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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임대료와 대출 이자를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개업한 지 5개월 무렵부터 '투 잡'을 뛰기 시작했다. 남편은 마라도에서 장사하던 방식대로 평택에서도 장사를 하고 싶어했다. 그 일은 남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일이었고, 가장 그리워하는 일이었다. 가장 하고 싶어한 일은 낚시였지만, 낚시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고기를 공수해서 파는 일을 택했다.

바야흐로 겨울이 시작됐으므로, 제철 만난 방어를 육지 사람들에게 판다면 틀림없이 큰돈이 될 거라고 믿었다. 문제는 어떻게 방어를 실어오느냐는 것이었다. 신선함이 생명인 횟감을 물 건너 가져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남편은 일단 모슬포에 있는 여러 방어 전문 수산업소에 연락해서 거래를 텄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수산업소는 방어를 손질해서 아이스박스에 담아 택시를 부르고, 방어를 픽업한 택시기사는 50분 거리에 있는 공항 수화물 취급소에 가서 접수한 다음,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접수번호를 알려주면 끝.

마라도 방어 공수작전

 지난 2012년 10월, 제주 서귀포시 마라도 앞바다에서 한 어민이 방어를 잡아올리고 있다.
지난 2012년 10월, 제주 서귀포시 마라도 앞바다에서 한 어민이 방어를 잡아올리고 있다. ⓒ 연합뉴스

여기까지도 그들이 늘 해오던 협업이라 쉬웠다. 문제는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한 다음 평택까지 물건을 실어나르는 일이었다. 가게가 공항 근처에 있다면 가서 찾아오면 그만인데 말이다. 우리는 궁리 끝에 이런 경로를 선택했다.

공항 인근에 있는 퀵서비스 기사가 물건을 찾아 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달리고 달려 수화물을 접수한다. 버스가 평택 터미널에 도착하면 가서 찾아온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마라도 방어가 평택까지 당일로 도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모슬포 방어가 아니고 마라도 방어라고 부르는 것은 모슬포 어선들이 방어를 잡아 올리는 구역은 마라도 앞바다이기 때문이다. 운송 경로가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방어가 오는 날이면 하루종일 신경을 써야 했고, 온라인으로 여기저기 돈을 송금해주는 일이 중요한 업무가 됐다.

운송비가 방어값만큼 들었다. 택시값, 비행기값, 퀵값, 버스값…. 그때만 해도 어장이 풍족했기 때문에 방어가 거의 매일 올라왔고, 풍족한 만큼 방어값이 저렴했으니 망정이었지 3배 가까이 오른 지금의 시세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방어를 익일 도착 택배로 받으면 가만히 앉아서 받을 수 있고 운송비 또한 저렴한데, 남편은 당일 도착을 고집했다. 대형 고기들은 대부분 숙성시켜 먹으면 더 맛있는데도, 육지 사람들은 선어의 고소함보다 활어의 쫄깃함을 더 좋아하므로 무조건 당일에 받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마라도 앞바다 방어가 당일치기로 평택까지 날아온다는 점은 굉장한 선전 효과가 있어 계속 그런 방식을 고집했다.

아니나 다를까. 방어 장사는 대박이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자리가 없는 날이 많았다. 방어 때문에 아르바이트 학생을 두 명이나 고용했다. 무엇보다 가격이 쌌기 때문이었다. 한 접시에 1만 원! 가격에 이끌려 온 사람들은 말로만 듣던 방어를, 혹은 듣도 보도 못한 방어를 맛보고는 홀딱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님은 많은데 남는 건 없고

자연산 대형 물고기가 수족관 속의 양식 물고기와 비교가 되겠는가.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가 서울에서 달려오는 손님도 많았다. 그렇게 11월부터 시작된 방어 장사는 3월까지 겨우내 성황이었다. 그런데 돈은 못 벌었다.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남들이 보면 그 5개월 동안 아무리 못 벌어도 수천만 원은 순수익으로 남겼을 것 같지만…. 제로섬이었다. 바쁘기만 더럽게 바쁘더니 정작 계산기 두드려본 결과에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유는 너무 싼 가격에 있었다. 한 접시에 1만 원은 마라도에서나 통할 가격이었다. 마라도에서는 방어 어선들이 모슬포로 가기 전에 직접 횟집에 넘겨주어 유통 마진이 빠졌고, 활어였으므로 많은 양을 받아 수족관에 넣어두고 팔 수 있으니, 도매가로 받을 수 있었다. 마라도를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은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방어를 낚시로 다 잡은 줄 알지만, 방어는 갯바위 근처에는 오지 않을뿐더러 낚싯대로 낚아 올릴 수도 없는 크기다. 방어는 배에서 기계로 감아올리는 주낙으로 잡는다. 그래서 마라도에서 한 접시에 만 원을 받으면, 손님도 좋고 주인도 좋은 가격이었다.

그런데 평택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운송비가 고깃값만큼 들고 알바비가 또 들었다. 게다가 밀려오는 손님을 다 받을 만큼 방어를 공급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방어는 아무리 풍족해도 제주시로 넘어갈 게 없을 만큼 현지 수요가 넘쳤기 때문에 우리에게 할당된 양도 하루 한 마리가 다였다.

거기에 풍랑주의보가 며칠씩 떨어져 배가 나가지 못하면 우리의 방어 장사도 임시휴업을 맞아야 했다. 그래서 최고로 많이 판 달의 총 매상이 800만 원에 불과했다. 방어값과 운송비가 500만 원이나 들었다. 알바비가 두 명에 300만 원이 들었다. 망연자실했다. 적자가 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이 '방어 사태'를 보면 우리 부부가 얼마나 장사 셈이 없는지 잘 알게 된다. 짜장이야 기존의 짜장과 너무 달라서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탓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대박 아이템인 방어 장사를 요 모양으로 했으니…. 선천척인 재능도, 후천적인 능력도 한심할 지경이었다. 시작을 그 가격으로 했으니, 도중에 올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방어철이 끝날 때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장사를 이어가야 했다. 그래도 전체 장사에 방어는 꽤나 도움이 됐다. 방어 때문에 왔다가 짜장도 먹어보고 짬뽕도 먹어보게 되니, 방어는 훌륭한 미끼 상품 노릇을 한 셈이었다.

평택에서는 양장피, 동파육, 유산슬, 팔보채 등의 요리도 있었다. 우리 남편 원종훈씨의 음식은 모두가 독학의 산물인데, 이 중식 요리류도 책과 인터넷을 보고 독학으로 완성했다. 처음엔 그 교본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두반장이나 굴소스, 치킨파우더 등의 식자재를 모두 사서 만들어봤다.

평소에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들이었으므로 어떤 맛이 나는지 일단 알아야 했다. 그렇게 전체적인 맛의 윤곽을 터득한 다음에 그 식자재는 다 버렸다. 요리마다의 독특한 맛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선 해당 가공양념이 필수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결국 그 맛을 지배하는 것은 MSG였으니,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결국 남편이 만든 요리류도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특이한 음식이 됐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방어를 먹기 위해 회식을 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회식을 왔으니, 짜장부터 요리류까지 다양하게 주문하게 되고, 술도 많이 마시게 되고, 그런 면에서 방어는 매상 증대에 도움을 주긴 했다. 방어철이 끝나고 나니 가게는, 특히 안줏거리 시원찮은 저녁 시간대는 다시 한산해졌다.

새로운 시도 '삼치'... 대실패

 책 <제주도로 간 도시 남자들>에 나온 남편의 요리하는 사진.
책 <제주도로 간 도시 남자들>에 나온 남편의 요리하는 사진. ⓒ 류외향

남편은 또 다른 고기를 찾기 위해 인맥을 총동원했다. 그리하여 한때는 삼치도 팔았고, 민어도 팔았다. 그러나 둘 다 재미를 못 봤다. 삼치는 일단 무지하게 낯선 게 문제였다. 삼치를 회로 먹어? 먹는다. 고등어만한 삼치는 구워 먹지만, 방어만한 삼치는 회로 먹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삼치회는 전혀 쫄깃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좋게 표현하면 야들야들 부드럽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흐물흐물하다. 활어를 주로 먹는 육지 사람들은 쫄깃하지 않으면 일단 낙제점을 매긴다. 선어 중 최고봉이 삼치라는 비장한 소개조차 별로 영향력이 없었다.

민어는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다. 가격이 세서 대중적이지는 못했지만, 인지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귀한 몸이라 팔고 싶은 만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고기가 오는 날에 문자를 보내는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민어를 더 많이, 더 싼 가격에 공급받기 위해 여름휴가를 핑계로 임자도에 간 적도 있다.

그러나 민어의 본고장에서도 민어가 귀해 거래를 트는 데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살기 위해 별짓을 다했구나 싶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세상에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민 '자연주의 짜장'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회만 좋아라 하는 손님들이 야속하기도 해서 자주 이중적인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다음해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조금 가격을 올려 이문을 남겨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방어 장사에 만반을 기했다. 그러나 날벼락을 맞았다. 한 대형마트에서 수협과 1만 마리 방어를 수의계약해 버렸다. 귀해진 방어는 가격이 2배로 뛰었다.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우리 역시 가격을 두 배로 올렸지만, 남는 건 하나도 없었다. 손님 입장에서도 만 원 주고 사먹던 고기를 2만 원을 줘야 하니, 1년을 기다린 보람도 없이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우리는 대형마트를 욕하며 오는 사람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줬지만, 소비자는 우리 사정을 따지지 않는다. 이성적으로는 대형마트 탓인 줄 알지만, 감성적으로는 횟집 탓을 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렇게 돈 버는 재주도 없었고, 운도 없었다. 이 불운은 그 후에도 쭉 이어져 정말 지지리 운이 없는 상황까지 맞게 되는데, 듣는 사람마다 내 마음 같이 억울해하고 원통해 했다. 이 이야기는 평택 시대가 끝나갈 즈음 들려주게 될 것인데, 벌써 마음이 쓰리고 불편하다. 아무튼 두 번째 방어철도 제로섬으로 끝났다. 돈은 하나도 못 벌었지만, 소문의 위력은 대단해서 평택을 떠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방어나 민어를 파느냐고 전화가 온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더 큰 빚을 지다

 늘어나는 빚. 결국 가게를 내놨다.
늘어나는 빚. 결국 가게를 내놨다. ⓒ pixabay

짜장 장사는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임대료를 낼 때마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듯했다. 개고생하며 번 돈을 부동산 투기꾼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었으니까 말이다. 또한 고리대금업자에게도 피 같은 돈을 갖다 바치고 있었는데, 갚아도 갚아도 빚은 늘어가기만 했다.

어떻게든 매상을 늘려야 했는데, 역시 남편이 '투 잡'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회를 파는 일뿐이었다. 선어는 시기도 양도 한정돼 있어서 급기야 활어를 팔기로 작정했다. 무모했다. 나는 그때도 '무모하다' '무모하다' 소리를 높였는데, 결론적으로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회만 생각하면 마냥 긍정적으로 돌변하는 남편은 적어도 짜장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우겼다. 여기서 횟감은 필사코 자연산이어야 했다.

물론 자연산 회는 자연주의 짜장보다 수요가 훨씬 크다. 거기에다 가격이 싸기만 하다면야 날개 돋친 듯 팔릴 것이다. 그러나 전제 조건은 밑천이 충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자연산은 도매업자가 실어다 주지 않으므로 직접 바닷가에 가서 실어와야 했고, 그러자니 활어차가 필요했다.

남편은 먼저 폐업한 횟집의 수족관을 두 개 사다가 가게 앞에 시멘트 바닥까지 만들어 갖다 놨다. 그리고는 결혼 전부터 10년 가까이 애지중지 몰고 다니던 나의 애마를 희생양으로 삼아 활어차를 샀다. 400만 원 중고로 산 내 경차는 150만 원에 팔려 동남아시아로 실려갔고, 중고 활어차를 무려 1000만 원이나 주고 샀다. 당연히 할부로 말이다. 그렇게 빚이 많은데도 또 빚을 내어주는 우리나라의 금융 시스템은 정말 맛이 가도 한참 간 상태였다.

그리하여 소원 성취한 남편은 보조로 있던 두 직원에게 주방일을 맡겨두고, 온 해안을 떠돌았다. 서해, 남해, 동해를 돌아다니며 거래처를 트기 위해 애썼다. 한밤중에 출발해 새벽 경매장에 도착해서 고기를 싣고 다시 하루 낮 동안을 달려 돌아오는 식이었다. 이건 적당한 가격에 좋은 고기들이 있을 때 이야기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며칠이고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초기 서해에 가서는 직접 고기를 잡아 파는 선주를 잘 만나 숭어를 마리당 천 원씩에 사왔다. 수족관에 숭어가 바글바글거렸고, 사람들은 커다란 자연산 숭어 한 마리를 만 원에 주고 사먹으며 정말 행복해했다. 쭉 그런 식이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더 오래 장사를 했을지도 모르고, 짜장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짜장에 발목 잡힌 게 확실한 모양이었다.

모든 자연산은 한철이라는 게 가장 큰 맹점이었다. 그 효자 노릇하던 숭어도 더 이상 나지 않고, 동해는 물고기가 거의 나지 않는 비운의 바다가 된 지 오래였고, 남해에서 얼마간의 고기를 받아왔는데, 가격이 저렴하지도 않은 데다 물류비 제하고 나면 이 역시 제로섬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매달 활어차 할부금까지 얹어서 늘어난 빚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사를 결심했다. 어떻게든 권리금이라도 받으려고 그해 5월에 가게를 내놨다. 과연 언제 누가 나타날지 모르는 초조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채로 우리에게 그 가게를 소개했던, 그 수완 좋은 부동산 아가씨의 연락을 기다리며 2012년의 봄을 겨우 넘기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평택이 아니라 제주도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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