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군'위안부') 제도"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이 도입한 반인륜적 제도였다.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츄오대학 교수가 <일본군'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2013, 역사공간)에서 내린 정의에 따르면, 군'위안부'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부터 1945년 일본 패전까지 전지(戰地)와 점령지에 일본 육해군이 만든 위안소에서 군인과 군속의 성(性) 상대를 강요당한 여성들을 말한다.
요시미 교수는 군 위안소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군이 직접 경영하는 위안소, 민간업자에게 경영을 맡기는 군 전용 위안소, 민간의 유곽 등을 군이 일시적으로 지정하여 이용하는 위안소들이다. 군'위안부' 제도는 국가의 공적 조직인 군이 위안소를 만들고 유지했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범죄'적 제도였다.
패전 후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제를 부인해 왔다. 1991년 8월 14일, 전시 '성노예'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과거사 책임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고발했다. 1993년 8월 4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고노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후 일본의 역대 총리들은 공식적으로 고노 담화 계승을 표명했다.
고노 담화가 발표된 지 1년 뒤인 1994년 무렵부터 군'위안부'가 자유 의지로 매춘을 한 '공창(公娼)'이라는 의견이 각료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군'위안부' 관련 기술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2007년 3월 16일 아베 정권은 각의에서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은 없었다"는 답변서를 채택했다. 그해 6월 14일 일본의 정치가, 교수 언론인들이 <워싱턴포스트>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이 없었다는 광고를 실었다.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었으며, '위안부'는 당시 세계 어디에나 있었던 공창제도 하에서 일한 존재로, '성노예'가 아니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조선인 위안부'를 "조선이나 중국의 여성들이 일본의 공창제도의 최하층에 편입되었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의 '위안소'의 최대 공급원"이 되면서 생긴 존재(291쪽; 제2판에서 큰따옴표 안의 내용은 '○'로 복자 처리 되어 있다. 원문은 제1판을 바탕으로 정리해 놓은 정영환(2016:187~191)에서 가져왔다)였다고 규정했다.
박 교수는 위안부에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296쪽)를 덧씌웠다. 위안부가 갖는 전시 일본군 '성노예'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강간적 매춘'과 '매춘적 강간'이라는 교묘한 표현(120쪽)을 동원하면서, 위안부들이 한 일을 기본적으로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120쪽)으로 규정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국외 공창 시설로 돈 벌러 간 젊은 여성들, 이른바 '가라유키상'의 후예였다. 일본 군인과 '동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 모두 '제국의 위안부'였다는 점에서 기본 관계가 같았다. 동일한 제국의 일원으로 지냈기 때문에 군인들과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 교수가 '위안부'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들이다.
박 교수의 시각처럼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합법적인 공창제 아래서 일한,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120쪽)을 한 '자발적 매춘부'인가. 요시미 교수에 의하면 공창제는 사실상의 성노예 제도다. 공창제 하의 여성들 대부분이 본인 의사는 무시된 채 인신매매나 선금에 얽매여 매음 영업을 하는 곳에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요시미 교수에 따르면 군'위안부' 제도는 공창제가 외견상 규정으로 유지하고 있던 '자유 폐업'이나 거주, 외출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위안부는 문자 그대로 일본군의 성노예였다.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이므로 성노예 제도가 아니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위안부를 매춘 여성으로 보는 것은 궤변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공식화'한 것은 전후 40년이 훨씬 지난 뒤인 1990년대 초였다. 오구마 에이지 게이오기추쿠대학 교수는 과거사 처리와 관련하여 일본 정부가 유지해 오고 있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쟁 피해는 '국민이 다 같이 참고 견뎌야'만 하는 것으로 '보상'은 하지 않는다. 요구가 거셀 경우에는 '위로', '문안', '의료 지원'이라면 한다. 다만 정부가 직접 돈을 내는 것이 아니고, 민간단체나 외부 단체가 만든 기금의 경우에는 다소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 어느 신문 기자는 이것을 "보상은 하지 않는다. 사죄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로는 한다. 이것이 국가의 태도다"라고 요약했다. - 오구마 에이지(2015), <일본 양심의 탄생>, 동아시아, 322쪽.
나는 박 교수의 저작이 과거 전쟁 책임을 부인하고 사죄를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박 교수 책의 말미에서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가치관을 지켜왔다"(312쪽)고 강조하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일본과의 화해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영환 메이지가쿠인 대학 교수를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이른바 '강요된 화해론'이다.
나 역시 박 교수의 '화해론'에서 진정성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인식이 한국 교과서에 실리고 또 일본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모든 위안부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한일 간의 화해는 아마도 영원히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우리가 그저 '일본군의 만행'만 기억하며 분노를 되새기는 국민으로서, 식민지화된 국민, 고난에 처했던 국민으로서 그 수난을 딛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우리가 입은 상처를 들이대며 그들을 상처 입히는 일에 탐닉하는 일이기도 하다. - 박유하(2015), 314쪽.
자국민 조상이 식민지배 체제 아래서 국가와 군의 관여로 인해 '성노예' 생활을 했다. 진정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식민 지배국은 교묘한 논리를 들이대며 이를 회피한다. 자국민들이 분노한다. 그런데 박 교수는 '화해' 대신 '분노'에 빠져 있는 우리 국민이 '그들'(일본인들)을 상처 입히는 것을 비판한다. 평화를 위한 화해론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정영환 교수가 쓴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는 박유하 식 '강요된 화해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다. 이 책에서 정 교수는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펼쳐 놓은 일본군 책임 부정의 논리와 피해자들의 왜곡된 '목소리', 1965년 한일회담과 근거 없는 '보상・배상'론의 문제, 고노 담화와 국민기금을 디딤돌로 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관한 문제를 하나하나 검증하고 비판한다.
<제국의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한 권의 서적에 대한 평가에 그치지 않는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성 때문에 앞으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담론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연구의 입장에서 적절한 비판을 제시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박유하의 '위안부' 이해가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유통되는 것은 부정확한 역사인식을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전쟁 책임, 식민지 지배 책임에 관한 인식에 다대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비판적 검증은 오히려 긴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 정영환(2016), 39쪽.
정 교수는 박 교수가가 연구자로서의 직업윤리에 적합한 실천과 준수 절차를 따랐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타당하다고 볼 수 없는 방법으로 사료, 증언, 문헌을 해석하고 있으며, 일분군 '위안부' 제도나 한일회담, 전쟁 책임, 식민지 지배 책임에 관한 연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지난 7월 1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사직로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정 교수의 책에 대한 출판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한겨레>는 한 기사에서 이날 강연회를 주인공이 함께하지 못한 "이상한 강연회"로 표현했다. 국적이 '조선'이라는 이유로 정 교수가 입국 불허 되면서 강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강연회에 참석한 박 교수와 화상 토론을 벌였다. 박 교수는 "모든 비판은 본인 있는 데서 해야 옳다", "전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등의 주장을 폈다고 한다. 비판이나 주장에 대한 설명이나 반론을 원했던 정 교수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대화를 포기했다고 한다.
"21세기의 금서"라는 야심찬 타이틀을 달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를, 정 교수는 "반역사성"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제3지대'의 독자로서 나는 정 교수의 시각이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자 장신이 그날 강연회를 지켜본 뒤 "<제국의 위안부> 현상 또는 박유하 현상일 뿐이지 애초부터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라고 말한 이유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5.6.16. / 359쪽 / 1,8000원; 제2판 34곳 삭제판)<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 푸른역사 / 278쪽 / 1,5000원) 덧붙이는 글 | 정은균 시민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