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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수업'은 미국 최초로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그의 삶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해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 말

동석한 안내원과 함께 벤츠에서 내리니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모습의 호텔이 눈앞에 들어왔다. 2~3 시간 만에 생판 다른 세상을 접하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호텔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외부나 내부 모두 고급스러워 보였다. 식당으로 안내되어 잠시 앉아 있노라니 50세쯤 되어 보이는 중후한 외형의 남성이 나타나 나를 반갑게 맞았다. 정부의 접대위원회 부위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남성은 한식과 양식이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 입맛에 맞게 무엇이든 주문하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나는 가족들의 근황부터 듣고 싶어 그 남성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내 의중을 알고 있다는 듯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 두분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모두 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도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예, 6개월 전에 돌아가셨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머뭇거리며 그가 던진 말에 피가 아래로 쏴악 쏟아지는 듣했고 온 몸의 힘이 빠져버렸다. 당시의 절망감을 무슨 말로 표현할 것인가. 미국에 남겨진 가족들과 생이별을 할 각오로 평양을 방문했고, 어머님에게만은 내 얼굴을 꼭 보여주고 싶어 내달려온 길이었다. 캐나다 한인신문에 나를 찾는다는 광고가 1년 전에 났으니 좀더 빨리 소식이 닿았다면, 아니 그보다 내가 먼저 연락을 했더라면 어머님을 뵈올 수 있었을 것이다.

43년 만에 찾은 북한, 어머님은 없었다

 ▲ "내 아들 도원이는 틀림없이 살아 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는 어머니는 내가 평양에 발을 디디기 6개월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진은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가족들로부터 받은 어머님 회갑 사진.
▲ "내 아들 도원이는 틀림없이 살아 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는 어머니는 내가 평양에 발을 디디기 6개월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진은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가족들로부터 받은 어머님 회갑 사진. ⓒ 한도원

뭐라 말할 수 없는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고 모든게 귀찮게 여겨지면서 당장이라도 북경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멍한 표정으로 긴 한 숨을 내쉬고 있는 내 모습에 당황스런 표정을 짓던 그 남성은 "곧 동생이 이곳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나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때 식당문을 열고 한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아버지를 본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그는 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닥아온 그가 속사포처럼 말을 걸어왔다.

"형님, 저 도준이 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럼 그럼, 알아보고 말고!"


나보다 네살 아래인 막내 동생을 나는 금방 알아보았다. 내가 16세 되던 1947년 8월 14일 초저녁에 홀로 남행길에 나섰을 때, 막내는 물론이고 다른 동생들과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었다. 내가 떠난 다음날 큰형이 집에서 사라진 사실을 알고 그는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고, 이제나 저제나 큰형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었다. 막내는 유명 공대를 나와 평양의 정부기관 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한다고 했다.

나를 찾는 광고지에 적힌 가족사항을 보고 어느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나머지 동생들도 모두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잘 살고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내 밑으로 두명의 남동생과 네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바로 밑의 남동생과 넷째 여동생은 둘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어 있었고, 둘째 여동생은 간호사가 되어 있었다. 첫째 여동생과 막내 여동생은 회천에서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어서 빨리 동생가족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당장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는 없었다. 안내원은 열흘 남짓한 나의 방문 일정을 차질없이 진행하려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동생들과도 일정을 맞추고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초청장을 긴급 발급해서 가족을 만나게 해준 당국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미리 짜여진 관광일정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 김일성 주석 생가와 묘지 등을 방문하고 오후에는 북한의 자랑거리 중 하나라는 평양산부인과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산아제한과 피임약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사실을 고려한 자연스런 일정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북한의 의료시설을 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어서 유심히 시설들을 살펴 보았다. 병원 시설은 외부 건물이나 내부 시설 등에서 예상보다 훌륭했다. 독일 등 유럽에서 들여온 최신시설 등은 미국에서도 보지 못한 것들이어서 내심으로 상당히 놀랬던 기억이 난다.

셋째날은 모란봉과 을밀대를 거쳐 규모가 웅장한 도서관과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박물관을 방문했다. 생각보다 다양한 국내외 서적들이 소장된 도서관과 이런 저런 유물들이 잘 정비·전시된 박물관에서 오랜만에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전란후 혼란이 계속되던 1955년 남한을 떠나온 이후 내가 나고 자란 땅의 역사유물들을 시간을 갖고 찬찬이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어렷을적 북한 저 꼭대기 소도시에서 살며 막연하게나마 동경하며 구경하고 싶었던 곳들을 구경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흘째 되던 날, 드디어 나는 신의주에서 산다는 둘째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나섰다. 회천과 의주에서 사는 여동생들이 신의주로 모인다고 했다. 기차편을 이용하여 평양에서 신의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구불구불 오르막 내리막 길을 달렸고 여러 개의 터널들을 통과했다.

차창밖으로 수없이 흘려 보내는 전봇대가 낮익고 정겨웠다. 농촌 마을의 모습들은 얼핏 옛날 내가 살던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곳곳에 막 추수가 끝난 논에 쌓여있는 볏단과 비탈진 산에 묶여 세워진 수수단, 낙옆이 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낸 산야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연신 창밖으로 펼쳐졌다.

"한씨네집 장손 이제 돌아왔네!" 동네잔치

신의주에 도착한 것은 어둑어둑한 저녁무렵이었다. 기차에서 내리니 이번엔 볼보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도지사급 간부나 타는 차량이라고 했다. 여하튼 북한당국은 처음부터 나를 특별대우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흘이 지나면서부터는 처음 가졌던 경계심이 풀리며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더구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지레 들뜬 기분이 들며 찌뿌둥 하던 몸에 활기가 돌았다.

일단 신의주의 한 호텔에 여장을 푼 즉시 둘째 여동생 집으로 향했다. 벤츠를 타고 동생이 산다는 집 앞 골목길에 들어서니 저 만치 대문을 활짝 열어둔 집에서 일단의 여자들이 울타리 밖으로 우르르 달려 나왔다. 동생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모두가 옷을 잘 차려 입고 있었다.

"도원이 오빠! 내래 첫째 도자라요!"
"제가 둘째 정자라요! 오빠 찾는 신문 광고지 앞줄에 쓴 글 보셨지요? 내래 작성한 거라요."
"저는 세째 증자라요!
"저는 막내 금자라요!"
"그래 그래, 잘들 있었지? 미안하다, 미안하다. 오빠가 너무 늦게 왔지?"


마당에 들어서자 음식 냄세가 코를 찔렀다. 마루에서부터 안방까지 이어진 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여동생 가족들을 비롯한 친척들이 주욱 둘러서서 나를 기다렸다. 맏이가 한 사람씩 소개했으나 건성건성 악수를 하거나 손을 잡는둥 마는둥 어색하게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그렇게 많은 친척들이 있었다는 것에 새삼 놀란데다, 친척들과 한꺼번에 인사를 나눈 경험이 단 한번도 없었던 터여서 자연스런 표정과 행동이 나올 수 없었다.

동생 가족들과 친척들이 밥상에 빙 둘러 앉은 가운데 숟가락을 들자니 불현듯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1947년 8월 14일 저녁, 나는 집 마루에 걸터 앉아 어머니가 차려준 마지막 저녁을 먹었다. 허리춤에 돈전대를 둘러차고 등짝에는 배낭을 둘러맨 채 후더덕 후더덕 저녁을 먹던 나에게 어머니는 "얘야, 천천히 먹거라" "이것도 좀 먹거라, 저것도 좀 먹거라" 그러셨다. 온통 남쪽으로 출발할 트럭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아참, 일없시요!" 라고 말하며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후창강가로 내달렸다. 밥술을 뜨는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목이 잠겨 왔다.

여동생들의 말을 들으니 아버지가 십 수년 전 세상을 떠난 이후로 어머니는 곽산에서 의사일을 하고 있는 바로 손아래 동생 도연이 집에서 주욱 살았다고 한다. 성격이 무던하고 착한 성품의 도연이는 나 대신 장남 장손 노릇을 하며 집안 대소사를 처리하며 부모님을 모셨고, 부모님 산소도 도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도연이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의 큰 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마다하고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의사로 일하겠다며 곽산 인근의 작은 병원에 정착했다고 한다.

어머니 묘역에 바로 설 수 없었다

 평북 곽산에서 의사일을 하고 있던 바로 손아래 동생 도연이 집 뒷마당에서. 도연이와 여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평북 곽산에서 의사일을 하고 있던 바로 손아래 동생 도연이 집 뒷마당에서. 도연이와 여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 한도원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신의주에서 도연이가 산다는 평북 곽산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정부에서 내준 볼보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함께 밤을 지샌 여동생들이 동행해 주어 덜 지루했으나 비포장 도로가 많아 먼지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채 달려야 했다. 우리는 하루종일 달리고도 저녁 늦게서야 도연이 동생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동생이 산다는 동네의 어귀에 이르니 갑자기 불빛이 환하게 비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온 동네 사람들이 길 어귀에서부터 동생의 집까지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멈춰서고 차에서 내리자 잠시 정신줄을 놓칠 정도로 동네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문을 향해 가자 팔짱을 끼고 섰던 동네사람들이 한마씩 했다.

"아이고, 한씨네집 장손이 이제서야 돌아왔네!"
"미국에서 크게 성공했다는구만!"
"쯧쯧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건강한 구리빛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맞은 도연이는 "형님, 왜 이제서야 오셨습네까"라며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의연하고 담담하게 대했다. 어느덧 흰머리가 히끗히끗 보였으나 큰 아들을 내 앞에 소개하며 "장손 노릇할 놈을 만드느라 고생좀 했시요!" 그러며 농담까지 했다. 식사를 하는 중간 중간 도연이가 살아온 이력을 듣다 보니 어머님도 행복하게 생을 마치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대신 장남 노릇을 하며 부모님을 끝까지 모신 도연이와 그의 처에게 거듭 감사하는 마음을 표했다.

 평북 곽산에 사는 도연이 동생 집을 방문했을 당시 동생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바로 아래 동생인 도연이는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농촌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평북 곽산에 사는 도연이 동생 집을 방문했을 당시 동생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바로 아래 동생인 도연이는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농촌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 한도원

그날 밤, 나는 누이동생 가족들과 딸린 친척들로 더불어 늦도록 통음을 했다. 누이동생들이 준비해온 개성 인삼주와 내가 사 들고온 위스키를 다 비울 정도로 많이 마셨으나 왠지 크게 취하지 않았다. 모두들 각방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거나 떠난 후에 잠시 대문밖에 나오니 찬 바람에 초승달이 동편 하늘 저편에 비쭉이 떠 있었다. 증자 동생이 나를 따라 나와서는 달을 보고 멍하니 서 있던 내게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오빠, 괜찮갔시요?"
"뭐가?"
"그렇게 찾던 오마니도 못 보구서리…"
"그만 하거라. 이제와서 어쩌겠나"
"노동신문에 오빠 이름이 나오고서부터 오마니는 하루 한날도 오빠를 찾지 않은 날이 없써시요."
"…"


 부모님 묘역을 방문했을 당시 아버님 묘지 앞에서 동생 가족들과 찍은 사진
부모님 묘역을 방문했을 당시 아버님 묘지 앞에서 동생 가족들과 찍은 사진 ⓒ 한도원

다음날, 나는 동생이 사는 동네 인근 야산에 자리잡고 있던 부모님 묘소를 방문했다. 묘소는 양지바른 곳에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고 비석까지 세워져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간 위스키를 묘지 둘레에 뿌리고 아버님께 먼저 절을 올렸다. 무려 43년 만의 귀향 인사였다.

그런데, 어머님 묘앞에선 묘비를 바로 보고 설 자신이 없었다. 처음 평양의 호텔에서 북한 접대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남성으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냥 낙심만 한 게 아니었다. '맥이 풀려 버렸다'는 경험을 그때처럼 절감한 적이 없었다. 어머님에 대한 크나 큰 그리움은 일순간 삭아서 재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이후로 나는 가슴이 뻥 뚫인 기분으로 여기저기 관광을 해야 했고 동생집을 방문하고 음식을 삼키고 술을 마셨다.

겨우 어머님 묘비 앞에에 서자 의외로 담담한 마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어머님의 묘지를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공허감과 죄책이 뒤섞인 그때의 감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 것인가.

내년 여름이면 수업을 끝내고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장남을 떠나 보내셨던 어머니는 '묘소'라는 흔적만 남긴 채 젊은날 머리 빗긴 당신의 모습처럼 아버지 곁에 단정하게 자리잡고 계셨다. 나는 눈을 내리 깔고 어머님께 나직하게 귀향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공부를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술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우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시던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살라고 하신 삶을 가득, 꽉차게 살아 냈습니다."

나흘 후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수를 돌린 비행기가 상공에 높이 떠올라 저 아래로 북녘땅이 아득히 멀어지자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쏟아졌다. 43년 동안 단 한 번 울고 그쳤던 눈물이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한도우#끝나지 않은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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