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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친구 중에 시청각 장애인이 있다. 시청각 장애는 말 그대로 시력과 청력을 동시에 잃은 장애인을 말한다. 그런데 거동이나 일상생활이 불편할 거라는 나의 생각과 달리 그는 늘 밝고 긍정적이다. 그의 말과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며칠 전 그와 만나 잔을 기울였다. 전에는 내가 술잔을 채워 그의 손에 쥐어주면 받아 마시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김 형, 오늘은 내가 따라주는 눈물주 한잔 마셔볼래?" 그러더니 그는 자신의 아래 속눈썹에 술잔을 바짝 들이대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 술잔에 술이 넘치기 직전에 따르던 동작을 멈추고 그 잔을 내게 권했다.

아타카마사막을 건넌 후 안데스산맥이 보이는 산티에고에서
▲ 시각장애인 이용술씨와 함께 아타카마사막을 건넌 후 안데스산맥이 보이는 산티에고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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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 형, 이게 바로 눈물주라는 거야." "이거 아무한테서 받아 마실 수 없는 아주 귀한 술이거든." "술맛이 기가 막힐 거야."

그는 말을 이어갔다. "김 형, 그래도 나는 행복한 편이지?" "술잔을 이렇게 눈에 바짝 들이대면, 넘치지 않고 술을 채울 수 있거든."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는 들을 수 있잖아."

그가 따라준 눈물주는 술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명약이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불평과 좌절의 질환을 앓는 이들의 치료제였다. 그를 만나면 나는 내 몸이 건강한 것에 감사한 것을 넘어 긍정의 힘을 배운다.

2003년 사하라사막에서
▲ 내가 간 길이 또 다른 길이 되었다 2003년 사하라사막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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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사막 믹듄을 오르는 능선에서
▲ 한계는 넘어서라고 존재하는 경계다 사하라사막 믹듄을 오르는 능선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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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처음 시작이 힘들다. 더구나 도전과 모험의 길은 고독하고 때론 두려움까지 따른다. 주변의 만류와 비아냥도 감수해야한다. 그 길이 가능한 길이든 불가능한 길이든 남이 가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막으로 향할 때 나이와 체면 그리고 남의 시선까지 내려놓고 떠난다. 삶의 가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니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003년 4월 북아프리카 모로코 지역의 사하라사막, Marathon Des Sables 레이스 4일째, 무박 2일 동안 82km의 롱데이 구간을 달리다 사막의 밤 한가운데서 졸음에 취해 길을 잃었다.

길목을 가로막는 거대한 모래산, 빅듄들이 대형버스와 기와집으로 변해 번갈아 다가오며 나를 위협했다. 불안이 나를 망친다는 걸 알았다. '그래, 나의 길을 가자.' 두려움 보다 나의 한계치를 높여 듄의 정상을 향해 치고 올랐다. 나를 비우니 사하라가 나를 품어 주었다. 다시 평온을 찾은 새벽녘, 지난밤에 겪은 공포감을 위로 받기도 전에 여명이 밝았다.

호주 산야 530km 주로에서
▲ 전세계 23명의 전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호주 산야 530km 주로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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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아웃백 530km 레이스 중에
▲ 때론 고통마저 순응해야 할 때가 있다 호주 아웃백 530km 레이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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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ack Outback Race, 2011년 5월 지구상 23명의 최강자들이 모여 열흘 밤낮 호주의 산야 530km를 달려 울루루Uluru로 향했다. 대륙은 살을 태우는 자외선과 후끈한 지열을 쉼 없이 토해냈다.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몸은 부서지고 내 안에는 생존을 위한 본능만 꿈틀거렸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발을 디딜 때 마다 면도칼로 긋는 듯한 고통이 발바닥에서 전신으로 전해오면 모든 의식과 잡념까지 무너져 내리게 했다.

레이스 둘째 날부터 부풀어 오른쪽 발가락 물집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비장한 결의도 작은 물집에 맥을 추지 못했다. 상황을 반전시킬 대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 대응하는 거다. 이조차 기꺼이 즐기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자 고통에서 자유로워졌다.

외려 물집이 커지고 발톱이 죽어 흐물거리자 고통을 넘어 오로지 레이스라는 점 하나에 집중됐다. 처음 생긴 작은 물집은 나를 아프고 힘들게 했지만 커진 물집은 나를 긴장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 배낭은 흔들리는 나를 지켜준 중심축이었다
▲ 어깨는 찍어 누르는 배낭 그 배낭은 흔들리는 나를 지켜준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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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니사막에서
▲ 나는 지구의 끝 경계에 섰다 우유니사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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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3일 동안 고도 5천m가 넘는 볼리비아 알티플라노 고원지대를 넘어 우유니사막 한가운데 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유니사막은 달리고 달려도 매 그 자리에 있었다.

The Ultra BOLIVIA Race 171km, 내일을 위해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오직 나의 한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눈앞에 맞닥뜨린 생과 사의 문제에 더 치중해야 했다. 소심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잠재의식을 연신 흔들어 깨웠다.

인생이 그렇듯 오지레이스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매번 장엄한 대자연을 벗 삼아 화려한 레이스가 펼쳐지지만 혹독한 대가에 비해 완주의 기쁨과 여운은 너무 짧다. 어깨의 배낭은 늘 나를 힘들게 했다. 허리를 압박하고 발바닥을 물집으로 부르트게 했다.

그런데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배낭은 무게는 줄여가며 필요한 물과 식량을 주었다. 주저앉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배낭은 더 빨리 가려는 내 발목을 잡은 게 아니라 나를 지켜준 중심축이었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알았다.

이집트 사하라사막에서
▲ 아! 빅듄, 넘어선 자에게는 희망의 언덕이었다. 이집트 사하라사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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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아웃백 530km 레이스 중에
▲ 결승선을 앞에 둔 완주자의 여유 호주 아웃백 530km 레이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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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역경에 처할 때, 자신을 둘러싼 환경 모두를 불리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눈물주의 주인공처럼 고난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사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힘과 약이 된다. 약이 몸에 쓰듯이 역경은 잠시 몸을 힘들게 하고 마음을 괴롭지만, 그것을 잘 참고 잘 다스리면 많은 이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채근담 中)

지금 혹시 자신의 처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고민으로 가득하지 않은지. 긍정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지만 나에게 있어 긍정은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다. 경기 때 마다 길을 잃고, 피할 수 없는 물집의 고통과 배낭의 하중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했기 때문이다.

긍정은 내가 처한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노력이다. 내 신체가 건강한 것, 무사완주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게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I'm still here.
▲ 나는 언제나 그 곳에 있다 I'm still here.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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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사막레이스, #오지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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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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