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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김정훈 정책위의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김정훈 정책위의장 ⓒ 이희훈

"에이~ 공천 한두 번 해 봅니꺼. 다 그런 거지…"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 지난 17일 같은 당 김무성 대표에게 한 말이다. 비박계 학살이라는 공천결과를 거부한 김 대표에 친박계 최고위원들이 사과를 요구했고, 이를 김정훈 의원이 김 대표에 전달하는 자리에서 나왔다. "공천관리위원회가 하는 짓이 당헌 당규에 맞다고 보나?"라는 김 대표의 물음에 김 의원이 이같이 답한 것이다.

주도권을 쥔 쪽이 공천이라는 공식 제도를 통해 반대파를 제거해 온 게 정치현실 아니냐는 김정훈 정책위의장의 말은 맞다. 정확히 8년 전 공천에서 있었던 '친박근혜계 공천 학살'이 대표적인 예다. 사실 4년 전 새누리당 공천 때도 친이명박계에 대한 공천배제가 있었지만 비상대책위원장이자 대안 없는 대선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존재 덕분에 잡음 없이 봉합해냈을 뿐이다.

언제나 그랬듯 공천배제의 대상이 된 이들에게 큰 결격사유가 있어서 잘라낸 게 아니기 때문에 '공천학살'이란 말이 나온다. 이번 '비박계 공천 학살'로 배제된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공약파기에 반기를 든 이들, 향후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비판할 수 있는 세력 혹은 그런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들이다. 즉, 임기를 2년 가까이 남겨둔 박근혜 대통령에 충성할 수 있는 여당, 이런 여당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비판을 무릅쓰고 이런 무리수를 둘 수 있는 것이다.

1954년 공천제도의 도입 '이승만 충성 서약' 해야 자유당 공천

8년 전, 4년 전 얘길 했지만, 사실 60여 년 전 대한민국에서 공천제도가 시작될 때부터 그랬다. 

국회의원 후보자를 정당이 추천하는 공천제도가 도입된 게 1954년 5·20 총선 때다.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한 쪽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고 초대 대통령에만 중임제한을 없애는 헌법 개정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서약서를 낸 후보자만 공천했다.

1954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전략)...8일 하오에 개최된 자유당 부차장회의에서는 동당(자유당) 공인 입후보자는 이 총재(이승만)의 정치이념을 받들어 이 총재가 주장하는 개헌안을 기필 통과시킬 것을 서약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러므로 금명간 발표될 이들 공인된 입후보자들은 이 대통령이 주장하는 개헌안을 찬성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유당 공인 후보자격을 스스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비공식보도에 의하면 동당의 선거투쟁 목표는 단독으로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의석 3 지2(3분의 2) 이상의 선거구에서 득승(승리)하는데 있는 것이라고 하며 203 선거구 중 몇 군데를 제외한 선거구에 공인 후보자를 내세우게 될 것이라 한다....(후략)

대통령에 충성을 서약한 자에게만 공천을 주겠다는 60년 전 상황이나, 박 대통령의 선거공약 불이행을 비판한 이들에겐 공천장을 주지 않겠다는 현재의 상황이나 서약서를 안썼을 뿐이지, 공천제도가 '대통령 충성부대 만들기'로 악용되고 있는 현실은 똑같다.

"선거운동 안 한다"던 이승만, 호남선 플랫폼 연설

또 있다. 60여년 전과 비슷한 장면이.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때다. 자유당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이, 민주당에서 신익희와 장면이, 진보당추진위원회에서 조봉암과 박기출이 나온 선거다. 대통령 선거에 안 나간다고 했다가 자유당이 조직한 출마요구 시위와 탄원서 제출 운동에 못 이기는 척 출마한 이승만은 "선거운동 같은 것은 안 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신익희의 유세를 보기 위해 20,30만 명이 운집하는 등 야당의 상승세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은 '꼼수 선거운동'에 나섰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논산에서 안양까지 열차가 서는 주요 역의 플랫폼마다 인파를 모아놓고 연설을 하는 '이상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 후보들을 친일파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노골적인 선거개입'이라는 대다수 언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지난 10일 대구, 16일 부산을 방문했다. 창조경제 성과를 점검한다는 명목이었는데, '진실한 사람들'의 출마지역이 공교롭게도 창조경제 지역거점이었던 것이다.

선거운동을 안 한다고 했다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연설을 한 이승만이나 선거개입이 금지돼 있는데 하필이면 '진박' 지역을 찾아가 창조경제 성과를 점검한 박 대통령이나 60년의 세월이 무상할 정도로 흡사하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과거를 반복하려는 이유는?

이렇게 '이상한 공천'과 '이상한 선거운동'이 판친 결과는 어땠을까. 명분도 없이 무리수와 꼼수를 총동원한 선거는 어떻게 될까.

다시 1954년 5·20총선으로 돌아간다. 이승만 충성 서약서를 받고 공천을 한 자유당은 압승을 거뒀다. 의석 203개 중 자유당은 114석을 차지했다. 이후 협박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무소속 당선자들을 입당시키거나 협조를 약속받아 개헌선을 넉넉히 확보했다.

하지만, 개헌안 투표에 붙인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에 찬성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였다. 가결되려면 136표가 돼야 하는데 1표 모자라 부결됐다. 자유당으로선 충격적 결과였다. 서약서까지 받고 공천하고, 국회의원을 협박까지 했지만 이탈표는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만뒀으면 탈이 없었을 텐데, 갈홍기 경무대(청와대) 공보처장이 "국회가 수학을 잘 모르나 본데, 사사오입을 하면 통과된 것인데 잘못됐다"고 했다. 재적 의원 3분의 2는 '135.3333…'인데 이 걸 반내림하면 135이므로 찬성표가 135표만 돼도 가결이라는 주장이다. 역사에 길이 비웃음을 사고 있는 사사오입 개헌 사건은 이렇게 탄생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이렇게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과거를 반복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상식과 양식을 외면하고 무리수와 꼼수를 동원해서라도 이루려는 목표가 단지 선거승리일 뿐인지, 아니면 또다른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사사오입#공천#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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