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봄 냄새로 가득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온기가 실려 있고 만개한 유채꽃이 드문드문 보였다. 유채꽃이 이날보다 만발할 즈음, 제주도에서는 국제전기자동차엑스포(3월18일~3월24일/제주 국제컨벤션센터)가 열린다. 올해로 3회째, 참가국과 전시되는 자동차, 부대행사 등의 규모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전기차 관련 행사다.
전기차 전시와 시승, 퍼레이드, 콘셉트카 디자인 공모, 학술대회도 엑스포 기간 열린다. 가장 깨끗한 도시를 꿈꾸는 제주도에는 지금 2300여 대의 전기차가 달리고 있다. 전국 시도별 등록 자동차의 비율로 보면 단연 최고다. 전기차 보급의 최대 걸림돌인 충전기도 2500여 기나 설치돼 있다. 환경과 인프라 모두 전기차가 달리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서울에 함박눈이 내리기 전날인 지난달 26일부터 2박 3일 동안 기자는 제주도에서 일반 자동차를 모는 것처럼 전기차를 대여해서 타고 다닐 수 있을까를 알아보는 체험을 했다.
그러나 전기차(르노삼성 SM3 Z.E) 대여 업체는 차량 인수 전 걱정부터 했다. "동네 사람이면 몰라도 외지인이 관광용으로 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한 번 빌려 주면 밤낮없이 전화가 온다. 충전소는 어디냐, 배터리가 다 떨어졌다, 충전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여기에다 견인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많아지면서 외지인 대여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리적 부담을 극복하라첫 날 오후 7시 제주공항에서 인수 한 SM3 Z.E. 계기반에는 주행가능 거리가 130km로 표시돼 있었다. 숙소가 있는 서귀포 표선면까지 거리는 45km,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하면 현재 배터리의 잔량과 소모량 등이 표시된다. 거리로는 분명 여유가 있지만 낯선 도로를 달리면서 계속 떨어지는 주행거리는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목적지인 숙소 또는 근처에 충전소가 없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까지 겹친다. 그러나 숙소에 도착하자 괜한 걱정이 됐다. 남은 주행 가능 거리는 67km나 됐고 호텔에는 급속충전기와 완속 충전기가 마련돼 있었다. 완속으로 충전 케이블을 연결해 놓고 푹 자고 일어나면 해결될 일, 그러나 다음 날 일정이 만만치 않아 걱정은 계속됐다.
충전소의 위치는 미리 알아 놓지 않았다. 무작위로 운행하면서 필요한 때 충전이 가능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다음 날 아침 SM3 Z.E. 계기반 주행 가능 거리는 다시 130km로 살아나 있었다. 충전 전력량은 11.7kWh, 요금은 0원이다. 제주도는 이때까지 전기차 충전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지만 유료화가 추진 중이다.
둘째 날은 섭지코지와 쇠소깍, 제주시를 들려 돼지국밥을 먹고 곶자왈과 오설록을 들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이 잡혀있다. 차로 움직여야 할 거리는 220km. SM3 Z.E.가 가진 1회 충전 가능거리 130km로는 어림도 없는 거리다. 렌터카 회사에 전화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출발을 했다.
배터리 잡아먹는 성판악주요 관광지 주차장 곳곳에 전기차 충전기가 있다는 사전 정보는 있었다. 섭지코지를 들르고 오던 길을 되가며 쇠소깍으로 방향을 잡자 배터리의 잔량이 60%가량으로 줄었다, 그래도 걱정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곳에 충전소가 있다는 내비게이션 정보가 있어서다.
그러나 충전은 불가능했다. 차량이 밀려들면서 주차장 진입이 어려웠고 전기차가 아닌 다른 차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했다. 제주시에 있는 돼지국밥집 가는 길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쇠소깍에서 제주시까지의 거리는 38km 남짓이다. 남아있는 주행가능거리로 보면 충분했다. 그러나 한라산 성판악을 오르면서 배터리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성판악 매표소까지 힘겹게 오른 후 남은 배터리 잔량은 21%, 더 갈 수 있는 거리는 31km에 불과했다.
제주시까지 가는 길도 불안했고 그곳에서 곶자왈 가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휴대전화를 꺼내 네이버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스럽게 성판악 휴게소에서10km 떨어진 제주첨단과학 기술단지에 충전소가 있었다. 성판악에서 길게 이어진 내리막길을 타고 이곳에 도착했지만 더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구세주로 만난 서울 청년SM3 Z.E.의 급속충전 시간은 완충을 기준으로 대략 30분, 그런데 회원카드나 번호가 없으면 충전을 할 수가 없었다. 르노삼성차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SM3 Z.E. 한 대가 구세주처럼 충전소 쪽으로 다가왔다. 회원카드를 대신 찍어주고 제주 명물 천혜향 맛을 보라며 건네준 사람은 지난해 전기차 일반 공모에 당첨돼 1960만 원을 주고 SM3 Z.E.를 구입한 신재중(사진, 피엔아이시스템 대표)씨.
그는 5년 전 서울에 있던 사업체를 제주도로 옮기고 이곳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너무 깨끗하고 조용하고 천천히 뭐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였다고 한다. 전기차 타는 데 불편 한 것은 없냐고 물었다. "전혀 없다. 사무실 바로 앞에 충전소가 있고 전기차와 함께 개인용으로 보급돼 무료로 설치된 완속 충전기가 있어서 오후에 충전을 걸어 놓으면 낮에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데 아무 불편이 없다"고 했다.
간혹 장거리 운행을 하거나 이 곳에서 제주시까지 하루 서너번 왕복을 해도 배터리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은 없단다. 제주시는 전기차 공모와 함께 민간 당첨자 차고지에 700만 원 상당의 완속충전기를 무료 설치해 준다. 지난해 전기차 공모에서 그의 대기 순번은 500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당첨이 됐을까.
"개인 주택이 아니면 충전기를 설치하기 어렵다. 아파트나 여러 세대가 사는 공동주택은 동의도 받아야 하고, 그래서인지 당첨이 되고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의 SM3 Z.E.가 지금까지 달린 누적 주행거리는 6500km, 처음에는 차를 몰고 나설 때마다 배터리 잔량에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 익숙해졌고 따라서 별 불편 없이 사용하고 있단다.
지금까지 차량 운행에 연료비는 단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신씨는 "충전시간, 주행거리, 충전소 위치 등이 조금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환경 생각도 했고 또 배터리 무상 교체 등 보증 내용이 좋아서 SM3 Z.E.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터리 충전이 끝났다. 충전에 걸린 시간은 20분, 지금은 무료로 충전 서비스가 제공되지만, 유료로 전환된다고 해도 가득 충전 기준 전기료는 7000원이면 된다.
익숙해지면 여유가 생기는 전기차충전을 마치고 제주시를 들려 곶자왈과 오설록을 들려 숙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완속 충전기에 케이블을 연결하면 내일 아침 다시 주행가능거리는 130km로 표시될 것이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제주도에서 전기차를 타고 노는데 불편은 없었다. 가려는 목적지의 거리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170km가 조금 넘는 제주도 해안도로를 일주해도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 충전을 하면 될 일이다.
다만 익숙해지고 심리적인 부담을 털어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날, 용감하게 제주도 동쪽 해안도로를 타고 공항까지 내 달렸다. 총 거리는 72km, 그리고 무사히 차량을 반납했다. 렌터카 회사 직원은 "전기차 빌려주고 전화 한 통 안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제주도에는 66대의 전기차가 렌터카로 등록돼 있다.
제주도는 현재 1%가량인 전기차 보급 대수를 오는 2017년 공공부문 10%, 2020년 대중교통 40%, 2030년 상용차 100%로 점차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공공 및 대중교통과 상용차 부문 전기차 보급 대수가 53만 대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민간 부문도 매년 공모전을 통해 전기차를 보급하고 있다.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제주도는 세계에서 전기차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가 된다.
올해에도 4000대의 전기차가 보급된다. 전기차 모델 수는 8개로 늘었고 전기차의 장점이 알려지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제주도가 전기차 보급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전기차 엑스포 조직위 관계자는 "제주도는 전기차 보급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시다. 탄소 없는 섬(카본 프리 아일랜드)을 꿈꾸고 있고 정부와 지자체의 의욕도 높다. 엑스포를 통해서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고 이용자 중심의 인프라 구축을 통해 미래 모빌리티 혁명 시대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도가 전기차 보급 사업을 시작하고 엑스포를 개최하겠다고 나설 때만 해도 전시용 행정, 일회성 행사가 될 것으로 우려하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전기차에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이 전기차를 마음껏 타고 돌며 제주도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환경과 인프라가 구축됐다.
엑스포의 규모 역시 해마다 커지고 있다. 이만하면 제주도가 세계 전기차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잊은 얘기가 있다. 300km 넘게 제주도를 휘젓고 다니면서 연료비는 단 한 푼도 들지 않았다. 차량을 반납할 때 연료를 보충하는 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