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자주 들어 식상하게까지 느껴졌던 이 격언이 새삼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 건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침대 머리맡에 두고 꾸준히 읽은 <위대한 생존-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무 이야기>가 바로 그 책이다.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도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진작가 레이첼 서스만은 지구의 역사를 지켜본 오래된 생명체를 찾아 지난 10여 년 동안 지구 곳곳을 누볐다. 기준이 된 건 2000살 이상의 생명체로 그 중 나이가 많은 건 60만살의 시베리아 방선균, 10만살짜리 포시도니아 해초 같은 것들이다.
오래된 생명체가 있다는 말 한 마디면 기꺼이 몸을 일으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기를 쉼없이 반복한 저자의 프로젝트는 미국 모하비사막과 호주 아웃백, 그린란드와 남극, 급기야는 태평양 바닷속 같은 험지를 종횡무진 오가며 이어진다.
시공을 넘나드는 레이첼 서스만의 프로젝트가 사진과 글로써 고이 담긴 이 책은 한 편의 사진집인 동시에 진솔한 수필집이다. 적게는 수천년부터 많게는 수십만년을 살아왔지만 환경의 변화로 생존의 기로에 선 생명들, 저마다의 생존방식으로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려운 긴 시간을 살아낸 이 생명들 앞에서 레이첼 서스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300페이지 남짓의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겼다.
<어린왕자> 속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바오밥나무는 2000살 가량, 나이가 들수록 내부가 펌프질로 변해 정확한 연령을 추정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2000살 내외라고 한다. 수분을 아끼기 위해 평생 동안 잎 한두 장만 키우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웰위치아도 2000살 정도, 장자의 글에 등장하는 것처럼 속이 텅 비어 2200년 넘게 살아남은 칠레의 알레르세 나무도 있다. 더욱 유명한 종으로 크레타섬의 올리브 나무와 플로리다 상원의원 나무는 3000살이 넘는데 그래봐야 이 책에선 젊은 축에 속한다.
남극 출신이지만 한 뿌리 한 뿌리 이동한 끝에 호주 퀸즈랜드까지 옮겨온 너도밤나무는 가장 나이든 게 1만2000살 정도다. 제한된 양분으로 살기 위해 불필요한 시스템을 스스로 닫아버린 브리슬콘 파인은 5068살, 좀처럼 나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파머참나무는 1만 3000살이다. 이밖에도 균류와 지의류, 산호 등 많게는 수십 만년을 산 다양한 생명종이 서스만의 리스트에 포함돼 독자와 만날 기회를 얻었다.
변화하는 환경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생명들의 분투는 그 방식이 다양하고 치열해 놀랍게까지 여겨진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개체를 조금씩 이동하는 나무부터 거대한 군락을 이뤄 일부가 희생되더라도 종 자체를 유지하는 방식,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장을 스스로 제한하는 종까지 각양각색이란 말이 어울린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두 종은 판도와 난쟁이 모볼라다. 미국 유타주 피시호수 근방에 사는 사시나무 군락 판도는 얼핏 커다란 숲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나무다. 모두 4만7000여 개의 줄기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라틴어로 '나는 퍼져나간다'는 뜻인 판도는 8만살 정도로 추정되는데 8만년 전이면 인간이 아직 뗀석기를 쓰고 있을 무렵이다.
판도는 영양과 수분을 풍부한 곳에서 그렇지 못한 곳으로 운반해 효율적으로 운용한다. 또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천천히 이동하며 인간의 시간관념으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판도도 최근 상당한 위기 국면을 맞이했다고 한다. 다른 많은 경이로운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개입 때문이다. 도로, 주택, 캠핑장 등이 판도의 터전을 침범했고 피시 호 삼림관리국이 군락 중앙부 상당부분을 개벌한 탓에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 판도를 알게 된 건 이 책이 안겨준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난쟁이 모볼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레토리아에 있는 나무로 서스만이 만난 건 지금은 살아 있지 않은 1만3000살 먹은 일명 '지하삼림'이다. 겉으로 보면 작은 수풀로 보이는데 사실은 커다란 나무의 윗부분이 지표 위로 조금 나와 있는 것이다. 빙하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한데 뜨거운 아프리카 태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영리한 생존법을 터득한 종이라 할 수 있겠다.
이토록 영리한 생명체지만 아프리카에선 천대받는 신세다. 독이 있는 종도 있어 가축을 키우는 농민에겐 골칫거리가 되고 건설노동자가 길을 닦다 난쟁이 모볼라를 만나면 캐내기 어려워 고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난쟁이 모볼라를 죽이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가지를 잘라 물을 흡수하게 하고 중간에 물을 독으로 바꾸는 방법이란다. 나무를 독살하는 것이다.
서스만은 위대한 모험가 어니스트 셰클턴이 심장마비로 죽은 사우스조지아섬 연안에서 그의 발자취를 좇고 반경 수십킬로미터에 사람 한 명 없는 어느 북쪽나라에서 온전히 홀로됨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 서스만이 지난 10년 간 겪고 느낀 바를 간접적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면 책은 그 역할을 톡톡히 다 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목적 자체보다 주변 일들에서 심오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2008년에 그린란드에서 고고학자 마틴 아펠트의 연구팀과 함께 낚시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배가 고팠고 고기를 낚아 저녁으로 먹을 참이었다. 바다에는 커다란 송어가 가득해서 인간이 퍼지기 전 지구의 모습을 보는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물을 던졌더니 곧바로 두 마리가 잡혔다. 고고학자들은 한 술 더 떠서 맨손으로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아펠트는 단번에 송어 한 마리를 바위 쪽으로 몰아 건져 올렸다. 그리고 나를 부르더니 물고기를 먹으려면 그것을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는 먹거리에 대한 내 원칙을 시험하는 말이었다. 나는 10대부터 20대까지 엄격한 채식주의자였지만 몸이 안 좋아진 이후 해산물을 먹게 됐다.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는 (그리고 죽이지 않을) 것은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했는데 물고기는 죽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런가? 아니면 그렇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는가? 이를 시험할 상황이 온 것이다. 나는 돌로 송어 대가리를 서툴게 두 번 가격했다. 그리고 아펠트가 마무리를 했다. 머리로만 믿던 신념을 실제로 시험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은 선물과도 같은 일이다. 그런 경험을 겪는 곳이 낯선 곳일 수는 있지만, 이후 그 경험은 계속해서 나와 함께하게 된다." - 29p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