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여행을 잘 갈 수 있으면, 유모차도, 노인도 잘 갈 수 있어요."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를 이끄는 홍서윤(30) 대표는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다닌다.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작년에는 혼자 유럽여행도 다녀왔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여행을 다닐 수 있도록 돕자는 뜻으로 동료 8명과 함께 지난해 6월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거동이 불편한 노인,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엄마도 여행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게 홍 대표의 생각이다. 장애인의 이동권, 관광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다른 신체적 약자들을 돕는 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지난 6월 5일 서울시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홍 대표를 만나고, 이후 이 연구소의 '이동약자 관광·문화향유권 증진을 위한 독립여행' 프로젝트에 동참하면서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스물한 살에 처음 용기 내 했던 '혼자만의 여행' 홍 대표가 처음부터 여행을 잘 다녔던 것은 아니다. '여행전문가'가 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열 살 때 바이러스성 척수염으로 걸을 수 없게 된 이후, 10여 년 동안 부모님 없이는 외출하지 못했다. 장애인콜택시도, 저상버스도 없던 당시를 그는 "고립무원이었다"고 회상했다.
대학에 다니던 스물한 살 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고속철도(KTX)가 도입됐다. 서울 친구네 집에 놀러가기 위해 경남 밀양에서 서울행 KTX를 탔다. 난생 처음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한 경험이었다. 첫 발을 떼자, 혼자 다닐 용기가 생겼다.
"사실 그 전까지는 외출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컸어요. 그런데 혼자 KTX를 탔던 그 5시간이 저에겐 무척 강렬했죠. 어렸을 때 할머니랑 같이 기차여행 갔던 것도 생각이 나고... KTX를 한 번 타면서 '아, 나 혼자서도 이동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이후 혼자 이동하기 위해 운전면허까지 땄다. 그래도 여행은 쉽지 않았다. 장애인화장실이나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경사로 등 편의시설이 부족했고, '왜 왔어' 하는 시선도 느껴졌다.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어 적극적으로 다니지 못했다.
그러다 '왜 남의 눈치를 보면서 다녀야 하지' 하고 생각을 바꿨다. 당당하게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홍 대표는 이제 "공항 노숙도 아주 잘 하고, 요즘엔 캠핑 계획도 하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KTX 여행이란 작은 경험으로 자립심을 기른 홍 대표는 2013년 앵커직에 도전해 2년 동안 한국방송(KBS)의 장애인앵커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직은 장애인에게 많이 불편한 한국 홍 대표가 용기를 내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장애인들이 일하고 여행하기에 한국은 아직 많이 불편한 곳이다. 1997년에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시설 증진법'이, 2005년에 '교통약자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됐지만 여전히 교통약자 이동권은 제대로 보장되고 있지 않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버스정류장이나 시외버스터미널의 이동편의시설 기준적합 설치율과 만족도는 약 60~70% 수준이다. 통로의 폭, 승강기 설치 유무, 휠체어가 이동 가능한 경사로의 각도 등을 기준으로 했을 때 부적합한 곳이 아직 많다는 뜻이다.
또 이동편의시설 설치율과 상관없이 현재 휠체어 이용자는 시외버스와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 없다. 휠체어용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장애인은 자동차 없이 다른 지역을 여행하기 어렵다.
장애인이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에 가더라도 대중교통으로 그 지역 내에서 이동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지만 택시 수가 적어 한 번 이용하려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한다. 홍 대표는 "장애인콜택시가 적은 것도 문제지만, 지자체별로 장애인콜택시 이용규정이 다른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강릉의 장애인콜택시는 강릉 내에서만 운행해요. 속초 근접지역도 가지 않죠. 장애인이 강릉을 여행 한다면 강릉만 보고 와야 하는 거예요. 속초에선 속초 시민이 아니면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할 수 없어요. 속초 시민을 위한 복지라는 거죠."비장애인이 하는 일은 장애인도 가능해야 작년 가을 홍 대표는 혼자서 한 달 동안 네덜란드 등 유럽의 7개 나라, 25개 도시를 여행했다. 혼자 떠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었지만 국내여행보다 훨씬 편했다. 유럽에는 기본적으로 '비장애인이 할 수 있으면 장애인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홍 대표는 설명했다.
홍 대표가 돌아 본 유럽 도시에선 게스트하우스는 물론 캠핑장에도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기차, 버스 등 모든 대중교통에 휠체어가 탈 수 있었다. 홍 대표는 "심지어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국제버스에도 휠체어가 탈 수 있었다"고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스위스 인터라켄에 있는 유스호스텔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문의하기 위해 메일을 보냈더니 직원이 객실 문과 침대의 크기, 화장실 위치 등 세세한 사항을 답해 주었다. 또 일행이 있다면 한 방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예약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반면 우리나라 유스호스텔은 장애인분리 정책을 쓰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하이서울유스호스텔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데요, 장애인객실이 분리돼 있어요. 제가 '휠체어를 타고 가는데 일반객실에서 자겠다'고 하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만약 비장애인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해도 한 방에 묵을 수 없는 거예요. 다 뜯어고쳐야 하는 게 아니라, 공간을 조금 확보하고 샤워시설만 설치하면 되는데 그렇게 분리하는 거예요."누구든, 언젠가는 몸이 불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체장애인만이 이동약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홍 대표는 "법률적으로 이동약자에는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임산부, 아이가 있는 사람 등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승강기 설치·보도 정비·저상버스 도입 등은 장애인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언젠가 노인이 되고 부모가 될 우리 모두를 위한 정책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해외에서는 저상버스가 유모차가 와도, 보행이 어려운 노인이 와도 슬로프를 내려줘요. 말 그대로 이동약자를 위해 저상버스가 운영되는 거죠. 반면에 우리나라는 장애인만 저상버스를 이용한다고 생각해요."
홍 대표는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동약자들이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디어를 통해 보는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 등은 보통 사람들에겐 '남의 일'일 뿐이다. 이동약자가 사람들의 일상에 들어왔을 때야 비로소 '우리 일'이 될 수 있다. 이동약자들이 적극적으로 여행을 다녀야, 사회가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의 필요성을 각성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5월 제주도에서 고기국수로 유명한 거리에 갔는데, 모든 가게에 턱이 20센티미터(cm)씩 있는 거예요. 3~4cm 이상이면 휠체어가 올라갈 수 없거든요. 어떡하나 하다가, 턱이 하나인 곳을 골라서 좀 도와달라고 해서 가려고 했어요. 그때 마침 사장님이 나오시는 거예요. 사장님이 '유모차나 휠체어가 올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면서 꼭 경사로를 만들어 놓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장애인여행은 주로 시혜적인 복지차원에서 이뤄진다. 무료로 버스를 대절해주고 장애인들을 여행지로 보내주는 식이다.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난관이 펼쳐진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홍 대표는 "여행이 이동약자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가 협력해서 이동약자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이 문화관광 정보를 얻으려 관광정책과에 문의하면 장애인정책과로 넘겨 버리고, 장애인정책과에 문의하면 다시 관광정책과로 연결시키는 '떠넘기기'는 없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행,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홍 대표는 여행을 '자립을 체험할 수 있는 축소판'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예상치 못한 변수들에 대처하고, 자체적인 평가를 하면서 홀로 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끄는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는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의 축소판'을 경험하고 세상에 나가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응원한다.
서울시에서 일부 지원을 받아 다양한 공익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이동약자 여행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지난 6월부터 휠체어 이용 장애인·청각장애인·지적장애인 등 이동약자들이 모여 함께 여행을 떠나는 '독립여행'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0여 명의 참가자들이 잠실야구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했고, 경복궁 야간투어를 즐겼다. 직접 텐트를 치고 숯도 피워보는 도심 캠핑도 도전할 계획이다.
홍 대표는 유럽여행 경험을 담은 책 <유럽,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를 지난 7월 펴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떠난 여행, 유럽 7개국 25개 도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를 실었다. 그는 "이 책이 외출을 두려워하는 장애인들에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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