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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한 달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 둘러본 뉴욕, 거기서 듣고 본 경험담을 늦었지만 담고자 한다. 뉴욕은 골목마다 작은 축제가 일어나는 도시, 800개의 언어가 소통하는 다인종 다문화의 도시, 세계금융을 좌우하고 세계미술을 대변하는 도시다. 하지만 그 화려한 빛만큼의 어떤 곳은 사진 찍기가 민망할 정도로 황량한 어둠이 서린 도시이기도 하다. 이런 두 얼굴을 가진 뉴욕을 미술과 연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백남준 탐색기사 후반부를 쓸 무렵, 나는 무심결에 백남준이 "날 더 알고 싶으면 뉴욕에 한 번 와 봐"라는 환청을 들은 것 같다. 내 친구 시인이 뉴욕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자극을 받아 백남준 원고의 알찬 마무리를 위해 그의 작업실과 관련 인사 등등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서 뉴욕을 가기로 결심을 했다.

항공료를 줄이는 방법을 모색하다 캐나다 큰댁형 집에 일주일 머문 후 뉴욕으로 들어가는 일정을 잡고 5월 27일 오후 5시 인천공항을 떠났다. 뉴욕에서 잠자리는 페이스북 친구 김세진 작가의 소개로 미국 작가 '로드니 딕슨(R. Dickson)' 집으로 정해졌다.

6월 2일 캐나다 스트렛퍼드를 떠나 토론토를 경유해 뉴욕에 도착했다. 미국작가 '로드니 딕슨'이 직접 케네디공항으로 마중 나와 고마웠다. 세계인이 가장 방문하고 싶은 1위 도시 뉴욕,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첫 인상은 "여기서 내가 어떻게 살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들었다.

뉴요커 화가 '로드니 딕슨' 집에 머물다

2015년 6월 4일 날 브루클린 집에서 찍은 '로드니 딕슨(Rodney Dickson)' 사진 그가 그린 드로잉작품도 보인다. 그는 주변사람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작품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아일랜드 출신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언제나 방문자로 넘친다
 2015년 6월 4일 날 브루클린 집에서 찍은 '로드니 딕슨(Rodney Dickson)' 사진 그가 그린 드로잉작품도 보인다. 그는 주변사람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작품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아일랜드 출신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언제나 방문자로 넘친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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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니 딕슨은 요즘 뉴욕에서 주목받은 미술거리 '윌리엄스버그'에서 멀지 않은 브루클린 '앵거트(Engert) 애비뉴'에 살고 있었다. 작업실이기도 한 그의 집에는 오토바이광답게 오토바이가 서너 대 있었다. 욕실 튜브도 없을 정도로 생활이 검소했고 부엌, 방 3개가 있었다. 영국 귀족 같은 그의 부인 '줄리엣 혼(J. Hone)'와 같이 사는데 그녀 역시 작가다.

로드니 집에는 6월 4일 마침 하와이비엔날레 총감독 '베이사'가 하루 머물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맨해튼 시내를 안내할 테니 무조건 따라오란다. 그는 버스 타는 요령과 지하철 타는 방법 등을 일러준다. 뉴욕버스를 처음 타봤고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가 뉴욕지하철 한 달권도 구입했다. 내 신용카드로 넣으니 바로 결재가 된다.

난 11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지하철을 처음 타봤는데 그야말로 철공소 그 자체였다. 굉음이 심해 귀를 막아야 한다. '유니언 스퀘어' 역을 지나 *맨해튼 중심가 *록펠러재단에서 가까운 한국식당 '돈의보감'으로 들어섰다. 맛이 궁금했는데 서울과 거의 같았다.

110년의 역사를 가진 뉴욕 지하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표정, 언어, 패션, 사고방식이 다 다르다. 거리예술가에 대한 기부가 생활화되어 있다. 뉴욕지하철은 24시 체인점처럼 24시간 운행하기에 한밤중에도 귀가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110년의 역사를 가진 뉴욕 지하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표정, 언어, 패션, 사고방식이 다 다르다. 거리예술가에 대한 기부가 생활화되어 있다. 뉴욕지하철은 24시 체인점처럼 24시간 운행하기에 한밤중에도 귀가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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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베이사' 친구인 큐레이터 겸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는 이혜원 선생과 캐나다·유럽을 오가면 작가 겸 전시기획자인 '나오미 캠벨(N. Campbell)'과 유엔위원회 중 한 단체의 회장 '알바레스'도 만났다. 내가 나오미 작가에게 뉴욕에 온 지 하루 지났다고 하니 자신이 '뉴욕현대미술관(모마 MoMA)'을 안내하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뉴욕의 최고 문화명소 '모마(MoMA)'

나는 나오미의 안내로 '모마(MoMA)' 도착했다. 여기는 뉴욕에서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최고 문화명소다. 데이트 족도 많다. 역시 여기서 본 최고의 작품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탄성이 터지면서 온몸에 전율이 밀려온다. 20세기 입체파는 확실히 미술의 혁명이었다. 이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생해서 뉴욕에 온 보람을 느꼈다.

현대거장들 작품을 하루에 다 보기엔 버겁다. 피카소에 이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도 역시 강렬했다. 잔잔한 여운과 격정적 열정이 뒤섞여 있었다. 작가의 주관적 관점이 돋보였다. 생존에 작품이 거의 팔렸지 않았기에 고흐는 정말 자신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린 듯하다. 그랬기에 최고의 작가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에도 영향을 준다.

그밖에도 마그리트, 칼로, 샤갈, 세잔, 후안 미로, 자코메티, 뒤뷔페, 클림트, 앙소르와 모네의 '수련', 키리코의 '러브 송 ', 마티스의 '댄스' 등도 봤다. 이제 모마 작품은 100년이 다 되었으니 정말 현대의 고전이다. 이 중에서도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폴 고갱이 압권이다. 2차 방문 땐 미국 거장 폴록, 로스코, 라우센버그 등도 감상했다.

여기서 특히 폴록의 '가을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2차 대전 후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물 붓듯 하는 '액션페인팅'의 추상표현주의를 창시한 현대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폴록만의 카리스마가 넘친다. 이건 절대 유럽에서 나오기는 힘든 화풍이다. 절정기에 차 사고로 죽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는 작품에 진전이 없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6월 14일에는 다시 모마에 갔는데 백남준과도 각별한 관계였던 '오노 요코 개인전(1960-1971)전'이 마침 열리고 있었다. 우리시대의 마녀라 불리는 그녀의 60년대 퍼포먼스와 오브제아트를 소개하는 전시로 우리나라 19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파격적이다.

뉴욕현대미술관(모마)에서 2015년 5월17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린 '오노 요코 개인전(Yoko Ono, one woman show 1960-1971)' 전시물 중 하나 전시 사이트 http://www.moma.org/calendar/exhibitions/1494?locale=en
 뉴욕현대미술관(모마)에서 2015년 5월17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린 '오노 요코 개인전(Yoko Ono, one woman show 1960-1971)' 전시물 중 하나 전시 사이트 http://www.moma.org/calendar/exhibitions/1494?local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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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앤디워홀이 오줌으로 만든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번 모마 전에서 그녀는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물을 모아서 작품을 만들었다. 물방울 하나로 바위를 뚫는다는 노자 사상의 메타포이다. 느리지만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물은 생명의 원천이고 새 생명을 잉태시킨다는 메시지다.

하여간 플럭서스의 창시자인 '마치우나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은 오노 요코는 분명 20세기 미술혁명의 진원지다.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실험정신을 번뜩였는데 작품 주제 역시 몸이 가장 중요한 화두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금기에 저항적이고 에로틱하다. 하긴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의 '버자이너'를 주제로 하는 것은 하나의 오래된 전통이다.

현대미술의 아버지 '뒤샹'의 '변기'는 또한 여성의 버자이너를 상징한다. 파리 한 마리가 여성의 버자이너를 천천히 지나가는 오노 요코의 영상은 '시케코'의 '버자이너 페인팅'보다 더 세 보인다. '나를 찢어라'와 같은 작품명도 도발적이다. 이런 표현의 자유가 충만했던 60년대 히피 시절 그때가 어떻게 보면 미국의 최고 전성기가 아닌가 싶다.

뉴욕 맨해튼 대표적 화랑가 '첼시'

그날 오후에 나는 이전에 자동차 도색공장거리였던 '첼시(Chelsea)' 화랑가를 방문했다. 이 구역은 과거 뉴욕미술가로 유명한 '소호(Soho)'구역을 대신한다. 소호가 고급상가로 바뀌면서 땅값이 오르자 1994년부터 임대료가 더 싼 첼시로 옮겨졌고 다른 갤러리도 같이 이사했다. 여긴 지금 '가고시언', '페이스' 등 많은 갤러리가 운집해 있다.

'303갤러리(West 24 Street)'는 내가 첼시구역에서 아는 유일한 갤러리다. 이 갤러리 공동디렉터 *'캐서린 에드먼(Kathryn Erdman)'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만나 알게 되어 서로 명함을 주고받은 사이다. 뉴욕 첼시에서 다시 만나 반가웠다. 첼시 중간에 위치한 이 갤러리는 꽤 고급스럽게 보였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놀러오라고 권한다.

첼시화랑가 '페이스갤러리'에서 본 '이우환전'의 한 장면
 첼시화랑가 '페이스갤러리'에서 본 '이우환전'의 한 장면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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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첼시전시 중 가장 눈길을 잡은 건 단연 *'이우환'전이다. 이 전시는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렸다. 이우환은 2011년 구겐하임 회고전 이후 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는 동양정신을 점과 선을 바탕으로 조형화하고 있는데 그의 설치작품은 돌과 철의 스캔들이라고 해도 좋은 것 같다. 한 경지에 오른 고급스럽고 미니멀한 관계미학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여기 첼시 화랑가엔 '뉴욕(두산)' 등 한국갤러리도 있다. 첼시미술지역 아직 정비가 다 끝나지 않아 아직도 어수선해 보이나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분위기는 확 다르다. 갤러리에서 맵(map)도 얻을 수 있다. 여기가 또 명소인 건 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2층 산책로 때문이다. '하이라인 파크'라고도 하는데 캐서린도 내게 꼭 가보라고 추천한다.

첼시 하이라인 파크에서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 2층이라 공중에 떠있는 생태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첼시 등 주변거리를 멀리 볼 수 있는 전망대역할을 한다
 첼시 하이라인 파크에서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 2층이라 공중에 떠있는 생태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첼시 등 주변거리를 멀리 볼 수 있는 전망대역할을 한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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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전문가이고 외국어대 영어통역부 이현송 교수가 쓴 <뉴욕사람들(2012년)>에서 보면 이 첼시구역에 하이웨이가 어떤 경위로 만들어졌는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맨해튼 남서부를 관통하는 이 고가공원은 80년 넘은 녹슬고 페인트 벗겨진 고가철로를 개조한 것이다. 2009년 처음 일부가 공개되었고 두루 입소문이 나, 이제는 뉴욕의 명소가 됐다. 1999년 시민단체 <하이라인의 친구들>가 결성되어 20년간이나 긴 준비 끝에 벌어진 이곳을 공원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로 지금은 야생식물 등도 자라게 되었다.

뉴욕 시는 아이디어를 공모해 34개국 720개 팀 응모에 참여했다. 2006년 착수 2009년 일부 개방했고 2011년 나머지 구간 완공했다. 총연장 2.3km, 5000만 달러 투자했다. 여기서는 상행위를 할 수 없다. 뉴욕 시는 부수고 짓는 것보다 있는 건물을 가능한 재활용한다. <뉴욕타임스>는 1억5천 달러 투자해 7배인 20억 달러의 효과를 냈다고 보도했다"

뉴욕에서 요즘 각광받는 미술구역 '부시윅'

요즘 뉴욕의 새로운 미술명소로 부각되는 '부시윅(Bushwick)'에서 열린 '오픈스튜디오 2015'의 현장사진
 요즘 뉴욕의 새로운 미술명소로 부각되는 '부시윅(Bushwick)'에서 열린 '오픈스튜디오 2015'의 현장사진
ⓒ Brad Dar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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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최근 가장 부각되는 미술구역은 맨해튼이 아니고 브루클린에 있는 '부시윅'이다. 6월 6일 오후에 첼시를 보고 나는 피곤한 채 귀가했는데 로드니와 같은 작가인 *브래드 다비(B. Darby)가 '부시윅(Bushwick)' 축제에 날 안내하겠단다. 이곳은 뉴욕에서 새로운 미술명소로 부각된 '윌리엄스버그'를 닮아 '제2의 윌리엄스버그'라고도 불린다.

그날 마침 '2015년 부시윅 오픈 스튜디오(Bushwick Open Studios 2015)'가 열리고 있었다. 난 그 현장을 누비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봤다. 화끈거릴 정도로 작가들 열기기 대단하다. 작가로 발돋움하려고 밤낮없이 혼을 불태운다. 한국과 미국 그 작가수준을 떠나서 우선 작가의 수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여긴 *신진작가들이 많았다.

2000년부터 과거 제조업 공장지역이었던 이곳이 예술가의 작업실로 재탄생된 것이다. 굉장히 활력이 넘쳐 보인다. 여길 보면 서울 '문래동 예술촌'이 생각났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더 넓고 크고 튼실하다. 무엇보다 작가들은 충분히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곳을 방문해 유쾌해지는 건 바로 이런 작가들 때문이다.

뉴욕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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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로드니 딕슨(Rodney Dickson)의 예술세계
로드니 딕슨(Rodney Dickson) I '무제' 합판에 유화(oil on board) 2014. 색을 긁어내면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한다
 로드니 딕슨(Rodney Dickson) I '무제' 합판에 유화(oil on board) 2014. 색을 긁어내면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한다
ⓒ Rodney Di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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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방식은 캔버스나 패널에 바탕색을 두껍게 칠하고 난 다음 며칠 뒤 그림 앞에서 긴 침묵과 오랜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준마처럼 캔버스로 달려가 그림을 그리거나 고치는 방식이다. 그 행위자체가 그야말로 퍼포먼스아트다.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던져 그리는 드라마틱한 방식이 인상적이다.

그의 그림은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열려 있다. 추상화이지만 작업을 할 때는 그에게는 구상과 추상, 표현주의와 사실주의의 개념도 없다. 다만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할 뿐이다. 광부가 광맥을 찾듯 그는 날마다 뭔가 새로운 가능성이 찾아갈 뿐이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뭔가를 순간적으로 우연히 포착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그는 거기서 기적 같은 어떤 영감이나 관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서사가 있는 사건'처럼 보인다. 그의 페인팅은 이전의 것과 다르다. 조각을 하듯 회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속도감도 빠르면서 느리고, 그 분위기가 고요하면서 격렬하다. 색의 주조가 왠지 어둡고 무거운 건 아래 글을 더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작업을 하다가 몸의 에너지가 다 소진돼 죽음이 온다 해도 그걸 그만둘 것 같지 않게 보인다. 그의 방식은 예측하기 힘들고 무조건적 혹은 무목적적이다. 캔버스에 자신이 경험한 삶의 희로애락을 색의 뉘앙스를 살려 담으려 한다. 무엇보다 그는 그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중시하고 즐기는 '도상미술(途上藝術)'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대해 "나는 시대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다. 오직 나만의 길을 갈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쇼크와 충격을 주기를 원한다(I would like to be shocked or surprised by my work)"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 나름의 치열한 정체성과 차별성과 고유성을 찾아가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그에게도 인생이 짧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그림에만 몰두한다. 그의 인생사용법은 '카프카'의 말처럼 자신을 비누처럼 써버린다. 일종의 투신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다. 물감을 아낌없이 쓸 여유는 그에게 충분하다. 그는 창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오토바이 레이싱으로 해소하는 것 같다.

작업방식에 있어서 처음에는 서양식 더하기를 했다가 나중에는 동양식 빼기를 하는 플러스보다 마이너스 미학이 더 강세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순간 그 더덕더덕 붙어있는 물감을 다시 긁어낼 때 만나는 기적 같이 찾아온 황홀경, 그때 그는 색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빛(Light)을 발견한다. 물감으로 표현한 비디오아트 같은 뉴페인팅이다.

그는 작품에서 빛을 발견하는 순간에 맛보는 경이로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새벽, 황혼, 자정, 정오에 내가 발견한 너무나 매혹적이고 강렬한 빛은 내 눈을 멀게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이미지 작업을 말살시킬 정도로 말이다(The artist writes, Dawn, dusk, night time, mid day: the light is sometimes so intense and magical, it obliterates almost all imagery in my work-just a blinding light)"

그는 단연코 반전(anti-war)작가다. 왜 그럴까? 거기엔 사연이 있다.

로드니는 1956년 북아일랜드 출신이다. 아일랜드는 700년 이상 영국식민지였다. 나라가 독립될 때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영국에 편입시켰는데 30년(1968-1998)간 처참한 '내전(The Troubles)'이 있었다. 이를 반대하는 반영파(공화파, 가톨릭)와 이를 찬성하는 친영파(왕당파, 개신교)의 분쟁으로 사망자 3천5백 명, 사상사 5만 명이 발생했다.

이를 10대부터 30년간 이를 봐온 작가로서 폭력은 답이 아님을 깨닫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평화적인 예술적 방식을 취한다. 그는 지금 뉴욕에서도 맨해튼이 아니라 브루클린에 사는데 이런 장소성은 무의식적으로 아일랜드의 비극성과 맞물려 있다.

이런 체험이 그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줬나. 그는 미국친구도 많지만 그 못지않게 주변에 소외된 사람에 대한 연민과 관심이 높다. 그는 중국 거주 작가도 했고, 베트남에서도 전시를 했지만 그래 선가 아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좋아하고 아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다.

그는 뉴요커 작가이면서도 브루클린적인 요소를 즐긴다. 도시적인 것에만 정신을 빼기지 않고 여전히 고향인 아일랜드의 전원풍경을 좋아한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능력 관대한 열린 마음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온 것이리라. 그는 요즘 참 보기 드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가이다.

[작가소개] 1956년 생 1979–1983년 영국 리버풀 폴리테크에서 순수미술 전공 [수상경력] 2011년 '폴록 크라즈너(Pollock Krasner)상', 포드재단기금 등 [전시경력] 2015년 독일 쾰른전시 2004년부터 2014년까지 2년마다 5번 이상 뉴욕전시, 2005년과 2003년 일본 동경에서 전시,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 등 국제적 전시를 해왔다. 한국에도 해인사 아트프로젝트로 참석한 적도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18년째 작업을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위 본문에서 [*]가 붙은 건 아래 슬라이드 사진에서 볼 수 있다.



태그:#백남준과 오노 요코 , #로드니 딕슨, #뉴욕 모마, #뉴욕 첼시, #뉴욕 부시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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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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