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 이루어놓은 일들, 고통과 기쁨, 슬픔을 정리하고 싶었다. … 우리는 이 기록이 우리들만의 자족적인 의미를 넘어 하나의 기록으로 세상 앞에 내놓는다. 밀양송전탑 투쟁은 반드시 '정의'와 '진실'의 궤도 위에 올려놓고 저들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엄정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하고 싶다."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가 <밀양송전탑 반대투쟁 백서, 2005~2015>와 사진집 <밀양, 10년의 빛>을 펴내고 밝힌 말이다. 최근 밀양대책위는 10년 투쟁의 기록을 담은 백서와 사진집을 내 배포했다.
백서는 650쪽에 걸쳐 그동안 벌어진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고, 사진집은 260쪽에 걸쳐 카메라에 잡힌 주민들의 삶과 싸움을 생생하게 담아놓았다.
"한전과 정부는 주민 몰래 사업을 꾸렸다"밀양송전탑 공사는 2000년부터 시작되었다. 정부와 한국전력공사는 신고리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력을 경남 창녕에 있는 북경남변전소까지 가져가기 위해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로 공사' 사업 계획을 세웠다.
밀양대책위는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 약사'를 통해 "한전과 정부는 주민 몰래 사업을 꾸렸다"고 했다. 이들은 "2000~2005년 사이, 정부와 한전이 밀양 주민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사업을 추진했고, 밀양시 등 관계기관과도 협의를 마친 상태였으며, 주민들만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며 "이러한 주민 배제와 비밀주의가 이 투쟁을 10년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백서에는 '주민 투쟁 시작과 대책위 구성', '정부-한전 등과 협의체 구성', '보상제도 개선위원회와 현장 투쟁', '주민 분신 자결', '행정대집행' 등 과정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백서에는 밀양 구간의 송전선로 변경 과정에 지역 권력자가 개입한 정황도 언급해 놓았다. 밀양대책위는 "노선별 재점검하여 주로 산지를 통해 계획되었던 노선이 단장면, 부북면 등 상당 부분 하향함으로써 마을에 더 근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2012년 산외면 보라마을 (분신 자결한) 주민의 근본 원인 중 하나가 권력자의 토지를 비켜가기 위해 노선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라는 주민들의 증언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노선 변경되면서 철탑 숫자도 늘어났다. 밀양대책위는 "한전이 밀양시에 보낸 '송전선로 지장유무 조회'라는 공문에 보면, 선로 길이와 철탑이 85.9km, 157기라고 되어 있다"며 "공사 시작 이후에는 길이 90.535km, 철탑 162기로 되어 있다. 경과지가 변하지 않는 이상 송전선로의 길이가 변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백서에는 에너지 정책의 문제점도 지적해 놓았다. '갈등조정위원회 구성'과 '제도개선추진위원회와 보상협의회', '후쿠시마 사고', '전문가협의체', '송주법' 등의 과정과 문제점을 낱낱이 기록해 놓았다. 특히 백서에는 전문가협의체에서 나온 위원들의 발언도 일부 속기록에 근거해 공개해 놓았다.
전문가협의체 활동에 대해, 밀양대책위는 "정부와 한전의 사업 강행에는 아무런 합리적 이유도 결여된 사업을 강행하는 자본의 막무가내식 욕망만이 원초적으로 작동하며 그 속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의 원리는 조금도 작동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해놓았다.
주민들의 인권침해도 심했다. 백서에는 주민들이 공권력으로부터 받은 인권침해 사례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다. 특히 언론 보도에 대해, 밀양대책위는 "주요 언론 대부분은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오히려 문제점을 소극적으로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은폐, 왜곡하고, 사안의 본질에서 벗어난 피상적인 측면만을 강조해 보도했다"고 비판했다.
주민들은 건강권도 침해 당했다. 밀양대책위는 "주민들에 대한 건강권 침해는 이제 제2막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며 "2014년 6월 행정대집행 이후 주민들이 도합 250회에 걸쳐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는 사실과 주민들이 송전 소음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지금도 호소하고 있다. 한전과 정부는 '건강과 재산피해 실사 기구 구성'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마을공동체 파괴, 실태파악과 진상조사하라"밀양송전탑으로 인해 가장 큰 아픔은 마을 공동체 파괴다. 찬성과 반대 주민으로 나뉘었고, 그 아픔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백서에는 11개 마을마다 벌어졌던 공동체파괴 상황을 까발려 놓았다.
밀양대책위는 "불신의 터전 위에 밀양 주민들은 계속해서 주민간 사법 분쟁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마을은 이제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분열되었다. '돈(보상)'으로 마을공동체를 분열시킨, 수백년 이어져 내려온 마을을 철탑으로 찢고, '돈'으로 다시 한번 찢어낸 그 죄에 대한 책임을 한전과 정부에서 져야 한다. 실태파악과 진상조사하라"고 촉구했다.
또 백서에는 집시법 위반과 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법정에 섰던 주민들이 했던 '최후진술'과 농성장에서 주민들이 썼던 글, 손희경·박순연·정임출(위양마을) 할머니의 육필편지와 탄원서도 사진과 함께 실어 놓았다.
밀양 송전탑 반대주민 193세대 302명은 한전의 보상을 거부하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백서에는 이 주민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다. 밀양대책위는 이 주민들에 대해 "10년의 세월, 거짓과 회유, 분열과 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 오신 자랑스러운 이름들"이라 소개했다.
밀양대책위 공동대표 김준한 신부는 발간사에서 "난공불락의 폭력적인 한반도의 에너지 정책은 힘 있는 정부, 힘 있는 국회, 힘 있는 단체 누군가의 힘이 아니라 가장 소오된 어르신의 저력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고 저는 단언한다"며 "무엇보다 그저 10년을 버텨온 것이 아니라 의연히 먼저 떨쳐 일어나 치고 나온 어르신들의 투쟁에 감사드린다. 이어질 10년은 더 아름답고, 더 즐겁게 지치지 않고 싸워나가길 기원한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외친다. 핵발전소 필요없다 송전탑 백지화하라"고 말했다.
밀양대책위는 백서 800부, 사진집 1000부를 제작했고, 판매해 송전탑 반대 투쟁 기금으로 쓰기로 했다. 밀양대책위는 오는 26일 오후 밀양 삼문동문화체육회관에서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10주년 기념 문화제'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