. 19.5km. 산행 시간은 13시간이 주어졌다.

새벽 4시 50분.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설악산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을 오르기 시작한 시간이다. 그런데 출발부터 당황스런 일이 생겼다. 가을 새벽 산행에 기본인 랜턴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출발할 때는 산악회원들과 같이 산행을 시작해서 불빛을 따라갈 수 있었다. 게다가 6시쯤 되니까 동이 트기 시작해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하산 길에 어두운 큰 그림자가 숨어 있는 줄 알지 못했다.

 동이 트기 시작한 설악산
 동이 트기 시작한 설악산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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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어둠 속에서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단풍, 바위, 새소리, 바람소리, 일출을 준비하는 붉은 하늘이 가을 합창을 한다. 가파른 길과 계단을 5km를 오르니 대청봉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표지석에서 인증샷을 찍으려는 것이다.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맘이 1078m에서도 붐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이나 표지석 옆에 서 있는 사람 모두 행복한 모습이다.

 탁 트인 동해 앞 바다를 큰 숨으로 보듬고 한 컷
 탁 트인 동해 앞 바다를 큰 숨으로 보듬고 한 컷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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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1년에 와서 찍은 사진이 있어서 대청봉 정상에서 인증샷은 포기했다. 대신 탁 트인 동해 앞 바다를 큰 숨으로 보듬고 단풍잎과 기암괴석들이 가을 애기를 하고 있는 설악산 속으로 들어갔다.

대청봉에서 2.7km를 가면 희운각 대피소다. 11시에 도착했다. 사업장에서 문제가 생겨 전화로 해결하다 보니까 예상 시간보다 30분 늦었고 그래서 처음 함께 출발한 회원들과 떨어져 점심도 혼자 먹었다. 희운각대피소를 지나면 우리나라 사람 1%만이 가봤다는 공룡능선이 시작된다.

 가파른 길을 올라 바위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파른 길을 올라 바위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들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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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km 급경사를 오르내리며 간다. 가슴이 바위에 닿을 듯 가파른 길, 밧줄을 잡고 오르내리는 길, 급경사 내리막 길, 말 그대로 산행의 종합세트다. 그래서 설악산 공룡능선을 가봤다면 산력을 인정한다.

 설아산 기암괴석1
 설아산 기암괴석1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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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아산 기암괴석2
 설아산 기암괴석2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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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아산 기암괴석3
 설아산 기암괴석3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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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사이로 숨어있는 바위도 찍고 당당히 서서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기암괴석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았다. 그날 찍은 사진이 145컷. 사진 찍는데 소요된 시간도 어림잡아 40여 분은 될 것이다.

그런데 마등령 삼거리 2km 지점에서 아껴 마셨지만 가지고 간 물 두병이 바닥을 보인다. 장거리 산행에서 물은 생명수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물을 얻어 마실 수 없다. 목은 타들어가고 배도 고파왔다. 가까운 산에 갈 때도 초콜릿을 챙겨 가는데 이날은 한 조각도 가져가지 않았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많이도 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배낭에 점심 때 먹고 남은 계란말이만 있었다. 허기진 배에 반찬용 계란말이는 조금 요기가 되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갈증이 더 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 구걸, 아니 생명수를 구걸했다. 반병을 얻어 입술만 축이며 걸었다.

마등령 삼거리. 오후 3시. 비선대까지는 3.5km. 평상시면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런데 몸에 기운이 없어져 갔다. 빈 물병을 몇 번을 빨았을까. 300미터 이상을 걸을 수가 없었다.

 당당히 서서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기암괴석
 당당히 서서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기암괴석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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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대 1.5km를 남겨 놓고 너른 바위에 배낭을 멘 채 누웠다. 정말 편했다. 그리고 기분도 좋았다.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정신을 더 내려 놓았으면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게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얘기 소리에 눈을 떴다. 그때부터 겁이 나고 두려움이 내 몸에 엄습해 왔다. 셀 수 없이 산을 다녔지만 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비선대 900m. 오후 6시. 음력 9월 5일. 안내 푯말이 희미하게 보인다. 100m도 걷기 힘들다. 아름다운 설악산에 무서운 어둠이 까만색으로 색칠해갔다.

스마트 폰도 배터리가 없어 손전등 앱을 이용할 수 없었다. 급경사인 돌길이 어둠이 깔리면서 점점 평평한 길로 보인다. 더듬더듬 길을 찾아 내려가는데 갑자기 50여 미터 앞에서 불빛이 보였다.

"여기요. 저랑 같이 가주세요."

입 안이 말라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는지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갔다. 다시 온 힘을 다해 큰 목소리로 불렀다. 불빛은 나를 향해 왔다. 어둠을 밝히는 생명의 불빛이었다. 그 분은 30분 전에 친구들하고 술 한 잔하고 막 출발했다는 것이다.

비선대에 6시 40분에 도착했다. 3.7km를 3시간 30분 걸린 것이다. 비선대까지 함께 동행해준 분께 캄캄한 밤이지만 모자를 벗고 감사의 큰 절을 했다. 비선대에서 설악동까지는 3.2km. 비선대에서는 암벽등반을 하고 설악동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 동냥 불로 설악동까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걸었다.

드디어 설악동 버스 택시 승강장. 오후 7시 50분. 산악회 회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기사님 00펜션으로 가시는데 가면서 제일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나 슈퍼에 잠시 들렀다 가주세요. 제가 탈진이 심해서요."

5분 뒤에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산에서 제일 마시고 먹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맥주 한 캔에 초콜릿이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술과 초콜릿일 것이다. 펜션에 도착하자 모두 기립박수로 환영해줬다. 히말라야 정상을 등정하고 온 산악인처럼.

 하얀 눈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준비하고 있을 설악산
 하얀 눈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준비하고 있을 설악산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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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설마'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는 일이 많다. 하얀 눈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준비하고 있을 설악산. 앞으로 남은 내 삶에 큰 스승으로 남을 것 같다. 어두운 길을 비춰주신 그 분께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월간잡지 첨단정보라인 12월호에 게재합니다.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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